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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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힐링', 2014년 '의리'처럼 한 해를 되돌아보는 키워드는 언제나 의견이 분분하다. 각자 관심 분야가 다르고. 화제가 된 사건도 금세 새로운 이슈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쉽게 잊혀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2015년의 6분의 1이 지난 지금 사람들 입에서 가장 많이 오르내리는 단어는 분명하다. 충격적인 사건이 잊혀질만할 때쯤이면 또다른 경악을 금치 못할 사건이 터졌다. 그렇게 연결고리는 이어졌고, 2015년 키워드의 파급력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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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티즌이 가장 많이 본 기사에는 하나같이 '모멸감'이 들어간다. 갑의 횡포, 분노조절장애, 묻지 마 범죄, 악플, 감정노동, 우울증, 자살.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사건 사고의 근원에는 하나같이 부정적인 모멸감이 자리 잡고 있다. 저자 김찬호는 '모멸감'을 나의 존재 가치가 부정당하거나 격하될 때 갖는 괴로운 감정이며 인간 내면의 가장 깊숙한 곳을 파괴한다고 정의한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단순히 TV 뉴스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인의 일상에 만연해있다고 꼬집는다. 울분, 화, 분노와는 조금 다른 복잡미묘한 감정에 나, 너, 우리가 함께 힘들어하고 있다. 그리고 한국 사회가 병들고 있다.


사실 '작가' 김찬호보다는 김찬호 '교수'이란 호칭이 더 친숙하다. 대학교 시절 <문화인류학>이란 교양 수업을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 느꼈던 그에 대한 인상은 무척 주변에 호기심이 많고, 권위의식보다는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란 것이었다. 과제 역시 주변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사물이나 현상에 대해 '낯설게 보기'가 주어졌다. (수업의 호불호가 갈리긴 했다. 너무 자유로운 커리큘럼이라 평가의 기준이 모호하며, 준비가 부족하다고 느끼는 학생도 있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유로운 토론 분위기가 신선하고 즐거웠다.) 대학생의 언어 습관, 문과대 사물함 강제 철거 사건의 부조리함 등을 조목조목 자유롭게 짚어가는 과제가 부담보다는 즐거움으로 다가왔었다. KTX부터 찜질방까지, 한국 문화를 낯설게 보며 객관적으로 우리의 모습을 짚어낸 <문화의 발견>, '돈'이란 흥미로운 소재를 경제학이 아닌 인문학적 관점에서 비틀어 본 <돈의 인문학> 등 그의 저서도 교양 수업 커리큘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한국 문화의 특수성과 상대성을 귀납적으로 추리해가는 데 일가견이 있는 작가였다.


미국에서 감정노동이라는 개념이 처음 적용된 분야는 항공업계다. 여러 항공사들 사이의 경쟁이 점점 치열해지면서, 고객들을 사로잡는 차별화 전략으로 기내 서비스 직원의 친절함을 업그레이드하는 전략이 생겨났다. 말하자면 상냥함을 '끼워 파는' 것이었다. 곧이어 다른 분야들에까지 감정노동이 확산되면서, 더 이상 끼워파는 '덤'이 아니라 당연한 상품의 속성으로 받아들여지는 추세가 되었다. 그런 현실을 분석하기 위해 '감정 프롤레타리아'라는 개념도 생겨났다. 그러나 감정노동의 강도 면에서 보면 미국과 한국은 비교가 되지 않는다. 『감정노동』을 읽다 보면, 책에 소개되는 사례들이 너무 밋밋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만일 저자가 한국의 감정노동 현장을 조사한다면, 증보판 내지 개정판을 쓰고 싶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 본문 中


그가 새롭게 주목한 <모멸감>에도 역시 수많은 사례가 담겨 있다. 감정노동의 최전방에 있는 스튜어디스, 싸이의 강남스타일 열풍에 함께한 혼혈아 등 최근 한국 사회의 실제 상황부터 <지하로부터의 수기>, <윌든>, <삼국유사> 등 명작들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을 소개한다. 더불어 파울 클레, 변웅필, 오귀스트 로댕 등 예술가의 그림으로 각 장의 서론을 풀어나간다. 김찬호 작가는 언어의 어원부터, 다양한 문학작품에 녹아든 모멸감, 그리고 일상 생활에서 (특히 한국이란 특수한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모멸감의 향연을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그리고 이번 책에는 특이하게 CD도 함께 담겨있었다. '감정의 찌꺼기', '모욕의 응어리', '거머리 행진곡' 등 제목만 들어도 찝찝한 곡들이 10곡씩이나 담겨 있다. 저자의 텍스트를 읽고 받은 느낌을 소리로 표현한 프로젝트인데 사실 한 번 듣고 그리 유쾌하지 않아서 여러 번 돌려 듣지는 않았다.

 

모멸감의 위험성은 바로 전염성에 있다. 타인에게 받은 상처와 응어리를 자기를 파괴하는 데 그치지 않고, 나아가 또 다른 약자에게 모멸감을 전이시킬 수 있다. 그리고 약자와 강자를 구분 짓는 가장 흔한 요소가 바로 '경제력'이 돼버린 게 자본주의 사회다. 갑의 횡포를 당하는 '을'도 을의 횡포를 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근 '알바몬'의 최저임금법 CF에 집단 반발한 소상공인들이 대표적인 예다. (혜리의 애교가 섞인 CF는 공익광고 이상의 파급력을 뽐냈다.) 자신들은 대기업의 여러 계약에 묶여서 어쩔 수 없이 울며 겨자 먹기로 24시간 영업, 제품 밀어내기 등을 해야 한다고 울상을 짓지만, 그 아픔을 자신보다 더 경제력이 약한 아르바이트 학생에게 고스란히 떠넘기고 있다. 법으로 정한 시급을 주기 싫으면 아르바이트를 쓰지 않으면 그만인걸, 관례라는 이름으로 또 다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비슷한 예로 말도 안 되는 보수를 주면서 '아프니깐 청춘이다'란 헛소리로 세뇌시키는 '열정페이'가 있다.) 이처럼 부정적인 감정은 폭탄 돌리기처럼 남에게 번지기 마련이고, 그러므로 우리는 모멸감을 극복하기 위해 더욱 노력해야 한다.


 감정과 나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감정은 나 자신이 아니라 내 안에서 독립적을 자라나는 생명체 같은 존재다. 그것도 한 마리가 아니라 여러 마리다. 서로 힘을 겨루면서 맞서고 있는 '타자들'이다. 승부는 당연히 힘에 좌우되고, 내가 먹이를 주는 놈이 세진다. 먹이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 감정에 많이 머무는 것, 즉 그런 감정을 유발하는 상황에 자기를 노출시키거나 그런 사건이나 인물을 계속 생각하는 것 등이다.

- 본문 中


'부러워하지 말고, 부끄러워하지 말자.'

외모지상주의를 꼬집은 박민규의 소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에서 나온 글귀를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한다. 남의 시선에 가슴앓이하기 보다는 자존감을 가지고 주체적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비교'를 멈추어야 한다. 신이 아닌 이상 자신보다 뛰어난 사람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다. 지나치게 높은 기준을 설정하고 그에 못 미친다고 스스로 자괴감을 느끼는 일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그를 뛰어넘기 위해, 아니 따라잡기 위해 노력하는 그 과정 자체에서 즐거움과 성취감을 느껴야 한다. 모든 인간은 존엄하고 자신의 방식대로 삶을 살아갈 권리가 있다. (타인의 권리를 해치지 않는다면.) 감정의 주인이 되려면 감정과 나를 동일시하지 말고 독립적으로 자라나는 생명체로 다루어야 한다. 자신이 바라보는 대로 세상이 존재하기 마련이니 자기를 주의 깊게 성찰하는 노력이 제일 먼저 필요하다.


첫째, 구조적인 차원에서 접근이 요청된다.

둘째, 문화적인 차원에서 접근을 생각해야 한다. 

셋째, 개인의 내면적인 힘을 키워야 한다.


저자 김찬호의 맺음말에서 우리는 '모멸감'이 만연한 병든 사회를 치료할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생존'과 '정의'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 21세기에 '자존'의 문제는 가장 큰 화두다. 자기 인생의 주인공은 자신이며, 행복은 우월감이 아니란 사실을 언제나 되새기며 격조 있는 삶을 살아야 한다. 약육강식과 승리에 몰두하기보다는 여유와 배려로 함께 사는 삶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모멸감의 악순환을 끊을 수 있는 건 결국 이런 자존감이 높고 깨어있는 사람이다. 이들이 모여 더불어 행복한 문화를 만들고, 이는 사회 구조적인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도전은 아니다. 그러므로 함께 고민하고, 그 고민을 나누며,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한다.

 

물론 작은 실수나 우스꽝스러운 행동에 깔깔대는 정도는 동심의 발현이고, 모두가 함께 웃을 수 있는 유쾌함이다. 그러나 일정 선을 넘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처로 남는 경우가 많다. 어찌할 수 없는 신체적인 약점이나 장애 또는 불우한 가정환경 등을 부각시키거나 성적인 수치심을 자극하면서 키득거리는 것은 당사자에게 깊은 트라우마를 심어준다. 동기는 가볍지만 결과는 중대할 수 있다. ‘유희‘와 ‘희롱‘, ‘노는 것‘과 ‘놀리는 것‘ 사이의 간격은 의외로 좁다.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굴욕감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소비시장이다. 개처럼 벌었지만, 정승처럼 쓰고 싶다.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덮어씌우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만만치 않다. 최소환의 신체적인 안락을 위한 소비라면 어느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지만, 끊임없이 비교가 이루어지는 소비사회에서는 무시당하지 않기 위해 지출해야 하는 비용이 자꾸만 늘어나기 때문이다.

소통에는 정성이 중요하다. 정성이란 몸과 마음이 함께 있는 것이다. 지금 몸으로 함께 있는 사람이 내게 온 마음을 기울여줄 때 자신의 존귀함을 느끼게 된다. 그렇지 않고 듣는 둥 마는 둥 건성으로 경청하고, 하나 마나 한 말들만 늘어놓으면 자존감이 상한다. 그렇게 겉도는 만남과 대화 속에서 심성은 자꾸만 건조해지고 냉랭해진다. 친밀한 관계일수록 사소한 부주의가 상대방을 무시하는 태도로 받아들여져 섭섭한 감정을 자아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정신승리법‘이 초래하는 자가당착, ‘긍정의 배신‘을 늘 조심해야 한다. 때로는 타인의 모욕을 받으면서 내가 누구인지를 깨달을 수도 있다. 경멸은 자기의 정체를 비춰주는 시선이 될 수 있다. 『서준식 옥중서한』에 이런 구절이 있다. "깊은 사색 없이 단순 소박하기는 쉽다. 그러나 깊이 사색하면서 단순 소박하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을 기만하면서 낙천적이기는 쉽다. 그러나 자신을 기만하지 않으면서 낙천적이기란 얼마나 어려운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을 통해 확인받고 싶은 욕구는 엄청난데 서로를 인정해주는 너그러움은 부족하다. 웬만큼 잘나지 않으면 ‘괜찮은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여기에 저성장으로 인해 생존의 기반마저 흔들리면서 ‘남부럽지 않은 삶‘은 더욱 실현이 어려워 보인다. 거기에서 비롯되는 결핍과 공허를 채우려고 갖은 애를 쓰는데, 한국인들이 많이 취하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타인에 대한 모멸이다. 누군가를 모욕하고 경멸하면서 나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것이다. 모멸은 모멸감을 낳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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