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 - 라이언 킹 이동국 90분 축구 드라마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이동국 지음 / 나비의활주로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187cm, 83kg.

스트라이커는 최전방에서 수비수들과 끊임없이 부딪히고 견제를 이겨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어떻게든 골대 앞에서 수비수를 이겨낼 최상의 신체조건을 타고났다.


춘계고교대회, K리그, 아시안컵, 동아시아선수권, AFC챔피언스리그 득점왕.

스트라이커는 끈질긴 노력 이상의 타고난 골 감각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는 최상의 컨디션이 아니더라도 어려운 골이든, 쉬운 골이든 결국 득점에 성공한다.


A매치 101경기 32골, 클럽 467경기 204골.

스트라이커는 꾸준히 경기에 나오며 적은 기회를 반드시 잡아야 한다. 그리고 그는 청소년 국가대표 시절부터 30대가 넘어선 지금도 태극마크를 달면 언제나 최선을 다한다.

 

내가 본 한국 공격수 중 가장 이상적인 스트라이커에 가까운 선수는 이동국이다.

제로톱, 펄스나인(False 9, 가짜 공격수) 등 최근 축구 트렌드에서 정통 공격수가 설 자리를 잃어가고 있다. 점유율 중심의 축구가 유행하며 짧은 패스와 활발한 스위칭 플레이로 공격 기회를 만드는 미드필더가 최전방에 서곤 한다. 티키타카로 2010년 남아공 월드컵을 제패한 스페인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2011 아시안컵에서 득점왕 구자철을 배출한 한국 역시 재미를 봤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스트라이커'란 포지션에 대한 향수가 남아 있다. 펄스나인 역시 믿을만한 확실한 스트라이커가 없어서 생긴 궁여지책의 전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스페인처럼 자신들의 장점을 120% 발휘하기 위한 선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붙박이 스트라이커가 없어 미드필더 구자철을 최전방으로 올린 한국과 같은 경우가 이와 같다.) 스트라이커의 임무는 골을 넣는 것이다. 강력한 몸싸움으로 수비수를 벗겨내 헤딩으로 골을 넣든, 탁월한 위치선정으로 간결한 골을 넣든. 결국 득점에 성공해 팀을 승리로 이끄는 것이 스트라이커의 목적이다. 이를 위해선 상대의 집요한 견제를 이겨낼 탄탄하고 강력한 신체 조건과 단 한번의 기회를 골로 연결할 득점 감각이 꼭 필요하다. 


최근 에이스로 성장한 손흥민은 측면 공격수나 처진 스트라이커 자리에서 폭발적인 드리블 돌파, 과감한 중거리 슈팅으로 상대를 파괴하는 크랙 유형이다. 김신욱은 발밑 기술도 겸비한 선수로 압도적인 키를 활용해 제공권을 장악하는 타겟맨 유형이다. 박주영은 상대 수비와의 수 싸움에 능하고 기본기가 좋은 테크니션 유형이다. 하지만 이들은 내가 상상했던 스트라이커와는 다른 성향의 공격수다. 엄청난 욕을 먹지만 결국 1골로 비난을 환호로 바꾸는 선수. 최전방에서 우직하게 몸싸움을 펼치면 중요한 순간에 침착하게 골을 만들어낼줄 아는 선수. 그런 정통 스트라이커는 언제나 라이온킹 이동국이었다. (실력의 우위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하는 정통 스트라이커 유형에 부합하는 정도를 뜻한다.) 항상 중요한 순간에 결정적인 골로 기대에 보답했기 때문이다. 막내 이동국은 암울한 9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 네덜란드를 상대로 통쾌한 중거리 슈팅을 날리며 희망의 빛이 되었다. 그리고 2년 후 붕대를 칭칭 감고 진통제를 맞아가면서도 기어이 6골로 아시안컵 득점왕에 오르며 한국의 자존심을 지켰다. 안정환, 고종수와 K리그 트로이카를 결성하며 소녀팬들을 몰고 다니며 전성기를 누렸다. U-23 경기 31경기 22골이란 압도적인 기록도 이어갔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세상 그 어떤 것도 나를 흔들 수 없다>란 자서전 제목처럼 이동국의 빛보다는 그림자에 더 많은 비중이 실려 있었다. 유난히 시련이 많았던 축구선수 이동국, 인간 이동국의 담담한 회상이 담겨 있었다. 2002년 한일월드컵 엔트리 탈락, 2006년 무릎 십자인대 파열, 2010년 16강 우루과이전 통한의 마지막 슈팅. 최고의 찬사를 받지만 언제나 가장 외롭고 욕을 한몸에 받는 자리에서 그는 꿋꿋이 20년 넘게 버티고 있다. 게으른 천재, 똥볼 제조기, 국내용이란 온갖 비난에도 그는 주변의 편견에 흔들리지 않았다. 겹쌍둥이 아빠 이동국은 가족의 힘으로 자신만의 축구를 계속했다. 그리고 전북현대 입단 이후 최강희 감독을 만나 그 꽃을 피웠다. 프리미어리그 실패 이후 성남에서도 제대로 된 활약을 못 했던 이동국은 전북에서 제2의 전성기를 맞이했다.


"아무리 몸이 안 좋아도 네가 먼저 손을 들지 않는 이상 선발에서 빼지 않겠다. 10경기에서 골을 못 넣어도 널 믿겠다. 최근 2년 동안 잃은 자신감만 회복하면 넌 잘 할 수 있을 거다. 나는 네 기량이 대한민국 탑 레벨이라고 생각한다." - 최강희 감독


이렇게 자신을 믿는 감독 밑에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건 엄청난 행운이다. 그리고 이런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이동국은 10년 넘게 몸에 밴 스타일을 뜯어고치며 완전히 새로운 선수로 태어났다. 2011년엔 무려 15개의 도움을 기록하며 이타적이고 동료를 더욱 이용할 줄 아는 선수로 변했다. (22골로 득점왕에 오른 2009년엔 도움은 0개였다.) 노련미가 더해지며 상대 수비수의 신경전에 휘말리는 경우도 줄었고, 2선까지 내려와 연계 플레이에도 재미를 붙였다. 자신에게 최적화된 전술에서 결국 돋보이지 못하면 도태되기 마련인데 이동국은 부담감을 이겨내고 동료까지 살려주는 경기 운영에 눈을 떴다. 세계 최정상급인 발리슛의 비결도 동료들의 움직임, 패스 덕분이라며 공을 돌리는 걸 보면 더욱 성숙해진 걸 알 수 있다. 사실 수원 블루윙즈 입단 직전까지 왔다는 비화에 아쉬움이 무척 남지만, 사실 전북만큼 궁합이 잘 맞는 팀은 없다고 확신한다. (이동국이 아니라 이천수라니!!)


수줍음 많았던 까까머리 고등학교 시절부터 홍명보의 20번을 이어받은 포항 스틸러스, 재충전의 시기가 되었던 광주 상무, 아쉬움이 남았떤 해외리그 진출까지. 우여곡절이 가득한 그의 축구 인생만큼 인간 이동국의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7년 동안 묵묵히 (군대까지!) 기다려준 아내, 한날한시에 태어났지만 잘하는 것도, 성격도 딴판인 재시와 재아, 무뚝뚝하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아버지 등 가족 이야기도 흥미로웠다. 어린 시절, 가족 이야기, 시련, 전성기 등 평이로운 구성이었지만 읽는 재미가 쏠쏠했고 묘하게 포항 레전드 황선홍과도 닮은 점이 많았다. 가장 고독하고 욕을 한몸에 받는 스트라이커 계보를 이어가서 그럴까? 2002년 황선홍의 아름다운 마무리처럼 이동국 역시 언젠가 국가대표에서 멋지게 은퇴할 수 있길 바란다. (사실 준우승을 거둔 이번 아시안컵이 최고의 타이밍이었는데 부상이 발목을 잡았다.)


사실 운동선수 중 시련이 유난히 많은 선수는 없다. 하지만 황선홍, 박지성, 이동국처럼 그런 시련을 이겨내고 성공으로 결실을 본 선수가 드물기에 더욱 빛나는 법이다. 그 누가 이동국을 비난한다 하더라도 그는 한국 축구에 뚜렷한 발자취를 남긴 훌륭한 선수다. 조급함을 버리고 여유를 찾으며 더욱 일이 잘 풀리는 그를 보며 많은 걸 배웠다. 순간순간 간절하게 목표를 향해 뛰면서도, 스스로 여유를 찾고 쉬어갈 줄 알아야 한다는 건 비단 축구에만 적용되는 말이 아닐 것이다. 실패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다시 처음부터 착실하게 준비하면 되는 법이다. 그렇다면 이동국이 맞이한 제2의 전성기처럼 최고의 자리에서 웃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리그에선 얄미운 적이지만) 대한민국 축구팬의 한사람으로서 스트라이커 이동국을 응원한다. 

 

축구선수 이동국의 트레이드마크는 발리슛이다. 그 동안 중요한 순간, 큰 경기에서 터진 골들은 어김없이 발리슛이었다. 그 어려운 슛을 어떻게 그렇게 잘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발리슛은 나만 잘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고도의 집중력, 순간적인 반응, 센스 있는 처리 등 내 안에 내재된 요소도 중요하지만, 나에게 알맞은 패스를 올려주고, 보이지 않는 움직임으로 나를 자유롭게 만드는 동료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찰나에 이뤄지는 그 수많은 상황이 딱 맞아떨어질 때 발리슛이 완성된다. 인생에서도 그런 아름다운 조화의 발리슛을 날리고 싶다.




축구 선수 이동국은 항상 모두의 사랑을 받는 존재는 아니었다. 나를 열렬히 응원하는 사람들만큼 시기하고 헐뜯는 이들도 많았다. 나를 믿고 신뢰하는 지도자도 있었지만, 내 능력을 절대 인정하지 않으려는 지도자도 존재했다. 예전엔 그런 상황이 짜증나고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고 나니 내게 부정적인 사람들의 생각을 하나 둘 바꿔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게 돌아선 마음을 다시 되돌리면 그들이야말로 둘도 없는 나의 지지자가 될 것이라는 걸 알고 있다.




네덜란드 선수들이 얼마나 잘하는지 직접 부딪혀 보고 싶었다. 들어가서 상대 수비수와 한 번 부딪혔는데, 밖에서 볼 때만큼 두렵지 않았고 생각보다 힘이 대단하지도 않았다. 투입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드디어 기회가 왔다. 나는 골대에서 먼 거리였지만 상대 수비수를 밀고 들어가며 적극적으로 슈팅을 날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판 데르 사르 골키퍼를 지나 골대 위로 살짝 넘어갔다. 이것이 바로 세계를 향해 날린 나의 첫 번째 슈팅이었다.




우루과이전이 끝나고 나는 넬슨 만델라 베이 스타디움 그라운드에 우두커니 서서 내리는 비를 바라보며 허무한 마음을 달래지 못해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실패한 사람을 더 많이 만나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번에 성공한 사람은 성공으로 가는 길밖에 모른다. 나중에 위기가 오면 그대로 무너진다. 실패한 사람은 왜 자신이 실패했는지 안다. 그 후에는 쉽게 실패하지 않는다. 지금 이 순간의 실패도 결국 성공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임을 믿고 싶다. 나는 시원한 비를 가슴 속에 새기며 돌아섰다.




축구 선수인 나의 영광이 숨어 있고, 노력으로 그것을 찾는 곳이라고 믿었다. 그라운드는 이제 내게 새로운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내가 아닌 우리 모두의 가치를 찾아가는 공간, 나로 인해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 공간. 때론 삶에서 받은 상처를 씻어낼 수 있는 공간. 그 그라운드에서 나는 내게 주어진 남은 시간 동안 더 벅찬 감동을, 더 큰 희망을 사람들과 나누고 싶다.

지금은 언론도, 팬들도 선수의 부상에 큰 관심을 보이고 그 선수를 보호해야 한다는 경각심이 있지만 당시엔 그런 게 없었다. 태극마크는 진통제였다. 태극마크를 달면 아파도 그냥 뛰어야 했다. 나보다 앞서 투혼이라는 이름으로 부상을 참고 뛰며 선수 생명을 단축시키는 선택을 해야 했던 선배들이 얼마나 많았을까? 내 뒤에도 이천수, 박주영 같은 후배들이 그렇게 혹사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앞으로 한국 축구에서 절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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