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 평전
안도현 지음 / 다산책방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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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쟁이 한반도를 휩쓸고 지나가는 3년 동안 백석은 10권이 넘는 소설과 시집을 번역했다.”

이 문장을 읽는데 가슴에 뜨거운 것이 치밀고 올라온다. 책이 후반부로 갈수록 가슴이 미어진다. 비참한 결과를 미리 알고 보는 영화 같다. 이제 곧 비참해 지겠지, 점점 더 비참해 질 거야. 북한에서 발표한 시나 산문은 도저히 읽지 못하겠다. 눈으로 금방 금방 흘려 넘긴다. 내가 존경하던 선배가 살기 위해 자신을 팔아넘기는 장면이라도 목격한 것처럼 속이 에인다. 엄혹한 일제시대 조차 백석에게 이런 노골적인 글을 쓰도록 강제 하지 못했다. 백석은 자유주의 시인이었지 한 번도 정치적인 글을 쓰거나 입장을 표명한 적이 없었다.

 

  정치적이지 않았던 백석은 그 누구보다도 정치적인 자세를 유지했다. 독립만세운동을 조직하지 않았지만 시를 쓸 때는 우리말을 썼다. 민족이나 독립에 대해 남긴 글은 없지만 본인이 일본말로 시를 쓰지 않음으로서 그 생각과 의지를 결과로 증명했다. 문인들이 자의든 타의든 친일 활동을 할 때도 백석은 만주 일대에서 붓을 꺾고 생활했다. 어느 당파에도 속하지 않았지만 살기 위해 매문을 하지 않고 차라리 가난과 고립을 택했다.

 

  내가 처음 백석의 시를 읽은 것은 대학 입학한 후였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그리고 흰 바람벽이 있어를 읽으며 뭐랄까 충격이랄까 감동이랄까. 나만 알고 있는 멋진 시를 발견한 것 같은 흥분이 일었다. 잘생긴 얼굴과 바람결 같은 모양의 머리 그리고 월북한 시인이라는 것. 자야라는 기생과 동거 했고 그 분이 운영하던 요정을 법정 스님께 시주해서 그곳이 길상사라는 절이 됐다는 것. 그 외에는 백석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다.

 

  일본 유학을 다녀오고 조선일보에 취직해서 모던보이로 경성을 누비고 다니는 시인의 모습이 떠오른다. 통영의 처녀에게 반해서 그녀를 보러 먼 길을 다녀오는 모습, 돌아오는 길에 요릿집에 들러 기생들과 술을 마시고 연락처를 남기지만 막상 연락오니 당황하는 모습이 우습다. 백석의 개인적인 삶에서는 이 시기가 가장 행복한 때였으리라. 하지만 시인의 외로움과 경제적 궁핍이 심해질수록 시는 좋아진다. 함흥의 영어교사로 가서 세상과 격리되어 있을 때의 시가, 일제의 탄압을 피해 만주로 떠났을 때 고독과 외로움이 묻어나는 시가 훨씬 좋다.

 

  가족과 함께 북에 가정을 꾸렸을 때 시인은 더 이상 본인의 의지로 살 수 없다. 처음에는 번역을 하면서 외국문학 분과위원으로 지내지만 문학이 정권의 나팔수가 되고 아동문학이 천편일률적으로 흐르자 결국 자기 목소리를 낸다. 목소리를 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벌떼 같이 달려드는 주류에 공격받고 시인은 유배된다. 삼수갑산의 오지로 가서 평생 해보지도 못한 농사일을 한다. 축출당하기 전에 시인은 처음으로 체제 찬양적인 시와 글을 쓴다. 그러나 그 글들조차 시인을 구원하지 못했다. 시인으로서의 백석은 이때 압사되어 절멸한다.

 

  편안한 시대에 태어났다면 백석은 시골 영어 교사를 하면서 틈틈이 시를 쓰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지만 백석은 끊임없이 정치적인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이 그의 삶을 결정했다. ‘서정시를 쓰기 어려운 시대에 태어난 시인 백석은 오래 살아남아 조국의 애환을 온몸으로 겪어낸다. 전쟁 중에 원고를 들고 다니며 번역에 몰두하는 시인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그의 분투에 오늘 나는 가슴 한 구석이 서늘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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