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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는 군산에 가는가 - 해방 후 3세대가 본 일제강점기
강석훈 외 지음 / 글누림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고향이 어디냐는 질문에 나는 언제나 전주라고 대답한다. 실은 초등학교 6학년 때 군산에서 전주로 전학 왔다. 내가 고향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두 곳이다. 친가와 외가가 있는 김제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군산인데 두 군데 모두 전라북도 소도시니까 변두리 출신이라고 할 수 있다. 중 고등학교를 전주에서 나온 데다 김제나 군산 같은 작은 도시는 모르는 사람이 많고 거기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아서 그냥 전주 출신인 척 한다. 사람들은 전주 출신이니 음식을 잘 하냐고 물어보거나 전주비빔밥이 맛있는 곳이 어디냐고 물어본다.
일하는 엄마는 음식을 잘 못했고 비빔밥은 집에서 그냥 비벼 먹는 거지 사먹는 건가 싶었다. 한마디로 전주에 있을 때 비빔밥을 한번도 사먹지 않았다. 중 고등학교 때 집 학교 도서관 이외 가본 적도 없어서 실은 누가 전주에 대해 물어봐도 대답이 변변찮다. 요즘은 한옥마을이나 전동성당 등이 유명해져서 관광지가 되었다. 내 유년의 기억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곳은 끝도 없이 펼쳐지던 논이 있는 김제나 바다가 넘실거리는 군산이다. 특히 군산에서 많이 돌아다녔다.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군산에 가기 시작했다. 오래된 ‘이성당’의 단팥빵을 먹으러 가기도 하고 누가 정했는지 모를 3대 짬뽕집인 ‘복성루’를 방문하기도 했다. 사람들은 숨겨진 맛 집을 방문하고 이색적인 풍경을 나만의 카메라에 담는 이른바 ‘출사’의 명소로 군산을 소개했다. 멋지게 편집되어 올라오는 군산의 풍경은 반가웠지만 낯설었다. 화질 좋은 카메라가 편집한 그런 근사한 풍경이 군산에는 없다.
찝질한 비린내가 가득하고 바다는 속을 알 수 없는 진흙탕에 기름이나 스티로폼이 떠다니는 곳, 그곳에서 나는 일제시대 건물인 군산 국민학교를 다녔고 남동생은 안국사(현 흥천사) 유치원을 다녔다. 우리 남매가 헤메고 다니던 서국민학교 앞의 해망동 굴다리나(주로 방방을 탔던) 까만색 게를 주우려고 노력하던 째보 선창이 다 역사적인 곳이었다니 놀랍다. 우리 가족이 주말마다 놀러갔던 월명공원의 수시탑 자리가 해망정이 있던 자리란다.
군산 시내와 개항장을 연결하기 위해 일제시대 때 지었던 해망굴은 바닷바람이 들어와 시원해서 여름이면 인기만점이었는데 강제 징집된 조선인이 손으로 직접 바른 천정의 손 무늬를 책에서 처음 봤다. 한국 전쟁 때 폭격을 피해 북한군이 지휘본부를 이곳에 설치했는데 그 당시 유엔군의 폭격기 총탄 자국도 마찬가지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이제 식상할 정도로 익숙한 말인데도 또 쓸 수밖에 없다. 내가 어린 시절에 드나들었던 해망굴에 이런 역사가 있었다니......
로마에 갔을 때 가이드 한 분이 평범하게 생긴 작은 성당을 가리키며 여기서 갈릴레이가 지동설을 주장했다고 이야기했을 때 감동적이었다. 벽돌 하나 조각 하나에 깃들지 않은 이야기가 없었고 그 무거운 역사와 함께 하기 위해서 후손들은 불편함을 감수하고 있었다. 어릴 적 내가 자란 도시 곳곳에 비록 일제시대의 잔재긴 해도 많은 건물과 유적이 남아있다는 것 그리고 그런 역사를 찾고 공부해서 상세히 설명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감사했다.
중국집에서 외식하고 돌아갈 때마다 아빠는 이성당 빵집에서 커다란 롤리팝을 사주셨다. 색색의 사탕을 물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행복’ 그 자체였다. 그 길에는 미군들을 위한 호피무늬 실크 잠옷이며 군용 잠바를 파는 가게들이 즐비했다.
우리 할아버지가 수확한 만경 평야의 쌀이 기차를 타고 째보 선창에 뜬다리를 통해 배에 실리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알고 보니 도시 전체가 시대를 앓은 흔적으로 가득하지만 내게는 행복한 유년 기억의 한 부분이다. 얼마나 변했는지 한 번 가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