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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 문학과지성사 / 2014년 3월
평점 :
병원에서 일 하다보면 가끔 ‘뚜껑’이 열릴 만큼 열 받을 때가 있다. 손끝이 분노로 바들 바들 떨리고 얼굴이 화끈거리면서 목소리가 흔들린다. 가끔씩 터져 나오는 ‘분노’의 기원이 어디인지 궁금했다. 개인적인 인격의 문제인지, 숨겨진 원인이 있는 건지 감정의 쓰나미가 지나가면 감정 조절 실패에 후회하면서도 막상 비슷한 상황이 오면 되풀이 된다. ‘수신’ 책을 읽으며 인격을 가다듬어 보아도 ‘도’는 아무도 없는 면벽 수련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사람 속에서 부대끼며 이루는 것이 훨씬 어렵다는 것을 깨닫는다.
모멸은 모욕하고 경멸하는 것, 즉 마음으로 낮추어 보거나 하찮게 여기는 것이다. 다시 말해 다른 사람을 의도적 혹은 무심코 격하시키고 그 존엄성을 부정하는 것, 상대방을 비하하고 깔아뭉갬으로써 수치심을 유발하는 행위다. 이런 행동들은 수치로 계량화 할 수 없다. 퉁명스러운 말씨, 안하무인의 태도, 경멸하는 듯한 표정, 자연스럽게 섞여 나오는 반말투...... ‘심증’은 있으나 ‘물증’을 잡기가 어려운 상황들이다. 인간은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 인식하고 타인을 통해 확인하면서 살아 있음을 느낀다. 모욕은 바로 그 자존감을 손상시키는 행위다. 모욕의 핵심은 상대방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거나 격하시키는 것이다. 그로써 나의 존재 가치가 높아지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다.
저자는 이런 현상의 원인으로 불균형을 꼽는다. “경제의 규모는 막대하지만, 그 결실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누는 시스템이 부실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면서 죽음을 준비하기는 훨씬 힘들어졌다.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혹독하게 경쟁하면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을 견디기 어렵다. 이런 원인으로 일상과 사회 곳곳에 감정의 지뢰밭이 드리워 있는 듯하다. 표출할 대상을 만나면 쌓여 있던 화를 한꺼번에 분출한다. 나는 분노한다, 고로 존재한다. 노동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견뎌야 하는 과로와 스트레스 그리고 굴욕감은 어디에서 보상받을 수 있을까. 현대사회에서 가장 유력한 것은 바로 소비시장이다. 돈 벌면서 받은 ‘천대’를 돈 쓰면서 받는 ‘환대’로 갚는다.”
모멸은 다른 모멸로 이어지면서 자괴감과 수치심을 확대 재생산하고, 거기에서 비롯되는 분노는 자기나 타인에 대한 폭력으로 표출된다. 내가 무심코 반복하는 언행이 사회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부다. 타인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관행에 나는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사회학자로서 많이 연구된 분야가 아닌 생소한 분야의 도전은 의미 있었으나 논지를 전개할 때의 논거들끼리의 인과성이 약했다. 에피소드가 주로 논거로 사용되는데 그 점이 이 책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간혹 에피소드 앞뒤가 부자연스럽기도 하고 너무 많은 이야기들을 하려고 해서 집중도가 부족한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치화 할 수는 없으나 우리 곁에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은 ‘존엄’과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각도에서 다룬 새로운 시도가 돋보였다.
가끔 진료실에서 무례한 환자들을 만나거나 자신의 역할이 최고인양 으스대는 직원을 맞닥뜨릴 때 돈을 적게 받아도 존경받고 존중받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러다가 문득 내가 진료실에서 작은 표정이나 말투로 다른 누군가를 불쾌하게 하지는 않았나 직원에게 네가 뭔데? 가 아니라 내가 뭔데? 라고 생각해 봤나 고민하게 된다. 이런 눈에 보이지 않는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서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 그리고 인간을 존엄하게 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생각해보게 되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