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사임당을 그리다 - 내실에서 꿈을 찾은 예술가
정항교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16년 4월
평점 :
사임당은 지극한 효녀요, 7남매의 훌륭한 어머니인데다가 학문이 깊고 시문에 뛰어난 여류 문인으로서 글씨와 그림, 바느질과 자수에 이르기까지 정묘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그러나 제아무리 뛰어난 재주를 지녔다 할지라도 인격과 덕을 갖추지 못했다면 그것은 한낱 재주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나 사임당은 인격도 뛰어났고 덕 또한 높은 분이었다. 당시는 여자가 길쌈하고 바느질 잘하면 그만이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사임당은 여성에게 씌워진 그 많은 모진 조건을 모두 이겨 내고 자신이 지니고 있던 잠재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은상은 ‘중국 역사상 글씨와 그림으로 이름을 떨쳤던 여성들도 한두 가지에만 능했으나 종합적인 전인여성으로 시와 그림, 그리고 글씨, 자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신묘한 경지에 도달한 사람은 사임당뿐이라 했다.
우리는 흔히 사임당을 현모양처(賢母良妻(현모양처))라 하는데 사실 나를 낳아 길러 주신 어머니, 나의 아버지를 낳아 길러 주신 할머니, 나의 어머니를 낳아 길러 주신 외할머니가 모두 현모양처이다. ‘양처(良妻(량처))’라는 말은 <사기(史記(사기))에 “나라가 어지러우면 어진 신하가 생각나고〔國難則思良臣(국난칙사량신)), 집안이 가난하면 어진 아내가 생각난다(家貧則思良妻(가빈칙사량처))”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어렵고 가난한 시기에 우리를 낳아 기른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 모두가 양처이다. 사임당은 양처이면서 자신의 재능을 스스로 개발하여 자아를 실현한 21세기 여성, 시와 그림 속에서도 어머니를 그린 효성스러운 여성, 남편을 입신양명(立身揚名(입신양명))케 한 어진 아내, 백대의 스승 율곡은 물론 7남매를 태교로 키운 훌륭한 어머니, 글씨, 그림, 자수 등 정묘한 예술세계를 개척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여류 예술인, 근검절약을 몸소 실천한 참된 살림꾼이었다. 이 모든 것이 바로 사임당의 참모습이라 할 수 있다.
사임당은 1504년 경포대 근처 호숫가 강릉 북평촌, 지금의 오죽헌(烏竹軒(오죽헌))에서 태어나 1551년 서울에서 48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때는 조선 전기라 여성은 이름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사임당도 이름이 없었고 다만 자신이 지은 ‘사임당(師任堂(사임당))’이라는 호(號(호))만 전하고 있다. 사임당은 딸만 다섯을 둔 집안에 둘째 딸로 태어났다. 나면서부터 인물이 고운 데다 품성이 뛰어나 부모로부터 각별한 사랑을 받고 자랐다. 뿐만 아니라 총명하고 재주가 남달리 뛰어나 여자로서 갖추어야 할 도리는 물론 바느질이나, 자수, 글씨와 그림, 학문과 예술에 이르기까지 눈부신 천재적 소질을 발휘하였다. 이는 물론 사임당의 타고난 자질 덕분이기도 하겠으나 무엇보다 예의범절이 뛰어난 어머니 이씨(생원 李思溫(이사온)의 따님)와 학문이 높았던 아버지 진사 申命和(신명화)의 지극한 자녀 교육의 영향 때문이었다.
사임당은 19세에 서울의 李元秀(이원수)에게 시집가 10년씩이나 남편의 학문을 위해 떨어져 살기를 원했고 실천하여 후에 종5품 水運判官(수운판관)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우리 인류사 최초로 태교(胎敎(태교))를 실시한 여성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태임은 임신을 한 열 달 동안 ‘눈으로는 예법에 어긋나는 것은 보지 않았고(非禮勿視(비례물시)), 귀로는 예법에 어긋나는 것을 듣지 않았고(非禮勿聽(비례물청)), 입으로는 예법에 어긋나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며(非禮勿言(비례물언)), 행실로는 예법에 어긋나는 것을 행하지 않았다(非禮勿動(비례물동))’고 했다.
허균은 ‘율곡 선생의 모친은 신씨였는데 성품이 차분하고 강직하였으며 글도 잘 쓰고 그림에도 소질이 있었다. 여자로서의 규범이 매우 엄하여 언제나 여자가 지켜야 할 법칙으로 몸을 단속하였으니 율곡선생의 학문은 바로 어머니 사임당의 태교에서 얻어진 것이다(栗谷(율곡) 先生母(선생모) 卽申氏少女(즉신씨소녀) 性貞靜剛方(성정정강방) 能文且解丹靑(능문차해단청) 閨範甚嚴(규범심엄) 動以律身(동이율신) 先生之學(선생지학) 得於胎敎者爲多(득어태교자위다))’라고 하였다. 율곡은 훗날 이르기를 어머니께서 실시한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고,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동하지 말라’는 네 가지 태교법은 여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선비가 몸을 닦는 데에도 필수 덕목이라고 했다.
《동계만록東溪漫錄(동계만록)》을 보면 사임당이 남편과 문답한 내용이 있는데 다음과 같다.
이원수:공자가 아내를 내보낸 것은 무슨 예법에 근거한 것이 오?
사임당;공자가 노나라 소공 때에 난을 만나 제나라 이계라는 곳으로 피란을 갔었는데 그 부인이 공자의 가족을 따라 가지 않고 바로 송나라로 갔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공 자가 그 부인하고 다시 동거하지 아니했을 뿐이지 바로 내쫓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이원수:증자가 부인을 내쫓은 것은 무슨 까닭이오?
사임당:증자의 부친이 찐 배를 좋아했는데 그 부인이 배를 잘 못 쪄서 부모 봉양하는 도리에 어긋났기 때문에 내쫓은 것입니다. 그러나 증자도 한 번 혼인한 예의를 중히 여 겨 다시 새장가는 들지 않았습니다.
이원수:주자의 집안 예법은 어떠했소?
사임당:주자 나이 47세에 부인 유씨가 죽고 맏아들 숙(塾(숙))은 아직 장가를 들지 않아 집안 살림을 할 사람이 없었지 만 주자는 다시 장가들지 않았습니다.
문답에서 보듯 사임당의 학문은 깊고 출중했으며 7남매 자식을 위해서라면 남편에게도 충언을 아끼지 않았다.
화가 사임당의 풀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 살아 있는 <조충도>
‘그림으로서 세상에 드러난 이는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그 모두는 남자요, 부인은 극히 드물다. 게다가 잘 그리는 사람은 많아도 신묘한 경지에까지 들어간 사람은 우리나라에서도 오직 사임당 신씨뿐이다.’ 1764년 이조판서를 지낸 홍양한(洪良漢(홍양한))이 한 말이다. 심지어 숙종은 자신의 장인 경은부원군 김주신이 소장하고 있던 사임당의 <조충도>를 직접 보고 똑같이 그리게 한 다음 병풍을 만들어 대궐에 두고 감상했다.
惟草惟虫(유초유충)(유초유충) 풀이랑 벌레랑
狀貌酷似(상모혹사)(상모혹사) 실물과 똑같구나
婦人所描(부인소묘)(부인소묘) 부인의 솜씨인데
何其妙矣(하기묘의)(하기묘의) 어찌 그리 묘하다니
于以摸之(우이모지)(우이모지) 하나 더 모사하여
作屛殿裡(작병전리)(작병전리) 대궐에다 병풍 쳤지
惜乎闕一(석호궐일)(석호궐일) 안타깝다 빠진 한 폭
疊摸可已(첩모가이)(첩모가이) 다시 하나 그릴 수밖에
只以采施(지이채시)(지이채시) 채색만을 썼는데도
此尤爲美(차우위미)(차우위미) 한층 더 아름다워
其法維何(기법유하)(기법유하) 그 무슨 법이런가
無骨是耳(무골시이)(무골시이) 무골법이 이것일세
-肅宗御製(숙종어제)숙종어제-
좌의정까지 올랐던 權尙夏(권상하)는 <조충도>를 보고 ‘줄기와 잎사귀는 마치 이슬을 머금은 것 같고 풀벌레는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으며 오이와 수박을 보고 있노라면 저도 몰래 입에 침이 흐르니 어찌 천하의 보배라 하지 않으리오’라고 했다.
사임당은 글씨에서도 새로운 서풍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그래서 조선시대 이름난 선비들이 사임당을 ‘여중군자’요.‘여류 선비’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우리 역사상 사대부 선비들이 여성을 이같이 평가하는 예는 사임당밖에 없다.
1869년 강릉부사로 온 尹宗儀(윤종의)는 사임당의 글씨를 보고 ‘정성 들여 그은 획이 그윽하고 고상하며 또 정결하고 고요하여 사임당 신부인은 문왕의 어머니 태임의 덕을 본받고자 했음을 우러러볼 수 있다’라고 감탄했다. 또 윤종의 부사로부터 사임당의 판본 글씨를 받아 본 尹鍾燮(윤종섭)은 ‘초서 필체가 묘경에 들어 등꽃처럼 예스럽고 자체의 변화가 구름 같아 마치 하늘에 구름이 비를 만들어 베푸는 조화와 같다’라고 극찬했다.
우리나라 초서풍의 서체는 16세기 전반 중국 명대 중기의 초서풍이 수용되어 유행하였는데 사임당의 초서풍은 정확히 어느 화풍을 따랐는지 분명하지 않다. 율곡도 <어머니 행장>에서 ‘어머니는 어렸을 때 경전에 통했고 글도 잘 지었으며 글씨도 잘 썼다’라고만 밝혀 놓았기 때문이다. 당시 사임당의 부친 신명화 공이 己卯名賢(기묘명현)인 이들과 친분이 두터운 데다 교류가 잦았기 때문에 사임당은 기묘명현들이 추구한 왕희지 서체에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고유 문자가 없던 세종 때까지 여류 문학은 그야말로 희미하기 그지 없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이전까지 한자로의 기록이라면 여옥(麗玉(여옥))의 <箜篌引(공후인)공후인>,진덕여왕의 <致唐太平頌(치당태평송)치당태평송>이 전할 뿐이다. 이후 훈민정음의 보급책으로 佛典(불전)(불전)의 번역 사업에 맞춘 이른바 내간체의 施用(시용)(시용)은 비단 부녀자를 위해서만은 아니지만 여류 문학의 발전에 원동의 된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釋譜詳節(석보상절)석보상절》과 《月印千江之曲(월인천강지곡)월인천강지곡》, 그리고 계속된 佛經諺解(불경언해)(불경언해)로 말미암아 훈민정음이 문자로 정착했고 소현 황후에 의해 《內訓(내훈)내훈》과《女四書(여사서)여사서》가 간행되어 비로소 여류 문학이 뿌리 내리게 되었다. 그러나 삼강오륜을 앞세운 남녀유별의 빗나간 가르침은 삼종지도와 칠거지악의 폐단을 낳았고 이는 결국 여성 교육의 당위성을 짓밟아 여류 문학의 부재를 가져오고 말았다. 더욱이 여성의 순종을 미덕으로 보채는가 하면 여자는 누에치기, 길쌈, 그리고 바느질에만 전념케 한 채 문자 교육은 철저하게 외면하는 바람에 여간한 천재가 아니고는 한문의 문리는 깨칠 수 없었다. 비록 어깨 너머로 배웠다 하더라도 한자로 시를 짓는다는 것은 엄두도 내기 어려웠다. 이렇듯 여성에게는 질곡의 시대에도 사임당과 같은 걸출한 여류 시인이 태어났다. 비록 7언 율시 한 수와 7언 절구 한 수가 전할 뿐이지만 이 두 시를 통해서 사임당이 추구했던 이상, 나아가 삶의 미학까지 살펴볼 수 있다.
율곡은 <어머니 행장>에서 “어머니께서는 어려서부터 유교 경전에 통했고, 글도 잘 지었다”라고 했다. 사임당은 학문이 높았던 아버지 신명화와 어머니 용인이씨, 그리고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로부터 일찍이 학문과 예술을 익히고 배웠던 것으로 보인다. 딸만 다섯이었던 집안의 둘째 딸 사임당은 총명하여 부모로부터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19세에 이원수에게 시집갈 때 아버지 신명화는 사위에게 “내가 딸이 많은데 다른 딸은 시집을 가도 서운하질 않더니 자네 처만은 내곁을 떠나보내고 싶지 않네 그려”라고 했다. 둘째 딸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부모의 각별한 보살핌 덕에 사임당은 학문과 예술적 소질을 계발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사임당의 친정어머니를 생각하며 지은 7언 절구 <대관령을 넘으며 친정을 바라보다 踰大關嶺望親庭(유대관령망친정)>이다.
慈親鶴髮在臨瀛(자친학발재임영) (자친학발재임영)늙으신 어머님을 고향에 두고
身向長安獨去情(신향장안독거정) (신향장안독거정)외로이 서울로 가는 이 마음
回首北村時一望(회수북촌시일망) (회수북촌시일망)이따금 머리 들어 북촌을 바 라보니
白雲飛下暮山靑(백운비하모산청) (백운비하모산청)흰 구름 떠 있는 곳 저녁산만 푸르네
-《율곡전서》권18-
당시 사임당은 38세, 친정어머니는 62세, 서울로 함께 간 율곡은 6세였다. 제1구와 2구에서는 백발이 되신 어머니를 홀로 두고 어쩔수 없이 서울 시댁으로 돌아가야 하는 외롭고 서글픈 마음을 담았다. 제3구와 4구에서는 대관령 구비를 돌 때마다 어머니 계신 곳을 바라보았으나 어머니 계신 곳은 아득하고 다만 보이는 저물어 가는 북평촌엔 흰 구름만 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제4구의 ‘백운’은 ‘白雲之思(백운지사)백운지사’ 혹은 ‘白雲孤飛(백운고비)백운고비’라고도 하는데 중국 당나라 때 狄仁傑(적인걸)적인걸 이라는 효자의 이야기에서 유래한 것이다. 적인걸이 산서성 태원부 법조참군으로 임명되어 갈 때 大行山(대행산)대행산 꼭대기에 이르자 일행들에게 말을 세우게 하고 흰 구름 덮인 곳을 바라보며 “저 구름 아래 우리 어머니가 계신다‘라 하고 오랫동안 섰다가 그 구름이 다 옮겨간 뒤에 그곳을 떠났다고 한다.
그러므로 여기서의 백운은 어머니를 그리는 대명사로 이 시의 핵심이다. 사임당은 이미 《唐書狄仁傑傳(당서적인걸전)당서적인걸전》을 읽고 여기에 실려있는 ‘백운고비’를 意取(의취)(의취)했다. 사임당을 여류 시인이라 하는 까닭도 이렇게 감쪽같이 둘러맞추는 ‘天衣無縫(천의무봉)(천의무봉)’의 재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미 남이 쓴 詞華(사화)(사화)라고 망설이다가는 한 구도 지을 수 없는 것이 한시이니 도리가 없다. 따라서 중국의 시나 우리의 古詩(고시)(고시)를 되베끼어 쓰되 새로운 감각을 자아내게 꾸미는 재치가 名人(명인)과 凡人(범인)의 차이이다. 제4구 ‘백운비하모산청’은 경치를 빌려 자신의 정을 담은 ‘景中有情(경중유정)(경중유정)’으로 含蓄不盡(함축불진)(함축부진)의 맛이 넘친다.
끝으로 화폐에 들어가는 초상화는 그 나라 국민들로부터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나 어느 특정 분야에 뚜렷한 업적을 남긴 인물이 채택되기 마련이다. 화폐는 도안의 정수가 담겨 있는 결정체로 국가의 상징이자 얼굴이다.
오죽헌은 여성의 사표요, 겨레의 어머니로 불리는 사임당과 겨레의 스승으로 추앙받고 있는 율곡 이이가 태어난 곳이기에 일찍부터 많은 주목을 받아 왔다. 그러다 이곳에서 태어난 율곡과 사임당 두 모자가 5,000원 권과 5만 원 권의 화폐 도안 인물이 되자 오죽헌은 세계 최초 모자 화폐 인물 탄생지로 부각되면서 더욱 관심을 받게 되었다. 심지어 중국 관광객들 사이에 ‘오죽헌을 다녀가지 않으면 부자가 될 수 없다’라는 말까지 생겨났다고 한다. 화폐박물관에 따르면 지구상 통용되고 있는 1,600여 종의 화폐 가운데 모자가 화폐 인물이 된 것은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다 고 한다. 화폐에서 가장 핵심은 인물 초상화이지만 인물과 관련이 있는 보조 소재 또한 화폐의 꽃이다. 2007년 새로 발행된 5,000원 권의 보조 소재로는 사임당의 <조충도> 가운데 ‘수박’과 ‘맨드라미’가 채택되었다. 사임당의 철학이 담겨 있는 <조충도> 가운데 수박은 다산을 상징하는 식물로 가문의 번창을 뜻하고, 맨드라미는 鷄冠花(계관화)(계관화)라 벼슬, 즉 입신양명을 의미한다. 따라서 5,000원 권 보조 소재에는 ‘아들 딸 많이 낳아 훌륭하게 키우자’는 의미가 담겨 있다. 5만 원 권의 보조 소재로는 사임당의 ,묵포도> 그림과 <자수초충도>의 ‘가지 자수’가 들어 있다. 포도 역시 주렁주렁 달린 탐스러운 열매로 인해 예로부터 ‘다산과 풍요’를 상징하는 의미로 문인화 범주에 포함되면서 귀한 대접을 받아 왔다.
500년 전의 하늘이 오늘의 하늘이 아니고 그때의 바람이 지금의 바람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는 당신을 기억하고 또 이야기합니다. 물리적인 역사의 시간, 그 시간의 간극을 모르는 바 아니나 오죽헌이라는 공간에서 우리가 공유할 어떤 것이 분명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존재 이유를 넉넉히 지녔지만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는 사소한 것들과 공감하고 그것을 어여쁘게 볼 나이가 되고 보니 작은 것에 대한 관심이 다시 살아납니다. 그래서인지 이곳 오죽헌에서는 당신의 손길 하나, 말간 웃음 한 자락, 그리고 아이를 어르는 듯한 따뜻한 미소 등 여러 가지의 모습을 그려 볼 수 있으며 본 책은 우리 후손들이 대대로 자랑삼아 간직하여야 될 기본 요소라 여겨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