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 호모 사케르 - 주권 권력과 벌거벗은 생명
조르조 아감벤 지음, 박진우 옮김 / 새물결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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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 사케르

호모 사케르가 ‘벌거벗은 생명‘ 또는 ‘신성한 생명‘ 이라는 함축된 단어로 어색하게 다가올 때, 나에게 그것은 단지 공동체로 부터 배제된 인간으로 밖에 설명되지 않았다.
그리고 사회에서나, 나 자신에게나 그곳이 어디든 늘 중심에 서있다 점점 구석으로 밀려나고 또 그렇게 추방된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이제 경계선에서 갈등하며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바등거리는, 위기에 처한 모습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책이 주는 많은 의미를 제치고 읽는 내내 마음에 자리잡았다.

1 주권의 논리

1)주권의 역설
주권의 역설은 이렇게 표현된다. ˝주권자는 법질서의 외부와 내부에 동시에 존재한다.˝ 여기서 ‘동시에‘라는 표현의 역설의 구조는 예외의 구조로 표현한다. 이 때 예외란 일종의 배제이다. 무언가를 배제시킴으로써만 그것을 포함하는 이러한 극단적인 행태의 관계를 예외 관계라고 부른다. 그러한 의미에서 주권자의 예외는 근본적인 위치 확정으로서 외부와 내부, 정상적인 상황과 혼돈이, 법질서의 효력을 가능케 하는 복잡한 위상학적 관계 속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경계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리므로 주권적 예외란 법 적용의 정지라는 형태로 법이 적용되기 위한 전제 조건을 이룬다.
그래서 어떤 사실은 배제를 통해 법질서 속에 포함되어 있으며, 또한 위반이 합법적인 사례에 선행하면서 그것을 결정한다. 법질서가 원래는 단지 위반 사실에 대한 제재가 아니라 어떤 제재도 없이 동일한 행위가 반복되는 것, 즉 일종의 예외적 사례를 통해 성립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외가 주권의 구조라면 주권이란 법이 삶을 참조하며 또 삶을 보류함으로써 삶을 자기 내부에 포함시키는 본래적인 구조이다.
2)주권자의 노모스
주권자의 노모스란 법과 폭력의 결합을 통해 그것들이 서로 구별되지 않을 위험을 야기하는 원리이다.
주권자인 한 노모스는 필연적으로 자연 상태와 예외 상태 모두와 결부되어 있다. 자연 상태와 예외 상태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나 라이덴 병처럼 외부에 있다고 전제된 것(자연 상태)이 이제는 (예외 상태로서) 내부에 재등장하게 되는 단일한 위상학적 과정의 양면일 따름이며, 주권 권력이란 바로 이처럼 외부와 내부, 자연과 예외, 퓌시스와 노모스의 구분 불가능성 그 자체를 말한다.
3)잠재성과 법
제헌적 권력, 또한 그것이 제정된 권력과 맺고 있는 관계에서 제정된 권력은 단지 국가 내부에 존재할 뿐이다. 즉 사전에 구축된 법질서와 분리될 수 없으며, 또한 국가라는 틀을 요구하는 한편 이러한 국가의 현실을 외부로 드러내는 것이다. 반대로 제헌적 권력은 국가의 외부에 위치한다. 때문에 이 두가지 권력 간의 관계를 조화롭게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한데, 오늘날에는 제헌적 권력을 헌법 속에 예견되어 있는 헌법 개정 권력으로 축소시키고 따라서 헌법을 탄생시킨 권력을 법 이전의 것 혹은 순수하게 사실적인 것으로 간주해버리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다.
슈미츠는 제헌적 권력을 ˝고유한 정치적 실존 양상과 형식에 대한 구체적인 결정 전체에 부합하는˝ 일종의 ‘정치적 의지‘ 로 간주했다. 즉 제헌적 권력이란 선택 행위이자 어떤 지평을 여는 정밀한 규정이며, 또한 여태껏 존재하지 않으며 그것이 존재하려면 창조 과정에서 그것의 특성을 하나도 상실하지 않아야 하는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철저한 법률적 규정이다. 제헌적 권력을 근본적인 의미로 사유되는 경우 존재론의 범주로 나타난다. 그리하여 제헌적 권력의 문제는 ‘잠재성‘ 이라는 문제로 바뀌며, 제헌적 권력과 제정된 권력 간의 미해결된 변증법은 잠재성과 실현 간의 관계라는 새로운 접합을 향한 길을 열어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유에서 잠재성은 한편으로는 현실성에 우선하면서 그것을 조건짓지만, 다른 한편으로 본질적으로는 현실성에 종속된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모든 잠재성은 잠재성 자체의, 잠재성 자체에 대한 비잠재성이다˝ 라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보자면 순수한 잠재성과 순수한 현실성은 구분되지 않으며, 이러한 비식별역이 바로 주권자이다
4)법의 형식
카프카는 [법 앞에서]라는 우화에서 주권적 추방령의 구조에 대한모범적인 윤곽을 제시한 바 있다.
아무것도 --- 분명 문지기는 금지하지 않는다 --- 시골 사람이 법의 문으로 들어서는 것을 가로막지 않으며, 반대로 문은 항상 열려 있으며 또 법은 아무것도 명하지 않는다. 이 우화는 법의 순수한 형태를, 즉 더이상 어떤 것도 명하지 않는 바로 그 지점에서 가장 강력한 모습을 드러내는 법의 형태 --- 즉 순수한 추방령 --- 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법의 구조는 카프카의 [소송]에 기술되어 있는 법에 대한 관계를 ‘계시의 무‘ 라고 정의하면서 주권적 추방령의 구조를 효력은 가지지만 의미는 없는 법의 구조라고 했다.
칸트는 ‘의미 없는 효력‘ 으로서의 법의 순수한 형식을 ‘그런데 만약 우리가 법으로부터 모든 내용, 즉 (법의 규정 근거로서의) 의지의 대상을 사상시킨다면 남는 것은 단지 보편적인 입법의 가장 단순한 형식뿐일 것이다‘ 라고 말한다.
이러한 법의 형식 앞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즉 법의 형식에 대응하는 삶의 형식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의미없지만 유효한 법에 복종하는 삶이란 가장 무고한 몸짓 또는 최소한의 망각조차도 극히 끔찍한 결과를 유발할 수 있는 예외 상태의 삶과 다를 바 없다.
법과 삶의 구별 불가능한 속에서 예외 상태의 본질적 특성은, 예외 상태에 관한 두가지 서로 다른 해석이 충돌하게 된다. 하나는 그러한 삶 속에서 의미 없지만 유효한 상태의 법, 즉 내용을 추월해 법의 순수한 형식이 유지되고 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규칙이 된 예외 상태는 법의 해소를, 또한 법이 자신이 다스려야만 하는 삶과 구분되지 않게 되었음을 표시한다는 해석이다.
의미 없지만 유효하다는 경험은 현대 사상의 무시 못 할 어떤 흐름의 기저에 깔려 있다. 우리 시대에 해체가 가진 특권적인 명성은 다름 아니라 전통적인 텍스트 전체를 의미 없지만 유효한 것으로, 유효하지만 그것이 가진 힘은 본질적으로 그것의 《진위의》 결정 불가능성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데서, 그리고 그러한 효력 자체는 마치 카프카의 우화에 등장하는 법의 문처럼 절대적으로 넘어갈 수 없는 것으로 파악하는 데서 비롯된다.
장 - 뤽 낭시는 의미 없지만 유효한 상태 속에 함축되어 있는 ‘법‘ 에 대한 존재론적 구조를 내버려짐으로 규정하면서, 내버려짐이란 주권자의 추방령에 넘겨진 존재로서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어떤 길도 열려 있지 않은 것으로 제시된다.
우리 시대가 사유에 위임한 과제는 단지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의 극단적이며 침해 불가능한 형태를 파악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자신의 과제를 그것만으로 한정시킨 모든 사유는 우리가 앞서 주권의 역설(또는 주권자의 추방령)로 규정한 바 있는 존재론적 구조를 단지 반복할 따름이다. 주권이란 결국 ˝우리를 내버린 법 너머의 법˝, 즉 노모스의 자기 전제적 권력이다. 그리고 모든 법이념(또한 의미 없지만 유효한 법의 공허한 형식이라는 이념)을 초월해 내버려짐을 사유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주권의 역설에서 벗어나 모든 추방령에서 자유로운 정치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경계 영역
예외 상태에서 행사하는 폭력은 단순히 법을 보존하거나 제정하는 것이 아니라, 법을 정지시킴으로써 법을 보존하고 자신을 법의 예외로 만듦으로써 법을 제정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벤야민의 신의 폭력에 대한 정의는 그것을 예외 상태와 결부시킬 때 한결 더 쉽게 내려진다.
벤야민이 신의 폭력을 정의하는 대신 일견 갑작스럽게 폭력과 법 사이의 연결 고리의 담지자, 즉 그가 ‘벌거벗은 생명‘이라 부른 것으로 논의의 초점을 바꾼 것은 그러한 형상에 대한 분석을 통해 벌거벗은 생명과 법적 폭력 사이의 본질적인 연결 고리를 확립하기 위함이다.

2 호모 사케르

1)호모 사케르
호모 사케르의 두가지 특성 - 살해한 자의 사면과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의 금지 - 을 한꺼번에 설명해내지 못하고 있다.
2)신성함의 양가성
18세기에서 20세기 초로 이어지는 많은 인문 과학 연구들은, 민족학적 개념들이 성서를 중심으로 한 종교 연구 속으로 깊숙히 침투하면서 이 미묘한 영역으로 길을 잃게 만든다.
‘신성함의 양가성 이론‘ 이라고 잠정적으로 부를 수 있을 이 신화소의 핵심은 ‘신성하고 저주받은‘이라는 의미의 라틴어 용어 ‘사케르‘ 에 있다.
3)신성한 생명
주권의 영역은 살인죄를 저지르지 않고도 또 희생 제의를 성대히 치르지 않고도 살해가 가능한 영역이며, 신성한 생명 즉 살해할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 없는 생명이란 바로 이러한 영역 속에 포섭되어 있는 생명을 말한다.
주권적 추방령에 포획되어 있는 것은 살해당할 수 있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인간의 생명, 즉 호모 사케르이다.
오늘날 생명의 신성함은 주권 권력과 대립되는 절대적인 기본 인권으로 주장되고 있지만, 원래는 그것은 생명을 죽음의 권력에 종속시키고 내버려짐의 관계 속에 결정적으로 노출시킨다는 정반대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주권자와 호모 사케르는 법질서의 양극단에 위치한 두 가지 대칭적인 형상들로서, 동일한 구조를 갖고 있으며 서로 결합되어 있다. 즉 주권자와 호모 사케르는 자신을 인간의 법과 신의 법, 그리고 노모스와 퓌지스 모두로부터 예외화하지만, 그럼에도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의 영역과 세속의 영역, 자연의 질서와 법질서 모두와 구분되는 최초의 본래적인 의미의 정치적 공간을 구획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4)생사 여탈권
생사여탈권, 이는 주권 권력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가지는 무조건적인 권한을 말한다.
생사여탈권은 모든 자유민 남성 시민들이 태어날 때부터 갖게 되는 것으로서, 일반적인 정치권력의 모델 자체를 규정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단순한 자연 생명이 아니라 죽음에 노출된 생명(벌거벗은 생명 또는 신성한 생명)이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인 것이다.
주권 권력, 로마 시대에 정무관의 지배권이란 모든 시민들에게로 확장된 아버지의 생사여탈권에 불과하다.
생사여탈권과 관련해 로마법의 죽음이란 말 말고 찾아내지 못한 이 유래 없는 연결 관계는 바로 벌거벗은 생명의 법적ᆞ정치적 질서 속으로의 포섭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생명이란 정치적 비오스도 자연적 조에스도 아니며, 조에와 비오스가 서로를 포함하고 배제하면서 서로를 끌어들이고 있는 비식별역이다.
국가는 사회적 결합이 아니라, 그러한 결합을 가로막는 ‘절연‘ 에 기반해 있다. 이제 우리는 이 테제에 또 다른 의미를 하나 추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절연을 기존의 결합을 해소하는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이 결합 자체가 원래 일종의 해소 또는 예외의 형태를 갖고 있다. 그리고 주권의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해소가 의미하고 산출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본래적인 요소인 것이다.
5)주권자의 신체와 신성한 신체
칸토르비츠가 《왕의 두신체》 에서 발전시킨 ‘신비로운 신체‘ 혹은 ‘정치적 신체‘ 는 호모사케르 데보투스와 동일시하고 있다. 정치적 기능으로 결부시켜 보면, 마치 절대 권력 --- 그것은 항상 ‘생사여탈권‘ 이고, 또 살해할 수는 있지만 희생물로 삼을 수 없는 생명에 항상 기반한다 --- 은 어떤 독특한 대칭성을 통해 주권 권력으로 하여금 자신의 인격 속에 그러한 권력에 포획당한 생명을 내포하고 있다고 가정할것을 요구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살아남는 데보투스의 경우 죽지 못한 것이 이러한 신성한 생명을 해방시켜주는 것인 반면. 주권자의 경우 죽음은 절대 권력 속에 그자체로 내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이는 초과를 드러낸다. 마치 절대 권력이란 궁극적으로는 자신과 타인들을 살해할 수는 있지만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으로 구성해내는 능력일 따름인 것처럼 말이다.
6)추방령과 늑대
늑대 인간은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 자의 모습이다.
추방된 자의 삶은 짐승과 인간, 피지스와 노모스,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이자 이행의 경계선이다. 역설적이게도 이 두 세계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그 두 세계 모두에 거주하는 늑대 인간의 인간도 아니고 짐승도 아닌 삶이다.
자연 상태라는 홉스의 신화소의 의미는 국가의 법률과는 무관한, 법 이전의 상태가 아니다. 그러한 법을 구축하고 그러한 법 속에 정주하는 예외이자 경계선이다. 이 경계선은 단순한 야생의 삶이나 사회적 삶이 아니라 벌거벗은 생명 혹은 신성한 생명으로서, 그것만이 주권의 항상 현전하면서 작동하는 유일한 전제이다. 오로지 벌거벗은 생명만이 진정으로 정치적이다.
자연 상태란 사실 일종의 예외 상태로서, 그러한 상태 속에서 국가는 순식간에 ˝분해인 상태인 것처럼˝ 나타난다. 그러니까 국가의 창건은 태곳적에 단번에 모두 이루어진 사건이 아니고, 주권적 결정이라는 형태로 부르조아 국가 속에서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게다가 주권적 결정은 시민들의 생명에 즉각적으로 의존하며, 그리하여 시민들의 생명이 정치의 근원적인 요소, 원현상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생명은 단순히 자연적인 재생산의 삶 즉 그리스인들의 조에도, 가치 있는 삶의 형태를 뜻하는 비오스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호모 사케르와 바르구스의 벌거벗은 생명이며, 또한 인간과 짐승, 자연과 문명 사이의 비식별역이자 지속적인 이행의 영역이다. 이것이 추방령이라는 테제가 갖는 근원적인 법적ᆞ정치적 관계의 실질적인 설명이다.
국가에서 신성한 생명을 추방하는 것은 어떤 내재성보다도 더 내재적이며. 또 어떤 외재성보다도 더 외재적이다. 또한 신성한 생명의 추방이란 모든 규칙에 조건을 부여하는 주권자의 ‘노모스‘ 이며, 모든 영토화와 영토 구획을 가능케 하고 이를 지배하는 공간화이다.
7)경계 영역
바티이유는 생명 자체를 정치적인 특성으로 이해하면서 주체의 내면성으로 편입시키려 했다.
바타이유는 절대적으로 살해 가능하지만 절대적으로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으며 또한 예외의 논리 속에 편입되는 신성한 인간의 정치적 신체를 그와는 반대로 위반의 논리를 통해 규정되는 희생 제의적인 신체의 위엄과 즉각 혼동해버린다.
그는 적어도 희생 제의와 에로티즘이라는 개념적 장치로는 파악할 수 없는 호모 사케르의 벌거벗은 생명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3 근대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으로서의 수용소

1)생명의 정치화
미셸 푸코는 ‘생명 정치‘ 라고 명명한 것 즉 인간의 자연 생명이 권력의 메카니즘과 계산 속으로 점점 더 포섭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탐구를 했다.
아렌트는 전체주의적 지배와 수용소라는, 생명이 처한 특수한 조건 사이의 결속 관계를 명료하게 인식했다. 그렇지만 벌거벗은 생명의 공간(즉 수용소)으로 근본적으로 변형시키는 것이 바로 전체주의적 지배를 정당화시키고 또 필연화시킨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이 두 사람의 관점을 ‘벌거벗은 생명‘ 혹은 ‘신성한 생명‘ 이라는 개념을 통해 결합시켜 본다.
전체주의 국가의 근본적인 특징을 ‘생명의 정치화‘ 라고 정의한다.
대중 민주주의와 전체주의의 변모는 정치가 이미 오래전에 생명정치로 바뀌어 이제 정치의 유일한 진정한 문제는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보살핌, 통제, 향유를 보장하는 데 가장 효율적인 정치 조직의 형태가 무엇인지를 결정하는 것일 뿐이라는 맥락에서 이러한 변형이 이루어진 것이었다.
근대 민주주의는 성스러운 생명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산산조각 내어 모든 개인들의 신체 속으로 산포시키고, 그것을 정치적 갈등의 쟁점으로 만들었다.
법이 효력을 발휘하려면 신체가 필요하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이런 의미에서 ˝신체를 소유하려는 법의 욕망˝ 에 대해 말할 수 있다면, 민주주의는 법에게 이렇듯 신체에 대한 보살핌의 형식을 취하도록 강요함으로써 그 욕망에 부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신체는 양가적인 존재로서, 주권 권력에 대한 예속의 대상이자 개인적 자유의 담지자이다
2)인권과 생명정치
국민 국가라는 체계 속에서 이른바 신성불가침의 인권이라는 것은 특정 국가의 시민들에게 귀속된 권리로서의 형태를 취하지 못하는 즉시 전혀 보호받지 못하며 또 아무런 현실성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조에로서 정치적 삶(비오스)과는 명백하게 구분되었던 바로 저 벌거벗은 생명이 이제 국가 구조 속으로 완전히 진입하게 되었으며, 더 나아가 심지어 국가의 정당성과 주권의 세속적 토대가 되었다.
따라서 인권 선언은 신권에서 기원한 왕권에서 국민 주권으로서의 이행이 완수되는 장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근대 국가의 토대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자유롭고 자각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고, 무엇보다 먼저 인간의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점 그리고 신민에서 주체로 이행하는 가운데 그 자체로서 주권의 원칙을 부여받은 단순한 출생 그 자체라는 점을 이해하면 인권은 단지 인간이 즉각 다시 사라져버리는 시민의 토대인 한에서만 인간에게 부여된다.
근대 생명정치의 본질적인 특징 중의 하나는 내부에 들어와 있는 생명과 외부에 있는 생명을 명확히 구분하고 분리시키는 경계선을 끊임없이 재정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난민들이 근대 국민 - 국가 질서의 불안정성을 대변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그들이 인간과 시민, 출생과 국적 간의 연속성을 깨뜨림으로써 근대 주권의 근원적인 허구성을 문제 삼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국민 국가는 자연 생명에서 소위 진정한 생명과 일체의 정치적 가치를 결여한 생명을 구분해냄으로써, 그러한 자연 생명과 대대적으로 결합되었다.
궁극적으로 볼 때 오늘날 점점 더 초국가적인 조직들과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는 인도주의 기구들은 단지 인간의 생명을 벌거벗은 또는 신성한 생명의 형상으로만 포착할 수 있으며, 따라서 맞서 싸워야 할 세력들과 본의 아니게 비밀스로운 유대를 맺는다. 정치와 분리된 인도주의는 주권의 토대를 이루는 성스러운 생명의 격리를 재생산하지 않을 수 없으며, 아울러 수용소 --- 예외의 순수한 공간 --- 는 인도주의가 결코 완전히 극복할 수 없는 생명정치의 패러다임이다.
난민이란 그 자체로 다름 아닌 출생 - 국민의 결합 관계에서 인간 - 시민의 결합 관계에 이르는 국민의 기초적인 범주들을 근본적으로 의문시하며, 또한 이를 통해 벌거벗은 생명이 국가 질서 내에서든 아니면 인권의 형태로든 더이상 격리되고 예외화되지 않는 새로운 정치를 위한 범주들의 재생을 위한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어떤 한계 개념으로 간주되어야만 한다.
3)살 가치가 없는 생명
칼 빈딩과 알프레드 호헤는 《살 가치가 없는 생명의 제거에 대한 승인》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이 책에서 빈딩은 살아 있는 인간이 자신의 실존에 대해 행사하는 주권의 표현이라는 식의 논지로, 예외 상태에 대한 주권적 결정과 마찬가지로 살아 있는 사람이 자신에게 행사하는 주권은 외부와 내부의 식별 불가능한 경계선, 즉 법질서가 배제시킬 수도 포함시킬 수도 없으며 또 금지할 수도 허용할 수도 없는 식별 불가능한 경계선을 형성시킨다.
슈미트는 ˝가치를 결정하는 자는 항상 그 자체로 무가치를 결정한다. 무가치하다고 결정을 내리는 것은 곧 무가치한 것의 제거를 의미한다˝라고 말한다.
살아 있는 인간이 자신의 생명에 대해 가지는 주권은 즉각 어떤 경계선의 설정, 즉 그것 너머에서는 생명이 어떤 법적 가치도 갖지 못하며 따라서 그러한 생명을 죽여도 살인죄로 처벌받지 않는 어떤 경계선의 설정을 동반한다는 사실이다.
모든 사회는 이런 한계를 설정하며, 모든 사회는 --- 가장 현대적인 사회일지라도 --- 자신의 ‘신성한 인간들‘ 이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국가의 법질서하에서의 자연 생명의 기초를 이루어지는데, 그러한 한계는 서양 역사에서 항상 계속 확대되어왔을 뿐이며, 이제는 --- 국민 주권 국가들의 새로운 생명정치적인 지평하에서 --- 모든 인간 생명과 모든 시민들의 내부로 이동해 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벌거벗은 생명은 더이상 특정한 장소나 특수한 범주에맛 제한되지 않으며, 모든 살아 있는 존재의 생물학적 신체 속에 깃들어 있다.
히틀러가 ‘안락사 프로그램‘ 을 실행했던 것은 이 프로그램이 인도적인 문제의 해결이라는 허울 아래 국가사회주의 국가의 새로운 생명정치적 소명이라는 지평 속에서 벌거벗은 생명에 대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주권 권력의 행사의 일환이었다는 설명이 그것이다.
4)정치란 달리 말해서 인민의 생명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는 것이다.
생물학적 소여가 이렇듯 그 자체로서 즉각적으로 정치적이며, 또한 정치적인 것은 이렇듯 그 자체로 즉각적으로 생물학적 소여라는 사실이 바로 근대 생명정치의 새로움이다. 페르슈어에 따르면 ˝정치란 달리 말해서 ( - - - - ) 인민의 생명에 일정한 형식을 부여하는것˝ 이다. 생명은 인권 선언을 통해 주권의 기초가 되었지만, 이제는 국가 정치의 주체이자 대상이 되었다.
20세기의 전체주의는 생명과 정치의 이러한 역동적인 동일성에 기초하고 있으며, 만약 그러한 동일성이 없다면 전체주의는 여전히 이해 불가능할 것이다.
정치와 생명 사이의 이처럼 즉각적인 결합이 하이데거와 나치즘의 관계라는 20세기 철학의 스캔들을 해명해준다. 이 관계의 진정한 의미는 오로지 근대 생명정치라는 관점에서 파악될 때에만 비로서 드러나는 것이다.
하이데거에게 있어 존재론이란 애초부터 사실적인 삶에 대한 해석학으로 등장한 것이었다. 현존재가 존재 양태를 통해 자신의 존재 자체를 문제 삼는 이러한 현존재의 순환 구조는 사실적인 삶의 본래적 경험의 정식화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인간의 사실적인 존재란 이미 일단 그것을 파악하면 인간을 현존재로, 따라서 또한 정치적 존재로 구성해내는 운동을 포함하고 있다.
5)VP(인간 모르모트)
VP(인간 모르모트)에 대한 생화학적 실험이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뿐만 아니라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사하게 실시될 수 있는가는, 가능한 유일한 대답이 두 경우 모두 VP들의 특수한 지위가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이들은 사형수이거나 수용소의 수감자로서,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곧 정치 공동체로부터의 최종적인 배제를 의미했다).
6)죽음을 정치화하기
삶과 죽음은 고유한 과학적 개념이 아니라 정치적 개념, 즉 그 자체로서는 오로지 결정을 통해서만 정확한 의미를 얻게 되는 정치적 개념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7)수용소, 근대성의 노모스
수용소는 예외 상태 --- 주권 권력은 그것에 대한 결정 가능성 바로 그것에 기반한다 --- 가 규범적으로 실현되는 구조이다.
만약 수용소의 본질이 예외 상태의 물질화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로서 벌거벗은 생명과 규범이 [식별 불가능한 경계 속으로] 진입하는 공간의 창출에 있다면, 우리가 잠재적으로 수용소의 현존과 마주하고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수용소는 생명을 정치 질서 속에 기입해 넣는 새로운 숨겨진 관리자 --- 또는 체제가 살인 기계로 전환되지 않고는 기능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기호 --- 로서 등장한다.
이제 국가 공동체 내부에 확고하게 자리 잡은 수용소는 전 세계의 새로운 생명정치적 노모스이다.
8)경계 영역
1.근원적인 정치적 관계는 추방령(외부와 내부, 배제와 포함 사이의 비식별역으로서의 예외 상태)이다.
2. 주권 권력의 근본적인 행위는 벌거벗은 생명을 근원적인 정치적 요소이자 자연과 문화, 조에와 비오스 사이의 결합의 비식별역으로 산출하는 것이다.
3.오늘날 서양의 생명정치적 패러다임은 국가 공동체가 아니라 수용소이다.
오늘날 자신을 생명으로 전면적으로 변형시키려고 하는 법과 사멸하다시피 되어 규칙에 굴복한 생명이 마주치는 일이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서양의 정치적 공간을 재사유하려는 모든 시도는 다음과 같은 사실, 즉 조에와 비오스, 사생활과 정치적 실존, 단순히 살아 있는 생명체로서 가정을 고유한 공간으로 삼는 인간과 정치적 주체로서 국가를 고유한 공간으로 삼는 인간 사이의 고전적인 구분은 더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명료한 인식을 출발점으로 삼아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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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미국민중사 2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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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중사 2

아래로부터의 역사, 민중사.

˝가난한 이들의 외침이 항상 정의롭지는 않지만,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정의가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

누구든 여러 사람이 보는 다양한 시선를 배우게 된다. 우리는 선택을 하고 그리고 자기 삶의 방향을 결정한다.
여기서는 아래로부터의 시선을 느껴본다.
민중의 역사 속에서...

어렵지 않은 내용이고 재미 있기도 한데, 몰입이 잘되지 않은 편이다.
집중력이 떨어진건지, 글이 매끄럽지 않은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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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민중사 1
하워드 진 지음, 유강은 옮김 / 이후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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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민중사 1

이루어진 후에는 많은 것들이 가려지지만 ‘참혹한 민중ᆞ불평등한 인종‘ 의 희생 역시 피할 수 없음을 슬퍼한다.
또한 과거처럼 계속하여 지배층은 그 이익을 기꺼이 나누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상주의적 희망, 아니 주어진 권리를 찾기 위한 노력이 없다면 아무 것도 얻지 못 할 것이라는 냉엄한 현실을 이 책에서 확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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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 대한민국이 선택한 역사 이야기
설민석 지음, 최준석 그림 / 세계사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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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민석의 조선왕조실록

학창 시절에, 국사라는 과목으로 암기했던 역사적인 내용을, 씌여진 배경을, 이 책을 읽으며 심정적으로 이해하는 재미있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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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철학 들뢰즈의 창 2
질 들뢰즈 지음, 박기순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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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피노자의 철학

전체적으로 스피노자의 철학을 이해하기 위한 글이라면, [윤리학]의 주요 개념 색인은 개념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의했다기 보다 복잡하게 나누어진 그의 철학의 본질을 파헤쳐서 전반적으로 모듈화시킨 정리였다는 생각을 한다.

제1장 스피노자의 삶
스피노자가 살았던 정치 사회적 상황은, 스피노자가 그의 책 [신학 정치론]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인민은 왜 그토록 비합리적인가? 인민은 왜 자신의 예속을 영예로 여기는가? 왜 인간은, 예속이 자신들의 자유가 되기라도 하듯 그것을 <위해> 투쟁하는가? 자유를 얻는 것뿐만 아니라 그것을 지켜내는 일은 왜 그토록 어려운가? 왜 종교는 사랑과 기쁨을 내세우면서 전쟁, 편협, 악의, 증오, 슬픔, 양심의 가책 등을 불러일으키는가?
스피노자가 발견하는 세계는 야만의 극치이다. 삶을 모욕하고 파괴하는 방식, 모든 부정적인 것은 그가 보기에는 두 원천을 갖고 있디. 하나는 외부로 하나는 내부로 향해 있는데, 원한과 양심의 가책, 증오와 죄의식이 그것들이다. <증오와 양심의 가책은 인류의 근본적인 두 적들이다.> 스피노자는, 이 원천들이 인간의 의식에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끊임없이 고발하고, 그것들은 오직 새로운 의식과 함께, 새로운 전망과 새로운 삶의 욕구 속에서만 고갈될 수 있을 뿐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스피노자는 자신이 영원하다는 것을 느끼고 경험한다.
스피노자에게 삶은 하나의 존재 방식이고 모든 속성들 속에 동일하게 존재하는 하나의 영원한 양태이다.
제2장 윤리학과 도덕의 차이에 관하여
1 의식에 대한 평가절하(사유에 대한 옹호): 유물론자 스피노자
스피노자의 이론적 논제중 하나인 평행론의 요체는 정신과 신체 사이의 실질적인 인과성의 관계를 부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둘 사이에 어떤 우월성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 있다. 평행론의 실천적 의미는, 의식에 의한 정념들의 지배 기획으로서의 도덕이 기초하고 있는 전통적인 원리의 전복 속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식의 본성은, 결과들을 받아들이되 그 원인들을 알지 못한다는 데 있다. 원인들의 질서는 다음과 같이 정의된다. 연장 속의 각 신체, 사유 속의 각 관념과 각 정신은, 이 신체의 부분들, 이 관념의 부분들을 포섭하는 독특한 관계들에 의해 구성된다. 한 신체가 다른 신체를 <만날> 때, 한 관념이 다른 관념을 만날 때, 이 두 관계는 결합되어 보다 큰 능력을 갖는 하나의 전체를 이루든가, 아니면 하나가 다른 하나를 해체하여 그 부분들의 결합을 파괴하게 되든가 하는 일이 일어난다. 신체와 정신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것이여야 말로 놀라운 것이다. 살아 있는 부분들의 전체는 복잡한 법칙들에 따라 결합하거나 해체된다. 따라서 원인들의 질서는 끊임없이 자연 전체를 변용시키는, 관계들의 결합과 해체의 질서들이다.
우리가 사물들을 인식하는 조건들과 우리 자신에 대해서 의식을 갖는 조건들 때문에 우리는 부적합한 관념들, 혼란스럽고 절단된 관념들, 즉 자신들의 고유한 관계들로부터 분리된 결과들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원인과 본성에 대해서 무지하여 사건 의식을 가질 수밖에 없고, 따라서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법칙들의 결과들을 겪어야 하는 그들은, 모든 것의 노예이며, 자신들의 불완전성의 정도에 따라 불안 속에 있는 불행한 자들이다.
의식 자체도 원인을 가져야 한다. 스피노자는 욕망을 <자신에 대한 의식을 가지고 있는 욕구>로 정의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욕구는 각 사물이, 즉 연장에 속하는 각각의 신체와 사유에 속하는 각각의 영혼, 각각의 관념이 자신의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무르려는 노력(코나투스)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이 노력은 우리가 만나는 대상들에 따라 다른 방식으로 작용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매 순간 대상들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변용들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바로 결정인자로서의 이 변용들이 필연적으로 코나투스에 대한 의식의 원인이 된다.
2 모든 가치들, 특히 선악에 대한 가치절하(<좋음>과 <나쁨>에 대한 옹호): 비도덕론자 스피노자
자연 전체의 영원한 법칙들에 따라, 고유한 질서 속에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디. 선과 악은 없으며, 좋음과 나쁨이 있다.
좋음과 나쁨은 그 첫번째 의미, 즉 객관적이지만 관계적이고 부분적인 의미를 갖는다. 또한 두번째 의미, 즉 인간 존재의 두 유형, 두 양태를 특징짓는 주관적이고 양태적인 의미를 갖는다.
그러므로 윤리학, 즉 내재적 존재 양태들의 위상학은 언제나 존재를 초월적 가치들에 관계시키는 도덕을 대체한다. 가치들(선-악)에 대립하여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좋음과 나쁨)가 들어선다. 그러나 법칙은, 우리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때, 우리에게 <해야만 한다>라는 도덕적 형식으로 나타난다.
법칙은 언제나 선악이라는 가치의 대립을 결정하는 초월적 심급이지만, 인식은 언제나 좋음-나쁨이라는 존재 양태들의 질적 차이를 결정하는 내재적 능력이다.
3 모든 슬픈 정념들에 대한 가치절하(기쁨에 대한 옹호): 무신론자 스피노자
슬픈 정념은 욕망들의 무한성, 영혼의 동요, 탐욕, 미신 등을 통합시켜 놓은 복합체이다.
슬픈 정념들에 대한 비판은 변용 이론에 그 뿌리를 깊게 박고 있다. 한 개인, 그것은 무엇보다도 단일한 본질, 즉 일정 정도의 능력이다. 이 본질에 고유한 관계가 상응한다. 이 능력의 정도에 특정 정도의 변용 능력이 상응한다. 인간의 행동학이라는 관점에서 두 가지 종류의 변용이 구분되어야 한다. 개인의 본성에 의한, 본질로부터 유래하는 능동과 다른 것에 의해 설명되고 외부로부터 유래하는 수동이 그것이다. 따라서 변용 능력은, 능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는 것으로 고려되는 한, 행위 능력으로 나타나고, 수동적인 변용들에 의해 실행되는 한, 수동 능력으로 나타난다.
우리를 변용시키는 정념은 기쁨에 속하며, 우리의 행위 능력은 증가되고 도움을 받는다.
[윤리학]은 필연적으로 기쁨의 윤리학이 될 수밖에 없다. 오직 기쁨만이 가치가 있으며, 오직 기쁨만이 능동과 능동의 지복에 가까이 있고 또 우리를 가까이 가게 만든다. [윤리학]이 제기하는 3중의 실천적 문제는 다음과 같다. 어떻게 즐거운 정념의 극한에 도달해서, 그로부터 자유롭고 능동적인 감정으로 이행할 것인가? 능동적인 감정들을 가능케하는 적합한 관념들을 형성하는 데까지 어떻게 이를 것인가? 어떻게 자기 자신, 신, 그리고 사물들을 어떤 영원한 필연성에 따라 의식할 것인가?
윤리적인 기쁨은 사변적 긍정의 상응 개념이다.
제3장 악에 관한 편지들(블레이은베르흐와의 서신)
스피노자는 인간 어떤 아무 것도 아니라는 고전적인 논제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한다. 그것은, 온갖 방식을 통해서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이 언제나 존재한다는 것이다. 자연의 질서에 따라 서로 결합하는 관계들은, 해체될 수 있는, 즉 실행이 중지될 수 있는그러한 관계의 보존과 필연적으로 조응하는 것은 아니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그 자체로서의) 악은 존재하지 않으며, (나에게) 나쁜 것이 존재한다.
나의 관계와 결합되는 관계를 갖는 대상에서 신체의 행위는 나의 신체의 능력, 즉 나의 신체가 어떤 관계 아래서 할 수 있는 것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행위는, 그것에 의해 관계가 해체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아니면 그것에 의해 자신의 고유한 관계와 결합되는 사물의 이미지에 연결되는가?
어떤 관념이 적합할 때, 그 관념은 언제나 적어도 두 신체를, 즉 나의 신체와 다른 신체를, 그것들이 자신들의 관계를 결합시키는 양상 아래서 파악한다(<공통 관념>). 반대로 나의 신체에 적합하지 않는 신체에 대한 적합한 관념은, 그 신체가 적합하지 않는 한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악, 혹은 더 정확히 말해 나쁜 것은 부적합한 관념 속에서만,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나오는 슬픈 감정들(증오, 분노 등등) 속에서만 존재한다.
실제로 악은 자연 법칙에 따라 서로 결합되는 관계들의 관점에서 보면 어떤 무엇도 아니라고 가정하면, 이 관계들 속에서 표현되는 본질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말할 수 있는가?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악은 관계들의 질서에서와 마찬가지로 본질들의 질서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악은 결코 어떤 상태 혹은 어떤 본질 속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상태들의 비교 속에 있기 때문이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단지 상태나 변용일 뿐이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한 상태가 다른 상태들과의 어떤 가능한 비교도 없이 실재성 혹은 완전성의 절대적 양을 표현하는 한에서, 어떤 상태일 뿐이다.
본질은, 우리의 단일한 본질은 순간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그런데, 본질의 영원성은, 지속 속에서의 존재 이후에 오는어떤 것이 아니라그것과 정확하게 동시적이며 공존하는 것이다. 그리고 존재는 지속 속에 있는 이 관계 아래서 우리에게 귀속되어 있는 외연적 부분들의 전체이다.
본성의 외연적 부분들에서만 <나쁨>이 존재한다. 나쁨은, 어떤 관계 아래서 우리의 본질에 속하는 외연적 부분들이 다른 관계들 속으로 들어가도록 외부로부터 결정될 때이다.
우리가 나쁜 것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엄밀히 말하면 필연적인 것이며, 다만 외부로부터 온 것일 뿐이다.
우리의 외연적 부분들과 외연적 변용들이, 우리의 관계들 중의 하나를 실행시키는 한, 우리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그 관계도 그 본질도 <구성하지> 않는다. 본질에 속한다는 것은 악과 나쁨을 배제하는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가 우리의 본질에 환원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내적인, 즉 면역적인 변용들은 우리가 우리 자신, 다른 사물들, 그리고 신을 나부로부터 영원하게 그리고 본질적으로 의식하게 되는 형식들(제3종의 인식, 직관)이다. 그런데, 우리가 존재하는 동안에 이 자기 - 변용에 이르면 이를수록, 존재를 잃으면서, 즉 죽으면서 혹은 심지어는 고통을 겪으면서도보다 적은 것들을 잃게 될 것이며, 악은 어떤 무엇도 아니며 나쁜 것은 그 어느 것도, 거의 어느 것도 본질에 속하지 않는다고 보다 잘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제4장 [윤리학]의 주요 색인 개념
절대적인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능력과 절대적인 사유
추상
핵심은 추상 개념과 공통 개념 사이의 본성의 차이이다. 공통 개념은 서로 적합한 신체들, 다시 말해 법칙들에 따라 자신들의 각 관계들을 결합하고 이 내적인 적합 혹은 결합에 상응하여 서로를 변용시키는 둘 혹은 여러 신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적인 어떤 것에 대한 관념이다. 추상 개념은 우리의 변용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 있기 때문에 우리가 이해하는 대신에 상상할 때 나타난다. 우리가 본질적인 특징으로 내세우는 외적인 기호나 가변적인 감각적 성격만을 간직한다.
허구적 추상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첫번째, 종차 혹은 유전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가변적인 감각적 성격에 의해 정의되는 강, 종, 속. 존재들의 변용 능력에 의해,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것들이 자신들의 삶, 각자가 만족해 하는 삶을 실행하고 충족시키는 방식에 의해 구별된다. 두번째는 수이다. 수는 추상 관념의 상관자이다. 수는 그 자체가, 존재 양태들에 적용되는 한, 즉 존재 양태들이 실체로부터 따라나오는 방식과 그것들이 서로 관계를 맺는 방식이 <추상되는 > 한, 추상물이다. 세번째는 초월적인 개념들이다. 존재들 사이의 외적인 차이를 확립하는 요소로서의 특유하거나 유전적인 성격들이 더 이상 문제가 아니라, 존재 혹은 존재와 동일한 외연을 갖는 개념들이 문제가 된다. 사람들은 그것들에 초월적인 가치를 부여하며, 무와의 대비를 통해 그것들을 확립한다(존재-비존재, 통일성-다양성, 진리-허위, 선-악, 질서-무질서, 미-추, 완전성-불완전성 ---)
결론적으로, 사유의 자율적인 능력에 의존해서 귀결되는 참된 관념과 우리의 이해 능력을 인식해서 신의 관념에 이르는 발판으로 사용한다면, 그것들은 추상 개념보다는 공통 개념에 가깝다.
변용, 감정
1)변용들은 양태들 자체이다. 양태들은 실체 혹은 그 속성들의 변용들이다.
2)변용들은 양태에서 발생되는 것, 즉 양태의 변형들, 어떤 양태에 다른 양태들이 미친 결과들을 지시한다. 따라서 이 변용들은 무엇보다도 신체적 이미지들 혹은 흔적들이다.
3)그러나 이 변용 - 이미지 혹은 관념은 변용되는 신체와 정신의 어떤 상태, 즉 이전 상태보다 더 큰 혹은 더 적은 완전성을 함축하는 상태를 형성한다. 이 상태, 변용, 이미지 혹은 관념은 지속과 결부될 수 없는데, 이 지속은 그것들을 이전의 상태에 결부시킬 뿐만 아니라 그것들을 다음 상태로 향하도록 만드는 지속이다. 이 지속 혹은 완전성의 지속적인 변이는 <감정>이라고 불린다.
변용은 변용되는 신체의 한 상태에 관련이 있고, 따라서 변용시키는 신체의 현존을 함축하고 있는 반면, 감정은 한 상태에서 다른 상태로의 이행, 그에 상응하는 변용시키는 신체의 변이에 대한 고려에 연관이 있다.
보다 큰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증가는 기쁨의 감정이라고 불린다. 보다 적은 완전성으로의 이행, 즉 행위 능력의 감소는 슬픔의 감정이다. 이와 같은 행위 능력은, 외적 원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변용 능력은 동일하게 유지한 채 상이하게 변한다.
우리의 감정이 다른 존재 양태들과의 외적인 만남으로부터 유래하는 한, 그것은 변용하는 신체의 본성에 의해서, 그리고 필연적으로 부적합할 수밖에 없는 이 신체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상태 속에 포함되어 있는 혼동된 이미지에 의해서 설명된다. 이러한 감정들이 정념이다.
감정은 언제나 변용에대한 관념인 어떤 관념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나 그 관념이 혼동된 이미지가 아니라 적합한 관념이라면, 그것이 변용시키는 신체의 본질을 간접적으로 우리의 상태에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직접적으로 표현한다면, 그 관념이 내적인 변용에 대한 관념, 즉 우리의 본질, 다른 본질들, 신의 본질의 적합성을 표시하는 자기 - 변용에 대한 관념이라면, 그렇다면 그 관념으로부터 나오는 감정들은 그 자체로 능동이 된다. 이 능동적인 기쁨들에 우리는 지복이라고 이름을 부여해야만 할 것이다.
속성
지성이 실체에 대해서 그것의 본질을 구성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것. 속성들은 지성의 인식 방식들이 아니다.
표현된 본질은 무제한적이고 무한한 질이다. 표현적 속성은 본질을 실체에 관계시키며, 지성이 파악하는 것은 바로 이 내재적 관계이다.
내재성은 무엇보다도 속성들의 일의성을 의미한다.
좋은 - 나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존재 양태들 사이의 만남들(<자연의 공통적 질서>,외적인 결정들 혹은 우연한 만남들)을 표현한다.
좋음과 나쁨을 선과 악으로 전환시킨다면, 그것은 선을 존재 이유와 행위 이유로 삼게 되는 것이며, 따라서 우린 모든 목적론적 환상들에 빠지게 되고, 신적인 생산의 필연성과 충만한 신의 능력에 참가하는 우리의 방식을 왜곡하게 된다. 그것들은 이성의 존재들 혹은 상상의 존재들로서, 사회적 기호들, 즉 보상과 처벌의 억압적 체제에 완전히 의존해 있는 것들이다.
원인
나는 자기 원인을, 그 본질이 존재를 포함하는 것, 달리 말해서 그것의 본성이 존재한다고밖에는 생각될 수 없는 것으로 이해한다(정의).
즉 원인은 작용적 인과성이든, 본래적이고 전체적인 인과성의 원형이든, 신이 자신의 본질을 구성하는 이 동일한 속성들 속에서 생산한다는 사실로부터 신이, 자기 원인이라는 말과 동일한 의미로,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라는 사실이 나온다.
인식(인식의 종류)
제1종의 인식은 다의적이고 부적합적인 기호들에 의해서 정의된다.
제2종의 인식은 공통 개념들을 통해 정의된다.
제3종의 인식의 형상은, 우리 자신, 신, 그리고 다른 사물들에 대한 적합한 관념들을 결집시키는 삼각형이다.
의식
이중화되고, 무한히 중복되는 관념의 성질
의식의 특징은 정신 속에서의 관념의 반성이고 의식은 자신이 대상이 되는 관념과 관련하여 항상 이차적이며, 의식이 자신의 대상인 관념과 맺는 관계는 그 관념이 자신의 인식 대상과 맺는 관계와 같다.
의식은 두가지의 근본적인 환상을 갖고 있다. 자유라는 심리학적 환상과 목적성이라는 신학적 환상이다.
의식은 수동적 감정들을 능동적 감정들을 통해서 이겨내는데, 후자는 공통 개념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며, 원인에 의해서만 따라서 이성의 구별에 의해서만 전자와 구별된다.
정의, 증명
지속
시작에서부터의 존재의 연속
지속은 영원성에 대립한다. 영원성은 시작이 없으며 불변적이고 온전한 행위 능력을 소유한 것에 대해서 말해지기 때문이다. 영원성은 무한정한 지속도, 지속 이후에 시작되는 어떤 것도 아니며, 본성이 다른 우리 자신의 두 부분들, 즉 신체의 존재를 포함하는 부분과 그것의 본질을 포함하는 부분이 공존하듯이, 영원성은 지속과 공존한다.
우월성
스피노자가 우월성 개념에 대해서 비난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학적인 혹은 신인 동형적인 성격들을 통해 신을 정의하면서 신의 특유성을 수호하겠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우월성, 그리고 그것과 함께 다의성과 유비는 공통적인 것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신과 창조물들의 공통적인 어떤 것을 볼 수 있다고 주장하고(본질의 혼동), 공통의 형식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것들을 부정하는 이중의 오류를 갖는다(초월적 형식들의 환상).
지성(무한 지성, 신의 관념)
지성과 의지를 신의 본질 속에 넣는 사람들은 신을 인간학적인 혹은 심지어는 신인 동형적인 술어들 아래서 신을 사유한다. 그렇게 자신들은 신의 본질을 혼동한다. 신의 관념은 실체와 속성들을 이해하며, 실체가 속성들 속에서 무한한 사물을 생산하듯이 무한한 관념들을 생산한다. 우리의 지성은 신의 지성의 필수 불가결한 일부분으로서 설명된다. 실제로 무한 지성이 양태라는 사실은, 무한 지성에 대한 우리 지성의 적합성을 설명해 준다.
정신과 신체(평행론)
관념은 그것의 표상적 능력에 의해서 정의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 대한 관념이 사유와 다른 관념들에 대해 맺는 관계는 우리 신체가 연장과 다른 신체들에 맺는 관계와 같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은 우리의 신체에 일어난 것에 대한 관념, 즉 우리 신체의 변용들에 대한 관념이다.
신체의 계열과 정신의 계열은 동일한 질서뿐만 아니라, 동등한 원리 아래서 동일한 연쇄를 나타낸다. 마지막으로, 존재의 동일성이 있다.
정신과 신체의 평행론은 인식론적 평해론과 존재론적 평행론이 있다. 첫번째 평행론에 따르면, 사유 속의 관념과 다른 속성 속에 있는 그 대상은 하나의 동일한 <개체>를 형성한다. 두번째 평행론에 따르면, 모든 속성들에 존재하는 양태들은 하나의 동일한 변형을 형성한다.
본질
모든 본질은 어떤 사물의 본질이며, 그 사물과 상호 교환된다.
속성들은 본질을 표현하면서 반드시 그 본질이 필연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존재 또한 표현한다. 본질이 절대적으로 무한한 존재 능력과 행위 능력인 반면, 속성들은 존재하고 행위할 수 있을 만큼의 힘들이다.
그렇다면 존재를 함축하고 있지 않고 본질들, 속성들 속에 내포 되어 있는 양태들의 본질들은 어디에 존재하는가? 양태들의 본질들은 단순하고 영원하다. 그러나 그 본질들은 속성과 더불어 서로간에 순전히 내적인 또 다른 유형의 구별을 갖는다. 본질들은 논리적 가능성들도 기하학적 구조들도 아니다. 그것들은 능력의 부분들, 즉 물리적 강도들이다.
영원성
존재가 본질에 의해 함축되어 있는 한에서, 존재는 영원하다.
지속은 양태의 존재가 본질에 의해서 함축되어 있지 않은 한에서, 영원성의 형식을 띤다.
영원성의 형식이라는 표현에서, 형식은 언제나 개념 혹은 인식에 근거한다. 어떤 신체의 본질 혹은 사물들의 진리를 영원성의 형식 아래서 표현하는 것은 언제나 관념이다.
정신이 신체의 단일한 본질을 영원성의 형식 아래서 사유하는 한, 또한 존재하는 사물들을 공통 개념들에 의해서, 즉 존재 속에서의 그것들의 결합과 해체를 결정하는 영원한 관계들 아래서 사유하는 한, 정신은 영원하다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존재
양태의 존재는, 속성 속에 함축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 즉 외적인 양태의 지위를 소유하고 있고, 또 지속하는 한, 그의 본질 자체이다.
양태의 본질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만, 스스로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필연적으로 그것의 원인(신)에 의해서 그리고 속성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으로서, 즉 양태의 내적인 지위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설명하다 - 함축하다(펼치다 - 감싸다)
설명하다는 사물에 외적인 지성의 작용이 아니라, 지성에 내적인 사물의 작용을 의미한다.
함축<감쌈>은 설명<펼침>의 대립하는 것이 아니다. 설명하는<펼치는> 것은 바로 그것을 통해서 함축하고<감싸고>, 전개하는 것은 포함된다.
관념
우리 안에 있는 참된 관념들, 이것은 신 안에 존재하며 무수한 다른 관념들로 변용하는 한에서, 신은 그것을 적합하게 소유하고 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관념들은 우리의 신체에 일어나는 것, 다른 신체가 우리 신체에 미친 결과, 즉 두 신체의 혼합물을 표상하는 관념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념들은 필연적으로 부적합하다.
개체
어떤 속성 안에 있는 존재 양태의 복잡한 조직.
스피노자에 따르면, 양태적 과정으로서의 개체화는 언제나 양적이다. 그러나 상이한 두 가지 개체화가 존재한다. 단순하고 불가분하며 영원한 내포적 부분으로서의 각이한 능력의 정도라는 단일성에 의해 정의되는 본질의 개체화가 그 하나이고, 양태의 본질을 표현하는 운동과 정지의 영원한 관계를 시간의 차원에서 실현시키는 외연적 부분들의 분리 가능한 전체에 의해서 정의되는 존대의 개체화가 다른 하나이다.
무한
1) 본성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 존재의 특성을 구성한다.
2) 자신의 원인에 의해서 한계를 갖지 않는 것. 속성들을 절대적으로 표현하는 직접적인 무한 양태가 이 경우에 해당된다.
양태가 존재하는 한, 무한히 많은 외연적 부분들은 그 양태의 본질에 상응하는 관계 아래서 그 양태에 귀속된다.
따라서 무한정은 추상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모든 무한은 현실적이다.
자유
스피노자의 원리는, 자유는 결코 의지의 특성이 아니며, <의지는 자유로운 원인으로 불릴 수 없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의지 작용들은 관념들 속에 포함되어 있는 양태들로서, 그것들은 관념자체에 수반하는 긍정 혹은 부정과 동일한 것이며, 이 작용들에는 어떤 우연적인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이 원인들을 인식하지 못하고 가능태나 우연적인 것들을 상상하며, 신체에 대한 영원의 의지적 작용을 믿는 한, 자유는 의식의 근본적인 환상이다.
자유는 언제나 본질에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유래하는 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지, 의지나 그 의지를 규제하는 어떤 것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방법
참된 관념을 갖는 방법은 형식적인 반성적 측면과 물질적인 표현적 측면 그리고 둘을 통합한 점진적 종합성이다. 즉 우리의 인식 능력에 의해서 형식적으로 설명됨과 동시에, 물질적으로 자신의 고유한 원인을 표현한다.
양태
양태들은 존재와 본질에서 실체와 다르지만, 실체의 본질을 구성하는 동일하게 같은 속성들 안에서 생산된다.
직접적 무한 양태
사유의 경우, 무한 지성, 그리고 연장의 경우, 정지와 운동
매개적 무한 양태는, 연장의 경우, 우주 전체의 모습, 즉 존재 양태들에 대한 결정을 지배하는 운동과 정지의 모든 관계들의 총체이다. 그리고 물론 사유의 경우 그것은 관념들을 존재 양태들의 관념들로 결정하는 관념의 관계들이다.
자연
능산적 자연과 소산적 자연은 상호 내재성의 연관들 속에서 파악된다.
자연주의는 일의성의 세 가지 형식을 충족시키게 된다. 속성들의 일의성:본질, 원인의 일의성:신, 양상의 일의성:필연성
필연적인
필연성은 존재하는 것의 유일한 양상이다.
가능성과 우연성의 범주들은 환상이다.
따라서 존재하는 것들은, 신의 의지의 작용에 의해 생산되지 않는다.
부정
스피노자의 부정 이론은 언제나 긍정적인 것인 구별과 부정적인 결정 사이의 차이에 의지하고 있다.
1) 속성들은 실제적으로 구별된다. 정확히 말하면 대립에 의하지 않는 그것들의 구별에 의해 실제적으로 구별되는 모든 속성들은, 그것들이 그 본질과 존재를 표현하는 하나의 동일한 실체를 통해 동시에 서로를 긍정한다.
2) 반면 유한자는 제한되고 결정된다. 제한되고 결정된 어떤 양태 아래서, 유한 존재 양태는 그 본질에 있어서 제한되고, 그 존재에 있어서 결정된다. 제한은 본질에 해당되고, 결정은 존재에 해당한다.
스피노자의 학설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어떤 것에 결핍되어 있는 것은 결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부정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공통 개념들
공통 개념들은 신체들에 공통적인 어떤 것을 그것들이 표상하기 때문에 추상적인 관념들이 아니며 일반적인 관념들이다. 그리고 외연에 따라, 즉 그것들이 모든 신체에 적용되는지 아니면 단지 일부의 신체들에만 적용되는지에 따라, 그것들은 보다 일반적이거나 덜 일반적이다.
공통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적합한 관념들이다. 실제로 그것들은 결합의 통일성을 표상하기 때문에, 부분과 전체에 모두 들어 있으며 따라서 적합하지 않게 사유될 수 없다. 그것들은 존재 양태들 혹은 개체들 사이에 존재하는 현실적 관계들의 결합을 표상한다. 공통 개념들은 수학적이라기보다는 생물학적이며, 자연 전체가 갖는 결합의 통일성과 이 통일성의 변이 양태들을 형성한다.
공통 개념들은 필연적으로 우리에게 신의 관념을 부여한다. 신의 관념은 그 자체로는 공통 개념이 아니며, 스피노자가 그것을 공통 개념들과 분명하게 구별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정확히 그것은, 신의 관념이 신의 본질을 포함하고는 있지만, 존재 양태들의 결합과 관련해서만 공통 개념으로 기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공통 개념들은 관계들 사이의 결합을 표상한다. 그런데 이 관계들은, 신체들이 서로 적합한한, 즉 그것들이 전체를 형성하고, 각각이 다른 신체 안에 <이미지들> -- 이에 상응하는 관념들은 상상들이다 -- 을 남기면서 서로를 변용시키는 한, 신체들을 특징짓는다.
고유한(고유성)
본질 자체의 양상이다.
스피노자는 신의 세 가지 고유성을 구별한다. 신의 본성의 양상들이라는 첫번째 의미에서 (자기원인, 무한성, 영원성, 필연성, 전지성, 편재성). 두번째 의미로, 신을 그의 생산물과 관련해서 (모든 사물들의 원인). 세번째 의미로, 외적인 결정들을 지시할 뿐이다 (정의, 자비).
능력
신은 의지가 이니고 가능태들을 사유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는 능력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본질과 동일한 능력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이 능력에 의해서, 신은 자신의 본질로부터 모든 사물들의 원인이 되고 동시에 자기 자신의 원인, 즉 본질에 함축되어 있는 자신의 존재의 원인이 된다.
변용 능력
변용 능력이 능력으로서의 신의 본질에 상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변용될 수 있는 소질은 능력의 정도로서의 존재 양태의 본질에 상응한다.
존재 양태들은 외연적 부분들이 양태의 본질 혹은 능력의 정도에 상응하는 관계 아래서 그 양태에 귀속하는 한, 존재 양태는 언제나 다른 양태의 부분들을 새로운 관계 속으로 들어가도록 이끌 수 있다.
<어떤 단일한 사물도, 그것이 보다 많은 시간을 존재 속에 계속해서 머물렀다는 이유로, 보다 완전하다고 말해질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들의 지속은 그것들의 본질에 의해서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4부, 서문)
기호
사물의 현존재에 대해 지시적이며 혼합된 결과이다.
신이 자신에게 주는 정언명령적이며, 계시의 결과들이다.
외적인 확신을 위해 해석된 것들이며 미신의 결과들이다.
사회
일군의 사람들이 자신들의 각각의 능력을 결합하여 전체로서의 보다 우월한 능력을 형성하는 (시민) 상태를 말한다.
이성 상태에서 인간들의 결합은 공통 개념들과 그로부터 나오는 능동적 감정들(특히 자유, 단호함, 관용, 제2종의 신앙심과 종교)에 의해 결정되는 내적 관계들의 결합에 따라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시민 상태에서 인간들의 결합 혹은 전체의 형성은 희망과 공포라는 수동적 감정들에 의해 결정되는 외적 질서에 따라 이루어진다.
실체
자신 안에 있고, 자신에 의해서 사유되는 것, 즉 그 개념을 형성하는 데 다른 것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
동일한 속성을 갖는 실체는 하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그렇게 특징지어진 각 실체의 일의성, 자기 인과성, 무한성, 그리고 필연적인 존재를 부여할 수 있다.
제5장 스피노자의 진전
([지성 개선론]의 미완성에 대하여)
스피노자는 윤리학에서, 신 - 실체의 동일성을 통해 속성들 혹은 속성들을 갖는 실체들은 실로 신의 본질을 구성하게 되며, 이제 자기 원인이라는 특성을 누리게 된다.
지성 개선론이 명백하게 말하는 것은, 마치 가설과도 유사한 불특정의 참된 관념은 기하학적 존재에 대한 관념이다. 왜냐하면 그 관념은 정확히 우리의 사유에만 의지하기 때문이다.
[윤리학]은 어떠한가? 여기에서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고 있는, 마치 가설과도 같은 불특정의 속성 혹은 속성을 갖는 실체는 공통 개념 속에서 파악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출발해서 우리는 종합적인 충분한 근거에, 즉 모든 속성들을 포함하고 있고 모든 사물들의 원천이 되는 유일 실체 혹은 신의 관념에 이르게 된다.
스피노자에 따르면, 모든 존재하는 사물은 본질을 가질 뿐만 아니라 또한 특징적인 관계들을 갖는다. 이 관계들을 통해서 모든 사물은 존재 속에서 다른 사물들과 결합하거나 다른 사물들로 해체된다. 공통 개념, 이것은 정확히 여러 사물들 사이의 관계들의 결합에 대한 관념이다.
공통 개념들은 기하학적이라기보다는 물리 - 화학적이거나 생물학적이다. 그것들은 다양한 측면 아래서 자연이 갖는 결합의 통일성을 제시한다.
따라서 공통 개념들은, 철학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기하학적 방법이 갖는 중요성의 범위라는 관점에서, [윤리학]의 실천적 기능이라는 관점 등에서 결정적인 중요성을 갖는다.
제6장 스피노자와 우리
스피노자주의인 것은 빠름과 느림, 응결된 긴장과 가속화된 운동, 형식을 갖지 않는 요소들, 비주체화된 변용들에 따라 사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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