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이와 타자 현대의 지성 108
서동욱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0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차이와 타자

개념어를 알고, 문장을 이해하고, 단원을 파악하고, 전체를 정리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책을 읽는다. 하지만 조금 밖에 이해하지 못하니 비교를 한다는 것은 꿈도 못꿀 일이다.
서동욱 교수의 ‘차이와 타자‘는 그의 해석에 얼마나 많은 이견이 있는지 모른다. 조금 관심 있다 해서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그렇지만 철학자들의 사고가 얼마나 다르고 같은 지를 구분해서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물론 그것 외에 어떤 도움을 주는 지는 모른다. 더구나 도움이 된다 한들 친구들 앞에서 훈장질을 할 것도 아니고, 한다 한들 정리되지도 않는 생각을 내뱉은 말이 얼마나 허접할까 싶다. 그래도 이렇게 저렇게 떠오르는 생각들은, 내가 사는데 조금 넓게 깔아놓은 바닥이라 치고 거기를 자유롭게 다녔으면 좋겠다.

서문
표상적 사유와 비표상적 사유
1. 표상이란 말의 어원론적 의미들과 근대적 주체성의 본성
첫번째 의미는 어원을 분석하듯, 표상이란 자기 앞에 세우는 활동이다. 표상할 수 있는 인간으로서 의식한다는 것은 내면에 있어서만 존재하며 오로지 개별적인 것으로만 현존한다. 또한 그 본질에 있어선 보편적이다.
두번째 의미는 차이를 종속시키는 동일적인 것의 개념적 형식을 의미한다. 표상 활동을 통해 차이와 유사성은 오로지 동일적인 것에 종속된 것으로서만 의미를 지니게 된다.
세번째 의미는 다시 현재화하는 활동을 의미한다. 지향성은 표상 활동을 숨기고 있으며, 그리하여 ‘타자‘를 현전으로, 현전에 귀속된 것으로 만든다. 다시 현재화하는 행위란 타자를 늘 지금으로 현재하는 의식의 현전에 종속시키는 활동이다.
이러한 다양한 함의를 지닌 표상 활동을 통해 비로소 근대적 주체성은 탄생하였다.
표상 개념의 이 모든 의미들이 알게 해주는 바는 주체와 맞서서 서 있는 것, 그리고 주체와 다른 자는 오로지 주체의 표상 활동의 매개를 거쳐 주체의 지평 위에 종속되는 한에서만 존립할 수 있다는 것이다.
2.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근대적 주체의 표상 활동을 비판적 표적으로 삼아 동일적인 것에 종속되지 않는 ‘차이 자체‘를 드러내려는 시도, 그리고 주체 혹은 의식으로 환원되지 않는 ‘타자‘의 현존을 밝혀내려는 시도로 요약된다. 이러한 시도를 우리는 ‘비표상적 사유의 모험‘ 이라고 부른다.
제1부 사유의 새로운 지평
제1장 들뢰즈의 사유의 이미지와 발생의 문제 --- 재인식 대 기호 해독
1.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
1) 사유의 이미지에 대한 일반적 기술
사유 안에 내재하는 그 사유의 ‘밑그림‘, ˝항상 미리 전제되어 있는 [사유의] 좌표들.
누구나 공유하는 것, 누구나 문제 삼지 않는 것.
2) 선의지
‘선의지‘, ‘사유의 선한 본성‘, ‘코기토의 보편적 본성‘ : 사유자가 참을 사랑하고 원하는 이 의지.
그러나 진리 인식에 대한 선의지의 공리 자체는 과연 정당화될 수 있는가? 아무것도 이 공리의 근거를 마련해주지 못한다면 이 공리는 임의적인 것이며, 이 임의적인 공리에 공통적으로 기반해서 탄생한 인식도 진리도 아닌 임의적인 것, 한낱 견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3) 공통 감각
사유자가 지닌 이러한 선의지에 따라 진리 인식을 위해 사유자의 능력들(지성, 상상력, 감성 등)은 서로 조화를 이루고 일치한다는 것이다. 이 공리를 가리켜 ‘공통 감각‘이라 부른다.
이처럼 인식은 ‘모두‘ 에게 있어서 능력들의 협력이라는 주관적 원리, 즉 능력들의 조화로서 공통 감각에 의존한다.
그러나 동일한 대상 인식을 위해 필수적인 능력들의 일치를 근거 지어줄 수 있는 것이라곤 없다. 그야말로 그 정당성을 보장해주지 못하는 독단적으로 전제된 공리라고 밖에는 여겨질 수가 없다.
2. 사유의 이미지의 공리들의 임의성
1) 칸트에게 능력들의 일치라는 문제는 있는가?
지성과 대상의 일치라는 인식론의 오랜 과제를 칸트는 모든 것을 이성의 능력으로 내재화시켜보자는 착안을 한다. 다시 말해 주관적 능력들, 즉 수용적 감성을 통해 다양은 주어지며 능동적 지성은 이에 입법하여 경험 대상을 만든다. 대상이란 그저 경험적인 대상이 아니라 감성을 통해 주어진 다양을 상상력의 종합 활동이 ˝하나의 표상 속에˝정립한 것을 말한다.
2) 발생의 관점에서
심성의 능력들 사이의 일치라는 문제에서 칸트는 대상에 입법하는 자로서 규정되어 있는 능력을 지성이라 했다. 우리는 사변적 관심에 따라 지배적인 역할을 수행하게끔 지성을 규정해주고 지성과 감성의 조화가 일치한다는 사실을 경험에 착안해서 추측할 뿐이다. 요컨대 초월 철학은 경험의 ‘발생‘을 기술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경험을 표준삼아 경험 가능성의 조건을 기술할 뿐이다. 그러므로 초월 철학이 경험의 발생 혹은 능력들 간의 일치의 발생을 기술하려들지 않고 조건만을 규정하려든다면, 능력들의 일치의 임의성과 ‘그 일치의 결과로서의 임의성‘에 대한 의심은 피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발생의 관점이 요구되고 원천에 대한 탐구는 오로지 ‘발생‘의 관점에서만 해명될 수 있다.
3) 초월적 도식 작용론에 대한 비판
도식 작용론에 대한 들뢰즈의 비판은, 첫째로 상상력이 지성과 감성을 일치(매개)시켜줄 수 없다는 점이고 둘째로 지성과 상상력의 일치를 근거지을 수 없다는 점이다. 다음과 같은 결론을 짓는다. 능력들의 일치는 임의적이다. 가능한 경험을 조건삼으니 발생의 문제에 답할 수 없다. 따라서 능력들의 일치는 한낱 개연적인것 일뿐이다.
4) 고전주의 시대의 구성적 유한성과 인간의 탄생
인간 심성이 가진 능력들의 제약성(유한성)은 규정된(구성된) 것이다. 인간 속의 힘들이, 외부로부터 온 유한성의 힘들[임의적 규정들]과 관계를 맺을 때, 바로 그때에만 힘들의 집합은 인간으로서의 형태, 즉 최초의 인간을 구성한다. 그러므로 인간 개념 자체가 한낱 임의적일 뿐이다.
3.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와 기호
1) 숭고와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
이성은 상상력이 감성적 직관 속에서 전체성의 이념에 상응하는 전체를 추구하도록 부추기고, 이에따라 상상력은 한계에 이르도록 총괄을 행한다. 전체성이라는 이념과 비교하면서 이런 한계에 직면할 때 숭고가 체험된다. 이처럼 숭고는 상상력과 이성의 일치에서 체험되는 느낌이다. 그러나 이 관계는 우선 일치보다는 오히려 ‘불일치‘, 즉 이성의 욕구와 상상력의 힘 사이에서 체험하는 모순이다. 그런데 이 능력들의 불일치의 일치는 능력들이 규정되지 않고 자유롭게 활동하면서 이룬 일치이다. 즉 ‘발생한 일치‘이다.
2)기호의 성질들 : 우연성, 강제성, 수동성, 필연성
진리는 어떤 사물과의 마주침에 의존하는데, 이 마주침은 우리에게 사유하도록 강요하고 참된 것을 찾도록 강요한다.대상을 우연히 마주친 대상이게끔 하는 것,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 - 이것이 바로 기호이다.
나타남에 있어서 우연성, 사유에 있어서 강제성(혹은 사유 주체의 수동성), 진리에 있어서 필연성 - 이 세가지가 기호를 정의한다.
3) 기호의 우연성과 사유의 필연성에 대한 니체적 인식 - ‘주사위 던지기‘의 의미
들뢰즈는 ˝필연은 우연이 그 자체로 긍정되는 한에서 우연을 통해 긍정된다˝ 라고 니체의 우연과 필연 개념을 정리한다.
우연 자체를 세계의 원리로 놓고 주사위를 던지는 사람은 어떤 숫자가 나오든 그 숫자는 세계의 원리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다. 그러므로 세계는 우연을 원리로 삼는 영원한 순환일 뿐이다.
‘우연 자체가 세계의 필연적 원리라면, 오로지 기호가 우연히 출연할 때만 그 기호의 출현은 필연적이며, 그 출연한 기호에 대응하는 사유 또한 필연적이다.
4) 표현과 기호 : 스피노자, 라이프니츠, 프루스트
우선 기호 개념에 이해를 돕는 표현 개념을 이해해 본다. 표현은 상반되는 두 측면, 펼침과 감쌈이라는 상반된 방향의 운동을 모순 없이 동시적으로 포괄하는 종합의 원리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기호 개념을 바로 이런 표현주의적 사고 방식의 틀 안에서이해하고 있다.
프루스트에게서 기호 개념이란 감쌈(내용물이 용기 속에 담겨 있음)과 펼침(해석의 활동을 통해 그 내용물을 끄집어냄)이라는 표현의 이념과 동일한 함의를 지니고 있다. 프루스트의 기호들은 ‘불명확함(다의적임)‘을 본질로 하며, 바로 그 불명확함 때문에 기호는 사유자가 그것을 해독하게끔 사유를 자극하고 강요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프루스트와 반대로 스피노자에게선 불명확한 것, 즉 기호는 표현과 대립적인 것으로 이해된다. 스피노자에게 기호란 ‘ 상상력으로부터 나오는 본질적으로 불분명한 언어를 형성한다는 점이며, 이는 일의적인 표현으로부터 나온 철학의 자연 언어와 대립되는 것이다‘. 스피노자에게 설명은 지성 내재적인 사물의 작용이고, 지성이란 자연의 양태일 뿐이고 지성의 소산인 인식 자체도 자연 안에서 이루어지는 표현의 소산일 뿐이다. 따라서 표현 개념은 존재론적일 뿐 아니라 인식론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스피노자에게는 오로지 ‘적합 관념들‘만이 표현으로 고려될 수 있으며, 기호란 한낱 부적합 관념의 일종이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프루스트에게선 불명확한 기호가 곧 표현이며 기호 해석이 바로 우리 정신의 ‘펼치는 활동‘이다.
라이프니츠는 ‘표현은 모든 영역에서 일자와 다자 사이의 관계를 확립한다. 그러나 일자를 현시하는 다자, 즉 [일자의] 표현에는 항상 불분명한 혼란스러운 지대가 끼여든다. 라이프니츠의 체계에서 불분명한 다자, 즉 모나드들은 나름대로 전체(일자)를 반영한다. 그러나 그 각각의 반영은 전체에 대한 완벽한 반영이 아니나, 각각의 모나드들의 유한성에서 비롯되는 한계지어진 반영, 곧 불분명한 표현일 뿐이다. 이런 의미에서 ‘모나드들 모두는 무한, 즉 전체에 대한 혼란된 표상을 지니고 있다‘ 라고 말한다
5) 기호 해독과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
우리는 진리에 대한 자발적인 선의지에 따라서가 아니라, 어떤 폭력 앞에 노출될 때 진리 탐구를 위한 사유를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 폭력을 야기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사유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바로 기호이다‘
이처럼 기호들과 맞닥뜨릴 때 사유는 더 이상 임의적인 공리들에 의존하지 않는다.
기호의 자극을 통해 능력들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사유의 이미지 곧 사유의 형식이 창조되는 것이다.
‘창조란, 사유 그 자체 속에서의 사유 활동의 발섕이다‘.
6) 꿈, 주체의 사라짐
전제된 공리 없이 발생한 사유는 정말로 아무런 전제 없는 사유인가, 순수한 발생의 산물인가?
들뢰즈는 이 ‘순수 사유‘ 의 이미지의 모델을 프루스트가 기술하는 ‘꿈‘에서 발견한다. 하나의 순수 ‘해석‘, 순수 선택이라는 활동이 정말로 존재한다. 꿈이라는 사유 활동이 시작되면 그제야 사유 주체와 사유 대상이 선택되는 것이다.
데카르트 이래로 주체는 그의 사유함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이제 기호 해독이라는 들뢰즈의 사유 모델과 더불어 주체는 사유로부터 제거되어 버린다. 모든 임의적인 요소가 제거된 순수 사유란 ‘비인격성‘ 과 ‘익명성‘을 본질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4. 맺음말: 니체적 문화론의 탄생 - 사유에 가해지는 폭력과 문화의 훈련
어떤 폭력이 사유로서의 사유에 행사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 폭력에 대해서 사유하도록 어떤 힘이 강요해야만‘ 한다. [ --- ] 이런 압박, 훈련을 가리켜 니체는 ‘문화‘라고 부른다. [ --- ] 문화는 사유가 겪는 폭력, 사유의 수련[형성]이다. 문화 개념과 발생적 사유의 이미지는 공통적으로 ‘사유에 해당하는 폭력에 응하는 사유의 수련‘이라는 동일한 함의를 담고 있다. 사유의 훈련을 통한 새로운 법칙들과 가치들의 지속적인 창조 과정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제2장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 프로이트, 들뢰즈, 프루스트, 바르트, 메를로 퐁티
1. 철학과 정신분석학에서 트라우마
주체는 사유가 심성에 주어진 자극에 의해서 ‘비자발적‘ 으로 시작된다. 즉 타자가 주는 ‘상처줌‘을 통해 비로서 주체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현대 사상에서 주체를 형성하는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은 프로이트의 트라우마에 관한 연구를 통해 알 수 있다.
참된 사유는 대상을 객관화하거나 마음에 표상하는 능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떤 식으로도 표상될 수 없는 외부로부터의 상처를 통해서 시작되는 것이다.
2. 트라우마와 문학 비평
※들뢰즈의 트라우마론인 기호 해독 모델은 어떤 식으로 프루스트에게서 발견되는가?
[트라우마의 자극을 통해 비로서 발생하는 사유 활동 <감성을 통해 상처를 입은 주체가, 그 상처를 준 기호가 숨기고 있는 진리를 지성을 통해 해석해내는 과정>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프로이트의 트라우마론의 ‘사후적‘ 성격을 프루스트는 알고 있었는가?
[프루스트 또한 엠마의 트라우마를 통해 사후적 성격을 소설의 주요 라이트모티프로 사용하고 있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의 트라우마론을 계열론으로 이해하며 여기서 계열의 최초의 항, 즉 기원의 신화를 제거하고자 하는데, 들뢰즈가 프로이트의 계열론과 프루스트의 계열론 사이엔 모종의 유비 관계가 있는가?
[프로이트 이론의 핵심은 기원(최초의 항)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기원의 문제와는 상관없이 두 개의 항 사이의 소급적 인과율을 통한 의미 생산의 구조 자체를 발견하는데 초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예컨대 엠마의 경우 사건 2는 엠마의 신경증을 설명하기 위한 최초의 사건, 근원적인 사건이 아니라 한낱 계열의 한 중간 항에 불과하게 되어 버린다.]
※레비나스의, 트라우마론으로서의 윤리학이 프루스트를 통해서도 발견될 수 있는가?
[레비나스는 프루스트의 소설을 주체가 결코 어떤 방식으로도 그 자신과 합일을 이룰 수 없는 타자의 이타성을 체험하는 이야기로 이해한다.]
3. 트라우마, 사진론, 회화론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 즉 트라우마론은 사진론과 회화론에서도 큰 수확을 거둘 수 있다.
사진을 구성하는 요소에서 스투디움은 문화적 코드를 전제로만 존립할 수 있다. 반면 퐁트툼은 비표상성, 고통스러운 자극 등 트라우마 일반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메르로 퐁티는, 회화의 목적은 바로 근대 과학과 철학이 정립한 주체와 객체라는 관계 이면에 은폐된 세계의 모습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런 주객 이전의 사물 세계를 ‘존재의 조직‘이라고도 부른다.눈은 세계의 어떤 충격에 의해 움직인다. 사물이 화가의 눈에 ‘충격‘ 을 주었을 때 눈은 비로서 비가시적이던 존재의 조직에 다다르며, 그 다음에 손이 그 비가시적인 것을 화폭 위에 가시적인 형태로 드러내 놓는다. 이 주체의 탈중심화가 트라우마론의 특성이다.
4. 맺음말: 계시의 시대, 그리고 우리 문학
트라우마란 우연히 맞닥뜨린 자극으로서 기존의 주체 개념과는 완전히 다른 주체의 발생(들뢰즈의 경우는 익명적 사유 활동의 발생)을 가능케 한다. 그것은 표상을 갖추지 않은 일종의 암호 문자이고 계시의 이념을 숨기고 있다. 이렇게 주체의 영역은 자율성에서 비자발성으로, 경험의 객관성 및 일반성은 특정성으로, 필연성은 우연성으로, 지성의 노동하는 능력은 감성의 상처받을 수 있는 가능성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우리 문학 역시 상처를 통해 자기 세계의 표상으로부터 벗어나 트라우마론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제2부 주체와 타자
제3장 주체의 근본 구조와 타자 ---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타자이론
1. 레비나스 철학의 문제
레비나스가 보기에 서양 존재론은 타자를 동일자로 환원하는 전체성의 철학이다. 타자의 환원 불능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타자를 전체성 속에서 파악하는 것이 서양 철학의 지배적인 사유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런 배경 아래서 관심은 나라는 동일자로 결코 흡수되지 않는 타자가 있음을 드러내고, 그 타자에 대해 내가 가지는 윤리적인 책임성이 나의 나됨, 즉 나의 주체성을 구성하는 근본임을 보이는 것이다.
2. 레비나스의 타자이론: 주체의 탄생과 타자
레비나스의 철학은 나의 세계를 떠나 낯선 자에게로 가는 이 ‘초월‘ 의 가능성을 숙고한다. 여기서 초월이란 바로 고통받는 얼굴의 모습으로 나타나는 절대적 타자, 규정 불능의 무한자와 관계함을 말한다.
결론적으로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와의 관계, 즉 타자에 대한 나의 윤리적 책임성은 나의 주체성의 본질적인 구조를 이루는 동시에 초월의 본질적 구조를 형성한다. 내가 타자에 대해 윤리적 책임성을 지닌다는 것, 내가 주체로서 선다는 것, 내가 초월할 수 있다는 것은 한 가지 사건에 붙여진 여러 다른 이름들인 것이다.
3. 들뢰즈의 타자 이론: 공간적 지각과 시간 의식의 탄생
어떻게 타자가 주체의 발생을 가능케 하는지 ‘공간성‘과 ‘시간성‘이라는 측면을 살펴본다.
타자에게 보여지고, 자신에게 지각되지 않는 부분을 종합해서 의식을 구성하는 것은 주체의 공간적 지각이다.
타자는 나의 의식이 [과거 양태인] ‘나였음‘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또한 [지금 있는] 대상과 동시적이지 않은 과거와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도록 해준다. 타자의 출현만이 나에게 기억이, 그러므로 시간이 생기게 해준다.
이렇듯 타자를 통해 공간적ᆞ시간적으로 질서지어진 이 세계의 상관자로서의 우리 주체성이 정립되는 것이다.
4. 무엇이 새로운가? --- 공통점과 차이점
들뢰즈나 레비나스에게 타자는 외적 대상도 주체도 아니다. 들뢰즈에게 타자란 ‘가능 세계의 표현‘이며, 레비나스에게선 ‘무한자가 현시하는 지평‘이다. 두 사람에게 주체성의 탄생은 근본적으로 타자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러나 이 둘의 차이점은, 레비나스의 타자가 ‘외재적인‘ 무한자임에 반해, 들뢰즈의 타자는 인식 가능성의 조건으로서 세계(지각장) ‘내재적인‘ 선험적 구조이다.
5. 타자의 부재와 주체의 종말
들뢰즈에게 있어서 타자를 통해 발생한 주체의 위상이란 무엇인가?
존재론적 관점에서: 현존은 주체의 발생을 가능케 한다. 부재는 주체가 한낱 유명론적인 것일 뿐이고 실재적 차원에 있는 것은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사건들‘이다.
우주론적 관점에서: 현존은 주체의 상관자로서 대상의 출현이다. 부재는 이 대상들도 명목상의 것들이며 실재적 차원에선 분절되지 않고 형상을 지니지 않은 ‘요소들‘로 환원된다.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현존은 성적 욕망의 대상을 분별해준다. 부재는 성적 분화되기 이전인 욕망으로 비인격적이고 익명적인 힘이다.
제4장 사르트르의 타자 이론 --- 레비나스와의 비교
1. 왜 지금 사르트르인가?
2. 이제까지의 타자 이론들에 대한 사르트르의 비판
1) 타자와의 내적 관계와 외적 관계
외적 관계는 ˝타자와 나를 하나의 실체가 다른 하나의 실체로부터 분리되는 것과 같은 식으로 분리한다˝.
내적 관계란, 나를 타자에 의해 규정함을 통해서만, 나와 타자를 구별하는 방식을 말한다. 우리는 인식의 측면, 외적 관계의 측면에서 타자 존재의 확실성을 설명하려는 기존의 이론들이 실패했는지를 살펴본다.
2) 실재론과 관념론 비판
나의 의식에 대하여 시공간 내의 사물이 현전한다는 점에 실재론이 그 확실성을 둔다면 실재론은 타자의 영혼의 실재성에 관해서는 동일한 명증성을 요구할 수 없을것이다. 실재론자들은 오로지 감정이입, 공감 등을 통해 타자 존재에 대한 ‘개연적 인식‘ 만을 얻을 수 있을 뿐이다.
표상들의 통일성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은 오직 나의 주관밖에 없다. 이 점은 타자의 표상들을 조직짓는 통일체는 그 본성상 타자 안에서 찾아져야 한다는 점과 모순을 이룬다.
3) 후설과 하이데거 비판
후설에게 있어서 타자는 신체적 유사성에 의하여 타자 존재를 체험한다. 그러나 신체적 표현 간의 유사성에 근거한 감정 이입은 기껏해야 가능성으로 존재할 뿐인 개연적인 타자만을 알려줄 뿐이라는점을 함축하고 있다. 그 까닭은 우리들 하나하나는 각자의 내면성에 있어서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이다. 나의 내면과 타자의 내면은, 나에 대해서 결코 동일한 정도의 명석판명성을 가지지도 않고 동일한 정도로 부재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르트르는, 타자는 나의 인식적 소유물인 표상이 아니며, 타자를 표상으로 세울 경우 타자성은 그 표상으로부터 사라져 버린다고 말한다.
3.타자의 비표상성과 직접성
1)눈과 시선
타자성을 상실하지 않은 타자의 모습은 비대상적 방식으로 나타나며, 비인식적으로, 직접 현시해야 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시선은 눈과 구별된다는 점이다.
타자의 눈을 지각한다 함은 타자의 타자성을 없애고 그를 대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반면 시선은, 내가 시선을 의식할 때 내 지각의 대상으로서의 눈은 사라진다. 곧 ‘내가 타자의 시선에 나의 주의를 돌리면 그와 동시에 나의 지각은 해체되어 버린다.‘
2) 이타성과 분리
레비나스는 동일자와 타자 사이에는 유적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근본적인 분리가 있다고 본다. 즉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분리란 명백히, 한 사람을 동일자와 타자 사이의 관계 외부에 위치시킬 수 없음을 뜻한다.
다른 어떤 개념 체계의 도움 없이 오로지 타자는 나와 다른 그의 이타성 때문에 나와 분리된다.
3) 얼굴
시선을 의미한다.
4. 대상화의 의미: 비반성적 층위에서 주체의 출현
1) 비인격적 순수 의식과 자아
의식은 대상에 대한 모든 정립적인 의식과 동시에 그 자신에 대한 비정립적인 의식이다. 그러므로 정립적인 지향적 의식과 비정립적인 자기 의식은 한데 얽혀 지향적 활동의 필요 충분 조건을 이룬다. 이 두 가지는 지향적 활동을 가능케 하는 ‘분할, 분해 불가능한 하나의 존재‘이다.
반성되지 않는 의식의 영역에는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로지 절대적으로 자발적이며 아무런 내용도 가지지 않는 (즉 비인격적인) 의식만이 있을 뿐이다.
자아의 출연을 허락하는 것은 그 근본적인 자기성에 있어서의 의식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나는 오로지 반성 활동의 경우에만 나타난다. [ ---] 반성적 활동이 대상으로 삼는 외재적 대상, 그것이 나이다‘.
사르트르는 ‘자아란 결코 의식의 통일성과 개별성의 원천이 아니며, 오히려 자아란 비인격적인 초월적 의식이 반성 활동을 통해 산출해낸 의식 외재적인 대상이다‘ 라고 주장한다.
2) 타자는 수치를 통해 나의 코기토를 가능케 한다: 유아론 극복1
타자의 시선을 받았을 때 의식의 상태는 비반성적이라는 점이다. 이 비반성적인 의식은 ‘수치‘이다. 수치는 그 의식 자신에게 정립적인 지향성의 화살을 돌리지 않으면서 수치에 대해 외재적인 대상을 정립적으로 지향한다.
비반성적 지평에서의 나의 대상화란 반성적 지평 위에서의 나의 대상화와 더불어 사르트르의 자아론을 양분한다.
자아를 대상으로서 정립한다는 점에서 의식의 반성 활동과 비반성적 의식인 수치가 동일하다. 그러므로 타자의 시선 앞에서의 ‘자아의 대상화‘란, 곧 자아라는 인격적 주체의 발생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타자의 시선을 통해 생겨난 ‘나‘는, 의식에 대한 ‘인격적 표상이 아니라‘ 의식이 떠맡아야 하나의 ‘존재‘이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적 코기토이다. 즉 나는 보여지고 있다 고로 존재한다가 된다. 그것은 하나의 주체가 던지는 시선이 다른 주체의 탄생에 개입하는 것(내적 관계)이다.
사르트르는 이와 같이 ‘존재의 측면‘에서, 즉 코기토의 필수불가결한 ‘내적 요소‘로서 타자를 이해함으로써 유아론을 극복하는데 성공한다.
3. 주체의 탄생에 있어서 사르트르와 레비나스, 라캉과의 비교, 자유에 대한 수치
주체란 모두 타자의 개입을 통해 비로소 발생한다.
자유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주체의 성격을 살펴보자. 사르트르에게 근원적인 자유란 자유 의지보다는, 비인격적인 지향적 의식의 절대적 자발성을 뜻한다. 그런데 이것이 인격적 자아에 자리할 때 의식의 무조건적인 자발성은 자아의 구체적인 관심, 습관 등등을 통해 조건지어지게 되기 때문에 그 절대성과 무조건성은 변질된다. 그런 뜻에서 자아의 출현을 의식의 하락 혹은 하락된 의식이라고 표현했다.
타자로 인하여 자아가 될 때, 의식의 절대적 자발성은 한계를 가지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타자는 나의 자유의 한계이다‘. 결국 타자의 출현은 제한된 자유를 지닌 주체의 발생을 의미한다.
5. 타자의 여러 성격
1) 부재와 타자 존재의 필요성: 유아론 극복2
타자는 나의 경험의 장안의 대상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의 장 안의 대상(예컨대 타자의 눈, 신체)과는 인식적 관계를 맺지만, 타자와는 존재적 관계를 맺는다.
또한 타자 존재에 대한 회의론의 위협은, 우리가 경험의 장 안의 대상과 경험의 장 밖의 존재, 즉 외재적인 타자를 혼동한 데서 기인한다.
부재의 의미를 되새겨 보자. ‘부재란 인간 존재가 스스로 자기의 현전을 통해 규정한 장소나 위치와의 관계에 있어서 인간 존재의 한 존재 양식으로서 정의된다. 부재란 하나의 위치와의 관계의 무는 아니다‘. 즉 부재와 현전은 내 경험 안에서 타자가 존재하는 두 가지 방식일 뿐이다.
남편이 부재하는 것, 그녀가 착각한 것[시선을 받아서 수치를 느꼈으나 나타나지 않는 것], 그녀가 부정할 수 있는 것은 피에르의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피에르의 경험적 사실성일 뿐이다. ‘착각으로 밝혀지는 것[즉 부재하는 것으로 밝혀지는 것은] 타자의 사실성이다. 그러므로 부재가 일정한 장소에서의 타자의 사실성에 대립하지만 타자 존재의 실재성과 대립하지는 않는다. 결국 타자의 존재 여부에 대한 회의는 실재성과 경험적 사실성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범주를 구별하지 못한 데서 기인하는 오류이다.
2) 타자의 초월성과 신의 관념
타자의 신체(눈, 발자국 소리 등), 거리, 근접성 등은 세계 내부의 것임에 반해 타자 자체는 세계 내 존재가 아니라, 오히려 ‘초월적이며, 세계 저편의 존재이다.
여기서 타자의 초월성과 관련하여 신의 문제를 생각해 본다.
사르트르는 타자의 현전의 특정성을 무시하고, 타자의 현전 일반을 하나의 무한한 주관의 현전으로 간주함으로써 도달한 것이 신의 관념이라는 점에서, 신은 기만적인 것이다.
레비나스는 인간적 상황이 신의 관념을 명백하게 해준다. 다시 말하면 인간들 간의 관계를 통해서 신의 개념(무한자)을 탐구할 뿐이지, 신의 개념에 합당한 전지전능한 존재를 탐구하지는 않는다.
사르트르가 부정적인 입장에서 신의 이념을 타자와의 관계에서 파생한 일종의 기만적인 관념으로 간주한 데 반해, 레비나스는 긍정적인 입장에서 타자와의 관계를 신의 이념이 적합하고 이해되고 실현될 수 있는 문맥으로 본다.
3) 타자 출현의 우연성,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모든 인간이 존재론이다. 존재론은 존재자를 전체로서 붙들어, 이 존재자의 존재 구조를 해명하는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동일자에게 근본적으로 결핍되어 있는 세계 외재적인 타자와의 만남은 존재 구조 해명을 통해서는 결코 드러낼 수가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타자는 ‘하나의 환원 불가능한 우연성‘에 속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타자의 시선이라는 우연성이 세계 저편으로부터 와서 나의 나됨, 곧 주체성의 성립에 개입하는 이상 인간 현존의 모습은 존재론이 아니라 형이상학을 통해 밝혀진다.
결론적으로 존재론은 형이상학을 전제한다.
6. 맺음말: 부빌의 초상화들과 타자의 시선, 역전 가능성
사르트르와 레비나스가 말하는 타자와의 관계를 비교해 보자.
사르트르에게서 의식은 그 근본젘인 지향성 때문에 상대방을 대상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투ㅅ쟁하는 관계를 형성한다. 즉 타자의 시선이 나를 공겨해옴은 바로 의식의 근본적인 지향성에서 기인한다.
반면 레비나스에게 있어서는 타자는 그의 헐벗음을 통해 윤리적 호소로서 나를 공격해오지, 결코 지향적 광선으로서 공격해오지는 않는다. 또한 나의 지향적 의식은 결코 타자의 헐벗은 얼굴을 나의 지평 위의 대상으로 복속시키지 못한다.
사르트르에게서 타자의 체험은 나의 지향성이 좌절하고 내가 타자의 지향성에 포착되는 전적인 실패를 의미하지만, 레비나스에게서 타자의 체험은 세계 저편으로 초월하는 구원의 의미를 지닌다.
제5장 들뢰즈의 주체 개념 --- 눈대 기관 없는 신체
1. 1960년대 풍경: 주체, 타자, 시선
1960년대 이루어진 이 모든 철학적 업적들은, 대상 세계의 최후 근거로서의 초월적 주체에서 눈길을 돌려, 타자의 개입을 통해 비로서 발생하는 주체를 그리고자 했다.
2. 들뢰즈에서 주체의 발생
타자는 나의 시각적 기관, 눈의 상관자로 현현하는 자이다. 이 타자의 출현을 통해 주체성은 발생한다.
보충적 논의: 들뢰즈와 비트겐슈타인
우리가 어떤 사람이 고통에 이름을 준다고 이야기할 때, 여기서 준비되어 있는 것은 ‘고통‘이란 낱말의 문법의 현존이다. 비트겐슈타인이 일러주듯 ‘고통‘이란 단어의 습득은 ‘찌푸린 얼굴을 한 타자‘의 개입을 통해 이루어진다.
주체가 주체로서 설 수 있는 자리인 문법이라는 구조(비트겐슈타인)와 지각장이라는 구조(들뢰즈)의 대응, 이 두 가지 모두는 타자의 현존을 통해 구성된다.
3. 기관 없는 신체, 비인칭, 고백체와의 대결
들뢰즈가 시각의 상관자로서의 타자의 개입을 통한 주체의 발생을 기술했을 때, 주체란 한낱 유명론적인 ‘이름‘에 불과하다는 것, ‘나‘라고 말하는 습관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즉 주체란 존재론적 지위는 가지지 않으며, 오로지 문법상의 주체(주어)의 지위만을 가진다는 것이다. 들뢰즈는 현상학자들이 열광했던 시각적인 것의 근원성을 허물고자 했다. ‘시각적인 지각‘에 대한 ‘언표 체계‘의 우위성이다. 즉 가시적인 것과 언표적인 것은 각각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지닌다. 다만 가시적인 것의 고유한 형태는 언표 가능한 것으로 환원되지 않지만 언표 체계에 의해 규정된다. 언표만이 규정자이며 보게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시적인 것은 언표 가능한 것과 마찬가지로 현상학의 대상이 아니라 인식론의 대상이다.
들뢰즈는 기관 없는 신체라는 용어를 통해 시각적인 것을 비판한다. 눈을 기관으로서의 주체성의 발생 이전의 상태로 돌려 ‘잠재적으로 여러 기능을 가진 결정되지 않은 기관‘으로 본다. 여기서 기관 없는 신체란 외부와 소통할 수 있는 기관들이 없다기 보다, 이 기관들이 ‘미리‘ 유기적으로 질서잡혀 있지 않다는 뜻이다.
들뢰즈가 말하는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의 ‘주체‘는 결국 어떤 자아도 아니다. 이 소설의 주체는 ‘내용물이 없는 텅 빈 우리‘이다. 들뢰즈는 주체를 대체하는 것은 결국 우리, 아니 우리라고 표현할 수도 없는 익명의 중얼거림일 뿐이라고 본다.
보충적 논의: 익명적 중얼거림 대 고백체
익명적 중얼거림으로서의 언표는 철학 텍스트와 문학 작품에 있어서 고백체와 직접적으로 대립한다. 고백의 형식을 통해서 자기의 내면에서 끌어내려는 노력, ‘자기 의식의 본질적 확실성‘ 을 밝혀내려는 철학상의 노력의 출현을 초래하였다. 이제 우리는 들뢰즈가 발견해낸 ‘익명적 중얼거림‘의 위상과 의의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고백의 강요가 출현시킨 ‘자아‘, 그리고 이 자아를 담구하기 위한 형식으로서의 일인칭 화자와 고백체에 대한 직접적인 반항이다. 왜냐하면 말하는 주체란 한낱 유명론적인 이름, ‘나‘라고 말하는 습관일 뿐이요, 언표의 주체란 그 내용물이 하나도 없는 익명의 우리, 누군가, 혹은 그것이기 때문이다.
4. 주체 이후엔 누가 오는가?
들뢰즈는 전통적인 주체 개념인 주체의 보편성과 개별적 인격을 대신해서 내세우는 개념은 개별적 특정성과 비인격적 개별성이다.
결론적으로 들뢰즈는, 주체의 기능을 대신하는 특정성과 비인격적 개별성이라는 이 새로운 기능들과 함께 ˝우리는, 나와 당신 사이의 공허한 교류에서 보다 더 잘 우리 자신과 우리 공동체를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5. 맺음말: 비밀리에 보고 있는 시선의 종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나에게 표상되지 않으며 어떻게든 나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은 여전히 숙명적으로 나의 시각과 관련을 맺고 있고, 나의 시각적 욕망이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는 궁극적으로 눈이란 기관을 신체로부터 도려내 우리를 기관 없는 신체로 만들어버린다.
제3부 법과 사회: 억압에 대응하는 싸움
제6장 들뢰즈의 법 개념
1. 법과 선의 관계
법과 선의 고전적인 관계를 설명한다. [---] 법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법은 부차적인 것, 선의 대리자에 불과하다. 즉 법은 선이라는 최상 원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 결과 [---] 법에 복종하는 것이 ‘최선‘이며, 최선은 선의 이미지이다.
칸트는 거꾸로 주체의 심성 안에 있는 보편적 형식으로서의 법에 근거하여 선을 설명한다.
그렇기에 근대 세계에 들어 칸트를 통해 이 관계는 전도 된다. ˝법은 더 이상 이미 존재해 있는 선에 의존하지 않는다. [---] 법은 순수 형식이며 [오히려] 선이 이 형식에 의존한다.˝ ˝법으로부터 선이 도출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2. 카프카와 우울증적 법 의식
칸트의 정언명법에서나 카프카의 형벌 기계에서나 우리는 우리의 행위를 통해 이 법들을 실행하게 만듦으로써만 법을 체험한다. 결론을 말하자면 ˝법에 복종하는 사람은 복종하는 그만킘 정의로운 자가 되거나 정의로움을 느키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 미리부터 죄의식에 사로잡히며, 또 법에 엄격히 복종할수록 죄의식은 더욱 커진다. 스스로 내면에서 도덕적 의식이명령하는 법의 준수에 대한 강박관념과 그에 따른 죄의식의 증대를 가리켜 들뢰즈는 ˝법에 대한 우울증적 의식˝ 혹은 ˝ 법의 우울증적이고 광적인 면모˝ 라고 이름 붙인다. 결국 칸트를 통한 선과 법의 관계의 전도, 내용이 없는, 따라서 인식할 것이 없는 텅 빈 형식으로서의 법의 정립은 카프카라는 렌즈를 통해 보자면, 법의 준수에 대한 도덕적 의식의 강요와 그에 따른 죄의식의 비례 관계라는 우울증적인 형태로 근대 사법 제도 안에 등장한다.
3. 법에 대한 대항의 두 형태: 사드와 마조호
사드가 법을 규정하는 최고 원리(악)를 지향함으로써 법을 전복하려고 했던 반면, 마조흐는 하위 요소인 법 자체에 철저히 집착함으로써 법을 전복시키려고 한다. 부조리한 법의 철저한 준수, 즉 법이 야기할 수 있는 가장 자질구레한 결과까지 철저히 추구함으로써 그 법 자체를 우스꽝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과정을 통해 마조흐는 법의 엄숙성과 권위를 와해시켜 버린다.
들뢰즈는 보다 본질적 층위로 탐구의 시야를 돌린다. 그의 시선은 법의 본서 자체를 다시 사유하는 데 가 닿는다.
4. 유대주의 대 스피노자주의
스피노자에게 있어서 법이란 원인과 결과의 관계로서 자연의 영원한 진리를 형성하는 것인데, 인간의 유한한 지성이 그에 대한 기호 해독을 잘못함으로써, 즉 결과와의 관련 아래서 원인을 이해하지 못함으로써 법은 도덕적 명령이 되어버렸다. 유대인들은 자연의 법칙을 ‘당위‘로 오인받고 그로부터 명령의 형식을 꾸며냈다.
제7장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 개념
1. 하나의 개념은 어떻게 하나의 글쓰기에 진입하는가?
하나의 낱말이 어떻게 필연적인 개념으로 채용되는가? 그들만의 특정한 문제를 작문하기 위한 표현 기술로서 ‘기계 개념‘을 도입하였다.
2.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 욕망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
들뢰즈와 가타리는 욕망에 관해서 말한다. 여기서 욕망의 문제는 의미가 아니고 사용의 문제만을 제기한다. ‘어떻게 그것은 작동하는가? 이다. 어떤 것(이를테면 욕망)을 ‘기계‘라고 규정할 때 이는 우선 그 어떤 것의 의미가 문제가 아니라 사용이 문제라는 점을 함축한다. 다시 말해 칸트가 이성 사용의 범위와 한계를 규정하는 초월 철학의 프로그램을 통해 이성의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을 문제삼았던 것처럼 들뢰즈와 가타리도 이 문제를 제기한다. 칸트는 그가 비판적 혁명이라고 부른 것 속에서 두 가지를 구별하기 위해, 인식에 대해 내적인 기준을 발견할 것을 제안한다. 결국 들뢰즈는 합법적 사용과 비합법적 사용의 내재적 규준을 마련코자 한 칸트의 기획을 정신분석학의 영역에도 끌어들여,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를 마치 형이상학에서의 가상과 비견될 만한 것으로서 비판한 후 ˝어떤 해석과도 독립된 욕망의 상태를 그려 보이고자한다. 이것이 바로 욕망에 관한 논의에 있어서 ‘사용‘으로서의 기계 개념이 함축하는 바이다.
3. 대상a, 라캉의 기계 개념
라캉은 ‘˝대상a‘에 대해 집중적으로 논의하는데, 구체적으로 여기서 대상a로서 분석되는 것은 시각적 충동이 추구하는 대성인 ‘시선‘이다. 우리는 우리의 의식에 표상되는 대상인 타인의 눈을 지각할 수 있는 반면, 대상a인 시선을 시각적 충동은 결코 볼 수 없다. 시각적 충동은 타자의 시선에 도달할 수 없는 좌절을 겪음으로 해서, 만족을 얻지 못한 결핍된 자아로서의 주체를 탄생시킨다. 원래 주객의 구별이 없던 자아는 대상이 결핍되어 있는, 대상과 분열되어 있는 것으로, 나누어진 것으로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는 무의식적 차원에서 ‘대상a‘를 추구하는 ‘충동‘과 상징적 질서, 주체-대상의 관계 속에서 ‘대상‘을 ‘욕구‘하는 자아라는 ‘절단되고 나누어진‘ 주체의 탄생을 의미한다. 대상a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나누는 기능‘ ‘절단하는 기능‘인 것이다.( 충동 자체가 이미 각각의 대상a에 의해 ‘나누어진‘통일성 없는 부분적 충동이다. 가타리는 이로부터 ‘절단‘이라는 기계 개념을 발전시킨다)
라캉은 이러한 늘 실패하는 충동이 우리의 무의식을 형성하고 있다고 말한다. 무의식의 층위에 있어서 대상a들은 결코 표상적인 차원에서 주체에게 소유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 충동들은 결코 해소되지 않는다. 우리가 의식의 차원에서 욕구하는 것은 결코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언어를 통해 상징적으로 질서지어진 것‘ 이며, 우리의 이면에는 결핍되어 있는 항상적인 에너지로서 충동이 자리잡고 있다. 바로 여기서 라캉의 기계 개념이 나온다. 그는 표층적인 욕구와 심층적인 충동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구조가 기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로써 우리는 라캉의 기계 개념의 두 가지 함의를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그는 인간의 의식적ᆞ표층적 욕구와 무의식적ᆞ심층적 충동의 이중적 구조를 표현하기 위해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둘째, 라캉은 무의식은 의식 세계를 이끄는 에너지라는 점에서 기계 개념을 도입한다.
4.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
라캉에게 있어서 대상a는 마치 폭탄처럼 충동들을, 그러므로 주체를 절단해버린다.
1) 구조와 기계
가타리는 절단으로서의 기계 개념을 정태적이며 공시적인 구조가 아니라 어떻게 통시적으로 하나의 구조가 파괴되고 다른 구조로 진행해나가는가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다. 가타리는 동태적이며 혁명적인 기계와 정태적이며 안정적인 구조는 인간의 두 측면을 구성한다고 본다. 즉 인간 존재는 기계와 구조의 교차 속에서 파악된다.
2) 형이상학과 기계
2)-1 플라톤적 상기와 모사물, 개념적 차이
플라톤은 각각의 사물들이 전체에 도달 하기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를 제시한다. 그것이 결합의 방법과 분할의 방법이다. 즉 유적 형상 아래에 모이게 하고 거기에 종차를 주어 분할한다. 그리고 나서 지금까지 분할된 것들을 다시 종합하여 유개념을 정의한다. 여기서 우리는 서로 차이나는 존재자들을 하나의 전체 아래, 혹은 유기체적 구조 아래 종속시킨다는 말 결국 존재자들을 ‘유종의 체계 속에서 파악‘한다는 것임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은 상기(무의식적으로 나타나는 기억)를 통해 정신은 모든 개별자들이 종속되는 유로서의 이데아를 발견하게 된다.
우리가 살펴본 것처럼 분할은 개별자들을 이데아의 모사물로서 이데아에 귀속시키는 작업, 즉 개별자들이 이데아와 맺고 있는 ‘내적 유사 관계‘를 밝히는 작업이다. 여기에 이데아와 유사성을 지닌 모사물이 있고 유사성을 지니지 못한 시뮬라크르가 있다. 그러므로 모사물과 시뮬라크르 사이엔 ‘본성‘상의 차이가 존재한다.
2)-2 프루스트적 상기와 시뮬라크르, 차이 자체
이데아를 미리 모방하지 않는 능력으로서의 ‘상기‘, 존재들의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를 사유할 수 있는 능력으로서의 상기는 어떻게 가능한가?
프루스트의 비자발적인 기억, 프루스트적 상기가 바로 ‘공명을 일으키는 기계‘이다. 공명은 두 개의 대상이 상위의 동일적인 대상으로 환원될 때는 일어나지 않는다. 오로지 상위의 동일성을 전제하지 않는 두 대상 간의 환원 불능의 ‘차이‘만이 공명의 효과를 생산해낼 수 있다. 이러한 전체화하지 읺는 조각들, 이데아라는 동일적인 유를 전제하지 않는 조각들이 시뮬라크르들이다. 이것들 사이의 차이는 상위의 동일자(유개념)에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 자체로 성립하는 것이기에,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차이 자체‘이다.
프루스트의 상기는 세계를 결코 유기체를 이루지 않는 시뮬라크르들로 조각내는 ‘절단 기계‘이다.
2)-3 반복이란 무엇인가?
전체성과 양립할 수 없는 차이는 반복을 그 원리로 삼고 있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존재자들을 긍정하는 원리가 반복이다. 동일성을 향해 전진하지 않는 차이나는 것으로서의 존재자성을 부여하는 원리라는 뜻에서의 반복이다.
반복은 존재자를 ‘환원 불능의 차이를 지닌 존재자‘로 드러내 보이는 ‘존재‘이다.
3) 보충적 논의: 전쟁 기계와 국가 기구에 관한 노트
전쟁 기계는 국가 기구에 대해 반드시 ‘외재적‘이다.
국가 기구는 늘 ‘전체적 일치‘, ‘보편화‘를 추구하는 반면, 전쟁 기계는 보편성으로 환원될 수 없는 ‘특정성‘을 추구한다.
5. 맺음말
들뢰즈와 가타리의 기계는 모든 종류의 유기체적 조화와 통일의 파괴자로서 기능한다.
제4부 세속의 삶, 초월, 그리고 예술
제8장 아이와 초월 --- 레비나스, 투르니에, 쿤데라
나는 아이를 통해 미래를 뻗어나가는 무한한 시간을 여행한다.
1. 레비나스: 나이며 타자인 아이
아이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선 존재의 ‘고독‘과 ‘존재의 일반 경계‘에 대한 논의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인간 존재의 고독은 어디서 오는가? 레비나스는 고독이란, 존재의 존재함 자체에서 기인한다고 말한다.
전체 속에 혼융되지 않는 인간은 그 자신의 존재함 때문에 고독하다. 이 고독한 존재는 일상성 안에서 자기의 고독을 벗어나려고, 즉 자기와 다른 것, 타자를 만나려고 안간힘을 쓴다. 향유, 인식, 노동, 거주 등 이 고독한 존재가 일상성 안에서 수행하는 활동을 통틀어 레비나스는 ‘존재의 일반 경계‘라고 부른다. 그렇지만 향유를 통해 만나는 타자는 곧 나에게로 동화되어 버리지, 그 타자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다시 존재는 깊은 고독 속에 빠져 버린다. 세계 안에서는, 혹은 존재의 일반 경계를 통해서는 어떻게도 고독으로부터 달아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날 존재는 실로 위협적인 타자를 만나는데, 죽음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절대적인 타자인 죽음과 맞닥뜨린 인간은 비로소 존재의 고독으로부터 탈출하게 되는 것인가? 죽음은 나를 세계로부터 초월할 수 있게끔 해주는가? 레비나스는 초월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넘어감[조월]이란 존재와 다르게 됨, 존재의 ‘타자‘에게로 가는 것이다. 이는 ‘다르게 존재함‘이 아니라 존재와 다르게 됨이다. 이것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 아니다. 즉 여기서 넘어감은 죽음이 아니다˝ 초월은 존재와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나를 세계로부터 떠나게(초월하게) 하는 동시에 나의 자기 동일성 또한 깨끗이 소멸시켜 버린다. 그런데 내가 없다면 초월도, 구원도 있을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죽음을 통한 초월이 가지는 모순적 개념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의 운명이란 무엇인가? 초월의 가능성은 아예 막혔는가? 초월이 가능하려면, 나는 나로 남아 있으면서 동시에 나 혹은 내가 정립한 내게 귀속된 세계와도 ‘다르게‘ 될 수 있어야 한다. 즉 초월은, 나이며 동시에 내가 아닐 수 있음, ‘여전히 나이되 다른 이로 변화함‘을 조건으로 한다. 논리적으로 가능할 것 같지 않은 이 무리한 초월의 요구를 충족시켜주는 이가 있으니, 바로 나의 아이이다. 아이와의 관계, 혹은 타인과의 관계는 권력이 아니라 출산이며, 이는 절대적인 미래 혹은 무한한 시간과의 관계를 세운다. 이 나의 아이는 타자이면서, 이미 말했듯 여전히 모종의 방식으로 나이다. 아이는 나이며 타자이기에, 나는 가의 가능성이 지배하는 유한한 시간 저편의 미래로 초월할 수 있는 것이며, 미래는 나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진 타인의 시간이면서도 여전히 나의 모험일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출산은 무한한 미래로의 여행을 가능케 해주는 ˝부성의 진정한 모험˝인 것이다. 아이를 낳고 싶어함, 그것은 초월하고 싶어하는 ‘형이상학적 욕망‘의 표현인 것이다.
2. 투르니에: 고아, 헐벗은 어린이
신과 마찬가지로 아이 또한 내가 한정할 수 없는 나의 세계 저편의 무한자의 모습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무한자는 나의 아이에게서 찾아질 뿐 아니라 ˝가난한 자, 이방인, 과부와 고아˝의 모습 속에서도 나타난다. 트루니에에게 무한하게 된다는 것은 나 자신의 실체의 부활에 집착함을 뜻하지는 않는다. 어떻게 나의 자식이 아닌 다른 아이의 미래 속에서 나는 나의 영원성을 발견할 수 있는가? ‘헐벗음‘이라는 비표상성, 무한자의 모습, 신의 모습을 고아가 가지고 있기 때문에 가능해진다. ‘고아란 모든 사람의 자식‘이라는 사상이 형이상학의 범주 안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알려주고 있다. 왜냐하면 고아는 무한한 미래로의 유한한 나의 존재의 모험, 바로 초월이라는 형이상학적 모험의 길을 열어주는 까닭이다.
3. 쿤데라: 죽은 아이
쿤데라에게서 아이의 출현은 세계로부터의 초월을 가능케 해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세계 내 존재일 수 있게끔‘ 해준다. 그러나 세계 내 존재로서만 머물고서는 어떤 초월도 바랄 수 없다. 세계 저편으로 가고자 하는 욕망, 보이지 않는 무한한 시간에 대한 욕망은 세계 안에서 충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 자체는 존재의 내재적 삶을 구성하는 데 필연적이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세계와 단절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는데, 그것이 바로 ‘아이의 죽음‘이다. 쿤데라는 아이의 죽음이 하나의 선물이라고 말한다. 아이의 죽음이 비로소 세계와의 단절을 가능케 하고 공동체의 참여를 그만두게 한다. 공동체 속의 익명의 다수로부터 나의 환원 불능의 개별성을 되찾는 것, 그것은 바로 아이의 죽음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쿤데라에게 있어서 아이의 죽음을 통해 가능하게 된, 세계로부터의 초월이란 무엇인가? 아이의 죽음이라는 사건은 세계 내 존재의 일반 경계에 몰입해 있던 그녀에게 ˝이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할 수 있는˝ 태도를 가능하게 해준다. 세계를 정면으로 응시한다는 것은 세계 내 존재로서의 정체성으로부터 해방된다는 뜻이다. 모든 정체성을 말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쿤데라가 희망하는 초월인가? 쿤데라에게서도 레비나스와 마찬가지로 죽음은 충분한 초월로서 고려되지 않는다. 쿤데라에게서도 초월의 욕망은 죽음이 아니라 역시 타자를 향하고 있는 것이다.
4. 맺음말
하루하루 죽어가는 유한한 시간 속에서 고개를 들어, 그 손님이 가져다 줄 무한한 시간, 가없는 시간을 향한 모험의 길로 들어선다
제9장 일요일이란 무엇인가 --- 레비나스와 사르트르의 경우
1. 백수들, 야곱의 시간과 에사오의 시간
일요일의 ‘존재론적 의미‘ 에 대해 묻고자 한다.
일요일은 세계 안의 가치와 질서를 쫓는 사람들의 눈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일요일을 ‘살‘ 뿐이다. 요컨대 세계의 시간으로부터 떨어져나간 백수들만이 요일에 대한 ‘현상학적 환원‘을 수행할 수 있다.
2. 레비나스: 수고, 봉급, 여가 --- 경제적 시간으로서 일요일
시간의 관점에서 표현해보면 경제적 삶 속에는 수고와 여가를 반복하는 순간의 따분한 나열 외엔 다른 어떤 시간의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다. 홀로 있는 주체에게는 시간이, 더 정확한 의미에서는 미래가 찾아오지 않는다. 무엇인가 주체와 다른것, 수고와 봉급의 질서 속에 결코 편입될 수 없는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만이, 우열이 없는 서로 교환 가능한 순간들의 나열을 깨뜨리고 시간을 불러 올 수 있을것이다. 무엇인가 전적으로 이질적인 것과 맞닥뜨릴 수 없다면, 어느 날 죽음이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망가뜨려놓을 때까지 주체는 수고와 일요일이라는 따분한 순간들 사이를 천편일률적으로 점멸해야 할 것이다.
3. 사르트르: 사교, 식사, 놀이 --- 부빌의 일요일
주체가 그의 이기적 구조 속에서 향유하는, 교양으로 넘치는 사교와 푸짐한 식사와 즐거운 놀이는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지 못한다. 이기성은 주체를 세계의 중심으로 만들지만, 이 때 주체는 진정한 미래를 알지 못하는 홀로 있는 자일 뿐이다.
4. 구원의 시간, 타자의 시간 --- 존재론적 모험과 모험의 느낌
미래는 오로지 ‘타자가 누릴 삶으로서만‘ 나에게 찾아온다. 미래는 아무런 규정도 되어 있지 않은 무한히 열린 미래, 내가 나의 수고를 거기에 던지지만, 아무런 대답(보상)도 기대할 수 없는, 전적으로 나의 힘을 벗어나 있는 시간이다. ˝미래, 그것은 타자이다. 미래와의 관계, 그것은 타자와의 관계 자체이다.˝ 타인이 살아갈 삶, 즉 나의 ‘존재 경제‘ 에 대해 외적인 것을 내가 죽은 후에도 계속될 ‘나의 미래로 삼는 것은, 나의 ‘존재와 다르게‘ 되는 것이며, 나를 나되게 하는 것, 즉 나의 ‘본질 저편‘ 가는 길, 곧 ‘나‘가 비로소 ‘자기‘로부터 분리되는 ˝존재론적 모험˝, 세계 너머로의 초월을 의미한다.
제10장 예술의 비인격적 익명성 --- 레비나스와 들뢰즈의 예술 철학
1. 주체성이 부재하는 카오스
예술은 모든 객관적인 규정, 즉 시공간적 규정에 따라 구성된 대상 세계의 분절, 분류 등에서 주체를 해방시키고, 인간이 부재하는 카오스, 익명적 ‘있음‘을 체험하게 해준다.
2. 비인격적 익명성의 양태들 --- 사례 분석
1)비연속성: 조화롭게 질서잡히고 체계화된 통일된 유기체적 전체에 대항하여 이질성, 비연속성, 파편적 개별성을 드러내는 것이 예술의 기능이다.
2)비인격성: 유기체적 세계를 비연속적인 파편들로 되돌려놓는 이러한 예술의 면모를 밝히는 작업은, 세계를 동물의 신체처럼 조화롭고 합리적인 유기체적 우주로 본 형이상학적 가정에 대한 반박은 인간과 동물을 구별하지 않는 ‘비인격적인 고기‘로의 인간 형태의 이러한 변형으로 유기체적 형태의 해체라는 인격성의 문제를 공격하고 있다.
3. 예술적 형식의 문제: ‘외관‘과 ‘집‘ --- 예술 작품의 건축적 본성
‘카오스 자체‘와 ‘예술 작품을 통해 현시된 카오스‘ 사이에는 엄연히 차이가 있다.
예술의 어떤 요소가 카오스에게 예술적 영속성을 부여하는가? 즉 무엇이 무형의 카오스를 부동의 한 순간으로 고착시키는가?
예술 작품은 카오스를 예술적 방식으로 드러내기 위해, 질료의 짝 개념으로서의 형상을 일컬어 ‘외관‘이라 부른다. ˝사물에다 외관 같은 것을 부여해주는 것은 예술이다. 레비나스가 사용한 건축적 개념인 ‘외관‘ ‘건물‘ 의 경우와 매우 유사하게, 들뢰즈는 이 요소를 가리켜‘집‘이라 부른다. 들뢰즈에게서 집 개념은 레비나스의 ‘외관‘ 개념과 정확하게 동일한 기능을 하는데, 그 기능이란 바로 카오스, 익명적 ‘있음‘이 작품 속에서 드러날 수 있도록 틀을 부여하는 것이다.
4. 혁명과 우상 숭배 --- 레비나스와 들릐즈는 어떻게 다른가?
들뢰즈의 예술 작품은 미지의 ‘비전‘을 도입함으로써 지배 계급의 가치에 따라 질서지어진 세계를 ‘재편성‘ 해낸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혁명적 힘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다.
레비나스에게 ‘예술은 문명의 최고 가치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결국 레비나스에게 예술은 주체를 모든 책임성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즐거움의 원천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심지어 주체는 예술 속에서 타자뿐 아니라 그 자신에 대한 책임성으로부터도 자유로운데, 왜냐하면 예술은 주체를 비인격적 익명적 ‘있음‘의 상태, 즉 책임질 수 있는 인격이 없는 상태로 되돌려놓기 때문이다.
5. 맺음말
예술의 가치라는 문제에 있어서 들뢰즈의 내재성 철학과 레비나스의 초월의 철학은 화해 불가능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