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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 진훤, 왕건과 열정의 시대
이도학 지음 / 김영사 / 2000년 5월
평점 :
절판
반만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우리나라의 역사에서 가장 흥미있는 일들이 벌어진 시기가 후삼국 시대라고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러한 사고 방식을 저자도 가지고 있는것 같다.
구 삼국의 시대인 고구려,신라,백제의 시대가 외세인 당나라의 도움으로 신라에 의해서 통일을 맞이하고 외세를 동원한 통일로 인하여서 복속된 지방인 백제와 고구려쪽에서는 자신들의 자긍심을 읽어 버리지 않고 신라속의 백제인과 고구려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이러한 사람들이 갈수록 망가지는 신라황실의 모습을 보면서 더욱 자신들의 나라를 찾고자 하는 마음이 늘어나고 그러한 상황을 인식하고 제대로된 통일을 이룩하지 못한 신라의 황실은 자신들의 최고지위인 왕의 자리를 가지고 계속된 분열로 망가지고 강화된 신분제로 인하여서 많은 고급인력들이 제대로 자리를 못잡고 불만을 가지하게 되는데 그러한 시대의 분위기를 타고 나라는 분열의 양상으로 빠져들고 산적과 유민의 무리들로 인하여서 일반백성들의 생활에 많은 타격을 입고 그런 모습을 보고 각지의 호족들은 자신들의 마을을 지키고 세력을 늘리기 위해서 마을을 성벽으로 둘러싸고 각자가 장군이라는 칭호를 사용을 하면서 전국시대로 들어가게 된다.
그 당시의 전국시대를 자랑하던 위인들이 현 전라도를 지배하던 견훤(진훤)과 경기도와 강원도(궁예,왕건) 그리고 갈수록 줄어드는 땅을 가지고 있는 신라가 있다.
1. 궁 예
고사를 보면 신라의 왕이었던 경문왕의 아들로 태어 났지만 어머니의 신분이 낮은 후궁이었고 궁예가 태어난 시기가 왕실에서 안좋게 보는 시기에 태어나고 그 당시의 왕권이 약하여서 궁예를 죽이려고 하는 음모를 궁예의 유모가 데리고 도망을 치면서 실수로 그의 눈을 망가 트려서 외눈으로 살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 사고를 많이 치는 개구장이로 살았다고 하는데 그런 이유로는 신체적인 문제로 인하여서 주변의 아이들에게 많은 괴롭힘을 받고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사고를 친것으로 보이는데 유모에게서 출생의 비밀을 듣고 깨달은 것이 있어서 불교로 귀의를 하지만 그 당시의 불교의 모습은 일을 하기 싥어하는 사람들의 모임과 재물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망국적인 모습을 보이어서 승려의 생활에도 정을 못 붙이고 그 당시에 세력을 키우고 있던 도적 세력을 찾아가지만 홀대를 받고 양주의 양길을 찾아가서 대우를 받는다.
저자는 궁예의 능력을 알아본 양길이 궁예를 크게 대우를 하였다고 하지만 그 당시 궁예는 승려의 모습을 하고 있었고 강원도 쪽의 큰 사찰에서 생활을 하였던 것으로 보이므로 양길이 자신이 세력을 유지하는 강원도쪽의 사찰들의 도움을 받으려는 목적으로 궁예를 이용 하였다고 생각이 든다.
양길의 지원을 받고 강원도 사찰들의 세력을 합쳐서 세력을 키운 궁예는 양길을 떠나서 자신만의 세력을 형성을 하고 민심을 수습을 하여서 중부 지방을 호령하는 대단한 세력을 키우게 된다.
2. 왕건
현대의 개성인 송악 지방의 해상세력을 배경으로 하는 호족 세력인 왕건의 아버지가 중부지방에서 큰세력을 이루고 있던 궁예를 찾아가서 고개를 숙이고 같은 편이 되면서 왕건의 시대가 시작이 된다.
자신의 씨족 자체가 해상을 기반으로 하는 많은 부를 이룩한 호족이므로 해상 세력과 돈을 이용 하여서 자신의 군대를 이룩하고 그러한 기반을 바탕으로 궁예가 자신의 목표를 상실하고 흔들리는 시점에 쿠데타를 일으키어서 권력을 장악한다.
왕건이 국가를 개국하면서 시조의 자리를 차지를 하였지만 다른 시조들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나라가 많이 흔들리고 주변의 세력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데 그 이유를 한번 알아 보자
1.1 궁예의 세력이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궁예도 한나라의 시조이고 그와 같이 일을 하여서 이익을 배분을 받던 개국공신들이 많이 주도적인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나라를 세운 시조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서 망국의 길로 들어가서 왕이 군사적인 세력도 없고 무능한 모습을 보였지만 궁예는 시조로서 그가 직접 칼을 휘두르면서 같이 싸운 군사들이 많이 생존을 하였고 각 지방의 알력을 해소를 하는 입장 이어서 권력의 쟁취는 쉬웠지만 왕건과 같은 레벨의 사람들이 많았다.
2.2 왕건의 왕비가 많은 이유
확고한 자신만의 세력을 만들어서 정권을 쟁취한것이 아니고 여러 세력의 추대로 자리에 올라서 그러한 자신의 위치를 다지기 위한 작업으로 많은 여인들과 혼인을 하여서 동맹을 맺는 모습을 보여 주었는데 많은 자식으로 인한 분란을 걱정 하여서 이복 남매간의 결혼으로 가족의 숫자를 줄이는 모습을 보여준다.
왕건의 왕비가 많은것을 보아서 궁예의 정치가 훌륭한것을 알수가 있다. 궁예의 진정한 모습이 잔혹한것만 강조가 되는 역사서의 모습이라면 죽은 궁예를 위해서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적고 왕건도 자신의 세력을 강화 하여서 적은수의 여인과 결혼을 하였을것 이기 때문이다.
3. 진 훤
후백제를 건국을 한 진훤은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서 군인의 길을 걷고 그곳에서 배운 기술과 친구들을 이용하여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는 비범함을 보여준다.
궁예와 왕건은 무일푼에서 시작을 한 경우는 아니고 다른세력을 물려 받은 경우이다.
진훤이라는 이름이 견훤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진 이유로는 역사학자들이 한문의 뜻을 제대로 파악을 못하고 사용을 하여서 그런것 이라고 저자는 말하고 있는데 그러한 성에 대한 중요성은 별로 강조를 할만한 경우는 아니라고 본다.
이름과 성도 본시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러한 것보다는 난세에 그 사람이 이룩한 실적이 다른 것보다 더욱 중요하고 그러한 모습이 제대로 평가를 받을수 있는 요인인것 같다.
진훤의 장점은 많은 인재들을 등용을 한 것을 보면 알수가 있는데 인재의 등용으로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을 하고 외교에도 신경을 많이 쓰는 모습을 보였지만 신라의 수도인 경주에 침입을 하여서 그곳의 귀족들과 왕을 참살한 행위로 인하여서 백성들의 신뢰를 버리고 신라계의 호족들의 원성을 들은 이유가 국가의 패망에 큰 역활을 한것으로 보인다.
4. 결 론
전란의 시기에는 많은 인물들이 등용이 되는데 전쟁에서 이기는것이 지상의 과제로 인식이 되면서 신분과 도덕적인 규범은 모두 날라가고 오로지 능력 제일주의로 흐르는 경향을 보이는 것이 전란의 시대 이므로 많은 상식을 초월하는 기술도 나오고 사상도 나오는등 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은 시대였다고 생각을 한다.
궁예는 호족들의 관리 소홀로 인하여서 왕권을 빼았기고 진훤은 가정을 잘못 다스려서 자신의 나라를 왕건에게 바치는 일이 벌어졌는데 그러한 여러가지의 운이 따라주어서 고려를 건국한 왕건의 모습을 잘 표현을 하고 있는 책인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