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
박연준 지음 / 북노마드 / 2014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긴 여행에서 돌아오는 친구를 마중하기 위해 인천공항으로 가는 길이었다. 퇴근 시간 전이라 전동차 안은 한산했지만, 장마철인 탓에 공기가 눅눅했다. 사람들은 마치 귀찮은 껍질을 벗어놓듯 자리에 앉자마자 우산을 아무렇게나 팽개쳐놓았다. 손수건으로 젖은 무릎을 대강 털어내고는 발치에 우산을 부려 놓고 앉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몸집이 제법 큰 아저씨가 일행과 전동차 안으로 들어와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옆을 의식하지 않고 읽고 있던 책에 집중했다. 그런데 옆자리가 뭔가 산만한 느낌이 들었다. 곁눈질로 옆을 흘낏 보니 불룩한 배를 내밀고 앉은 아저씨가 원피스 아래로 드러난 내 다리를 보려는 것 같았다. 느낌만이 아니었다. 조금 있으니 아예 대놓고 다리 쪽을 향해 고개를 수그리는 것이었다. '변태를 만났구나!' 하고 생각하며, 제대로 혼쭐을 내주려고 고개를 들어 있는 힘껏 째려봤다.

 

"아직도 우산 때문에 기분이 상해 있는 거예요? 찾아봐도 없었으니까 기분 풀어요. 이따 내려서 우리 같이 우산 사는 거예요. 네?"

 

그 때 같이 온 여자 분이 아저씨를 위로했다. 나는 적지 않게 당황했는데 말을 하고 있는 여자 분을 제외한 일행 모두가 지체 장애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기 우산을 소중하게 꼭 쥔 일행이 여기저기서 동정심 가득한 표정으로 아저씨를 바라보고 있었다. 성추행이라도 당한 듯 뾰족해져서 화를 내려고 했던 나는 제대로 상황을 보지도 않고 화를 품은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아저씨는 내 몸을 훔쳐보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잃어버린 우산을 애타게 찾고 있었을 뿐이었다.

 

우산을 잃어버렸다고 진정으로 속상해하던 때가 언제였지? 나는 우산보다 더 중요한 것들을 잃고 살면서도 멀쩡한 얼굴로 잘도 걸어 다니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직 마음이 말랑했을 때 되풀이해 읽던 '어린왕자'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비밀을 가르쳐줄게. 아주 간단한 거야. 오직 마음으로 보아야 잘 보인다는 거야. 가장 중요한 건 눈에 보이지 않아."

건조한 세상에서 눈 뜬 장님으로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나는 안녕한지, 잘 지내는지, 자신이 없다.

* 시인 다운 통찰, 아름다운 말들은 산문집 곧곧에서 흘러 넘친다. 그리고 이처럼 소소한 일상에서의 이야기까지 담백하게 잘 버무려져 있는 산문집이다. 시집 읽고 시인이 궁금해져 산문집을 읽고 있는데, 시인이 좋아져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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