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은 온다' - 최승자


어떻게 살 것인가보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가 더 중요하다. 이 황폐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간단 말인가- 아니, 이 황폐한 세상에서 어떻게 이대로 죽는단 말인가. 도대체, 어떻게 죽어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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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1997)>은 관객과 가해자 간의 공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관객이 행하는 폭력이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닌 '공모'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화 관객이 피사체에 대해 갖는 비윤리성은 '관음'이나 '시선'에 관한 의제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히치콕의 <이창>이 그 주제를 파고든 가장 유명한 영화일 것이다(혹은 세르주 다네의 평으로 유명한 <카포>의 트래블링 숏>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퍼니 게임>에서 관객이 저지르는 폭력은 이와 다르다. <퍼니 게임>에서 관객은 여자의 나체나 뒤통수에 총을 맞은 아이의 시체를 관음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함께 그들의 옷을 벗기고 머리통에 방아쇠를 당긴다.

  이 불쾌한 공모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은 (리모컨을 이용한) 되감기 장면에 이르러서다. 폭력은 분명 인간이 저지르는 것이기에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든지 저항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은 계속된다. 왜? 관객이 그것을 원하기에. 가해자와 공모한 관객은 이 '퍼니 게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심지어 한 게임이 온전히 끝나더라도 그 다음 게임을 향해 달려간다.

  요컨대 영상 매체(영화를 포함)를 보는 모든 관객은 영화에서 폭력 게임을 보려하고 그 욕망을 멈추지 않으며, 영상의 폭력은 그들의 욕망에 의해 계속된다.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이 매우 거친 판단임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퍼니 게임>에는 정말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퍼니 게임>은 특수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예술이 본질적으로 가져야 할 입체감이 결여되어 있다. 다른 해석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영화는 오로지 관객을 계몽시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더 특이한 점은 영화가 비판하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네케는 쓰레기를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쓰레기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혹은 야한 영화를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포르노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폭력이 낭자한 오늘날 영상 매체의 현장을 철저히 인식시키는 것이 목표이고, 결과적으로 어떤 매체보다도 폭력적인 영화가 되었다.

 이 말은 이 영화가 표리부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비판은 영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의 역량과 태도에 박수를 보내더라도 이 영화 자체는 어떻게 평가해야 한단 말인가. <퍼니 게임>은 영화 비평 자체를 거부한다.

  물론 위의 말들은 모두 이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이 영화의 메시지 자체도 어떤 면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칸 영화제에서 관객과 평론가 중 일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일화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퍼니 게임>은 영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모욕적인 영화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 비평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영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세상에 저항하고, 영화를 통해 의미를 탐색하고자 했던 영화 예술의 전방위적 시도들은 이 영화 앞에서 무너진다. 하네케는 <퍼니 게임>에서 영화를 관객의 폭력을 매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며, 영화에 대한 기존의 상들을 도륙낸다.

  이쯤되면 영화사상 가장 논쟁적인 영화 중 한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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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영화의 총격 장면을 트래비스 비클의 망상으로 간주하는 일반적인 견해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전체는 스콜세지의 망상에 가깝다.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인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인용한 그의 명언처럼, 1976년 뉴욕에서 그가 한 번쯤 상상했을, 그리고 그 시대의 누구나 다 상상했을 망상을 스콜세지는 영화로 완성했다.

  낮은 냉담하고, 밤은 추잡하다. 끝없이 낮을 외치는 사회에 맞지 않는 성질(불면증)로 결국 밤으로 추락해버린 낙오자들. 그들 중 하나인 트래비스 비클과 어쩌면 하나였을 스콜세지는 자기혐오와 자기연민으로 뒤범벅된 자신과 이렇게 만든 지독히 답답한 사회에 균열을 내고 싶어 한다. 정치적으로 누가 당선되고 어떤 정책이 시행되든, 이 쓰레기 같은 사회가 바뀔 수만 있다면! 그래서 그의 총에는 아무런 사고가 깃들어 있지 않다. 냉담하고 추잡한 모든 장소에 그는 총구를 겨눈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것도 못 바꾼다는 걸 알기에 망상은 망상일 뿐이다. 앞서 말했듯 영화 내에서 총격 장면이 망상이라고 생각하진 않지만, 결국 아무것도 변화한게 없다는 점에서 공상이나 마찬가지라고 해도 문제 될 건 없다. 여기서 나오는 뼈아픈 쓸쓸함이 이 영화의 전부다.

  <택시 드라이버>가 나온지 50년 가까이 되어간다. 그러나 앨범 <OK Computer(1997)>가 나온지 30년이 다 되도록 라디오헤드가 '우리 시대 최고의 뮤지션'인 것처럼, 스콜세지도 여전히 '우리 시대 최고의 영화감독'이다. <택시 드라이버>의 무기력함은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스콜세지는 우리 시대의 모두가 갖고 있는 시대정신을 가장 먼저 포착해낸 아티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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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다르, 자무시, 벤더스처럼 헤어조크에게도 영화는 만들어지는 것보다는 선택하는 것에 더 가까운 모양이다. 저들의 영화도 그런 면이 있었지만 이 영화는 특히 소설보다는 일기에 가까워 보인다. 그런데 저들은 도시를 찍을 떄 헤어조크는 왜 16세기 정글로 갔을까. 그는 잉카 제국을 점령한 스페인 군대에게서 무엇을 보았길래 그들을 선택하고 그들을 찍었을까.

  여기에는 무력하고 배고프지만 여전히 오만한 인간이 있다. 권력자에게 붙고 황제의 음식이나 몰래 훔쳐먹으면서 순진하게 복음 전파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는 신부가 있고, 모두가 화살을 맞고 적은 보이지도 않는데도 자신이 새 역사를 개척할 것이라 믿는 아귀레가 있다. 생선에 뿌릴 소금도 없는 주제에 일주일치 식량감을 날려먹는 황제가 있고, 자신들이 규정한 그 '미개인'에 수도없이 당하면서도 그들이 미개하다고 생각하는 병사들이 있다.

  결국 헤어조크가 스페인 군대에 서 본 건 무력함 앞에서 우스꽝스러워지는 인간의 광기다. <처녀의 샘(1960)>에서 베르히만이 가진 인간에 대한 태도와 거의 유사하나 차이점이 있다면 베르히만은 인간을 처량하게 보고 헤어조크는 우습게 본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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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히만이 <처녀의 샘(1960)>에서 드러내는 신과 인간에 대한 태도 세 가지:


1.악의 문제. 신은 카린이 겁탈당하고 죽는 것을, 어린아이가 죽는것을, 토레가 살인의 죄를 저지르는 것을 모두 내버려 뒀다. 그가 허락했다. 신이 어떤 뜻을 가지든, 그를 믿는다고 구원이 오진 않는다. 


2.인간의 불안. 인간은 바깥의 심연 앞에 무릎 꿇을 수밖에 없다. 인간은 밖의 구름을 모르고 안에서 떨리는 연기와 같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불안을 극복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3.체념으로서의 신. 인간은 결국 신을 믿을 수 밖에 없다. 그것밖에 길이 없기 때문이다. 신은 결코 구원을 가져다주지 않고 존재하는지도 의심스럽지만, 신 없이는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 그저 물줄기가 쓰러지는 것에도 체념하듯 무조건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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