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끝 - 가산 작탄


무엇이 이 한시의 정적을 울리나,

파괴의 찰나와 불길의 솟구침 사이

저리도 여리게 공명하며?

늦출 줄 모르는 야무진

손끝이 지평선을 분해해

집집으로 풀어 돌려보낸다

고운 흙으로, 철로, 사람으로


손끝이 이부자리를 보고

옷을 개고 사진을 정리한다

한 뜰 한 뜰

평화가 돌에 깃들도록





  <손끝>의 1연에서 파괴와 불길은 (역설적으로) 정적과 동치된다. <손끝>은 고요하고 평화로운 일상(일반적으로는 이것이 정적이겠지)을 조각내는 파괴와 불길의 끔찍함을 보여주는 대신, 파괴와 불길이 정적이나 다름없어진 시공간에서 이 질서를 균열내는 '울림'을 탐구한다. 

 뒤집어 말해 이것은 (시집의 다른 시를 인용하면) 화자가 '전쟁보다는 어리'기에 가능한 문장이다. 파괴와 불길이 정적이 되어버린 이 괄호쳐진 배경이야말로 이 시의 가장 무시무시한 이미지인 것이다. 

 그렇다면 작탄이 탐구하는 '울림', 혹은 '희망'이란 무엇인가. 한번 더 정확히 말하면, 작탄은 울림의 정체에 대해 탐구하지 않는다. 그의 관심사는 울림을 찾는 손끝의 움직임이다. 그것은 여리게 '공명'하여 '집집으로 돌려보낸다'. 그러니까 그것은 주변의 다른 것을 전제로 하며, 애초에 주변의 그 모든 것 자체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이 가닿는 곳은 주변과는 너무나 먼 '지평선'이다. 물론 지평선은 특정한 '곳(장소)'도 아니며, 원리적으로 '가닿을 수' 없다. 그럼에도 '야무진' 손끝은 '늦출 줄 모른다'. '한 뜰 한뜰 평화가 깃들도록', 주변의 것들을 어루만진다.

 또 다른 시 <그들의 부재>에서 작탄은 '거두어지지 않으니/승리'라고 읊조린다. 참담한 실존의 역설이다.

 이들의 시가, 특히나 작탄의 시가 모든 이의 실존의 역설과 맞닿는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왜 그런가? 그들은 생존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생존, 생명을 넘어 삶을 말하기 때문이다. 앞서 인용한 <전쟁보다는 어리고>에서 모샤브 아부토하는 '생존이라는/느릿한 죽음에 얹힌다'고 독백한다. 그들만큼은 생존을 위협받지 않는, 혹은 정말로 생존만은 위협받지 않는 대한민국의 인간이더라도 저 문장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기란 쉽지 않다. 우리는 그렇게, 함께 짓눌리며 그들과 만난다.

 반드시 짓눌려야 할까. 그렇게 묻는다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깨어 있는 인간은 불행하다. 애초에 깨어 있는다는 것은 가능하지도 않다. 그렇다면 깨어 있으려 노력한다는 것은, 불행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불행하기 위해 산다는 결론이 도출되는데, 도대체 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 연대하기 위해서? 아니, 그러지 않으면 견디지 못해서다. '무엇이 이 한시의 정적을 울리나'- <손끝>의 첫 문장이다. 여기서 화자와 손끝은 미묘하게 분열되어 있다. 화자는 손끝 보고 '움직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저, 어쩌면 화자조차 모르게 움직이는 것이다.

 심지어 화자가 확고한 요구를 하는 경우에도 이는 다르지 않다. 첫 시, 리파트 알아리르의 <내가 죽어야 한다면>은 주변인에게 적극적인 요청을 하는 듯 보인다. 그러나, <내가 죽어야 한다면>은 비합리적인 가정을 처음 두 행에 돌진시켜 역설적인 의지를 창출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내가 죽어야 한다면/너는 살아서 내 이야기를 전해). 이를 통해 사연과 의지는 절절해지되 이유는 물음표로 남기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느낌의 문제다. 당위의 문제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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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오랫동안 시를 잊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백무산을 다시 읽었고, 우연한 계기로 허수경을 다시 읽었다.


노동의 밥       -백무산-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

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

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

쓰일 대로 쓰인 힘은 다시 밥이 되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이


목숨보다 앞선 밥은 먹지 않으리

펄펄 살아 오지 않는 밥도 먹지 않으리

생명이 없는 밥은 개나 주어라

밥은 분명히 보지 못하면

목숨도 분명히 보지 못한다


살아 있는 밥을 먹으리라

목숨이 분명하면 밥도 분명하리라

밥이 분명하면 목숨도 분명하리라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을


밥을 보아야 한다. 현장만 보거나, 추상만 볼 것이 아니다. 아니, 밥에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어디서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목숨이 쥐어짜이며 생산된 밥을 매일 먹겠지만, 그럼에도 소망은 쥐어짜이지 않는 밥을 먹는 거다. 인간이 깨끗이 힘써서 밥이 되고 다시 깨끗이 힘되는 밥을 먹는거다.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시작부터 비범하다. 잊혀진 사랑이 아니라 썩은 사랑을 응시한다. 그대로 있었다는 건 언제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환하다. 꼭꼭 숨겨진 게 아니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간다'고 할 때 시의 경지는 도약한다. 이건 주체적으로 선택한 의지나 삶의 태도가 아니다. 운명의 묘사에 가깝지만, 그와도 조금 다르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라는 평범한 열한글자 문장의 여백이 너무나 넓다. 바로 다음 페이지의 <불우한 악기>는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


(......)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여기서 '불우'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로도 대체할 수 없다. 심지어 '비애'도 안된다.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은 악기의 의무가 아니고 운명도 아니다. 그 둘의 중간에 있는 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디 먼데 저 멀리가는 희망을 떠올리는 심상에는 왜 석양이 보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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