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카엘 하네케의 <퍼니 게임(1997)>은 관객과 가해자 간의 공모를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관객이 행하는 폭력이 '또 하나의 폭력'이 아닌 '공모'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영화 관객이 피사체에 대해 갖는 비윤리성은 '관음'이나 '시선'에 관한 의제로 간주되는 경우가 대다수이다. 히치콕의 <이창>이 그 주제를 파고든 가장 유명한 영화일 것이다(혹은 세르주 다네의 평으로 유명한 <카포>의 트래블링 숏>을 이야기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퍼니 게임>에서 관객이 저지르는 폭력은 이와 다르다. <퍼니 게임>에서 관객은 여자의 나체나 뒤통수에 총을 맞은 아이의 시체를 관음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와 함께 그들의 옷을 벗기고 머리통에 방아쇠를 당긴다.

  이 불쾌한 공모의 의미가 명확해지는 것은 (리모컨을 이용한) 되감기 장면에 이르러서다. 폭력은 분명 인간이 저지르는 것이기에 절대적이지 않고, 언제든지 저항에 부딪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은 계속된다. 왜? 관객이 그것을 원하기에. 가해자와 공모한 관객은 이 '퍼니 게임'이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심지어 한 게임이 온전히 끝나더라도 그 다음 게임을 향해 달려간다.

  요컨대 영상 매체(영화를 포함)를 보는 모든 관객은 영화에서 폭력 게임을 보려하고 그 욕망을 멈추지 않으며, 영상의 폭력은 그들의 욕망에 의해 계속된다. 영화를 한 줄로 요약하는 것이 매우 거친 판단임에도 이렇게 말하는 것은, <퍼니 게임>에는 정말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퍼니 게임>은 특수한 영화다. 이 영화에는 예술이 본질적으로 가져야 할 입체감이 결여되어 있다. 다른 해석은 불가능하다. 여기서 영화는 오로지 관객을 계몽시키기 위해 존재할 뿐이다. 더 특이한 점은 영화가 비판하는 대상으로부터 떨어지려 하지 않고 오히려 끌어안는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하네케는 쓰레기를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쓰레기 같은 영화를 만들었다. 혹은 야한 영화를 비판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포르노를 만들었다. 이 영화는 폭력이 낭자한 오늘날 영상 매체의 현장을 철저히 인식시키는 것이 목표이고, 결과적으로 어떤 매체보다도 폭력적인 영화가 되었다.

 이 말은 이 영화가 표리부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사실 비판은 영화가 하는 것이 아니라 감독이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의 역량과 태도에 박수를 보내더라도 이 영화 자체는 어떻게 평가해야 한단 말인가. <퍼니 게임>은 영화 비평 자체를 거부한다.

  물론 위의 말들은 모두 이 영화의 메시지에 공감한다는 전제가 있을 때 가능하다. 이 영화의 메시지 자체도 어떤 면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다. 칸 영화제에서 관객과 평론가 중 일부가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는 일화는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퍼니 게임>은 영화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굉장히 모욕적인 영화일 수 있다. 왜냐하면 영화 비평을 거부할 뿐 아니라 영화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영화를 통해 세상에 저항하고, 영화를 통해 의미를 탐색하고자 했던 영화 예술의 전방위적 시도들은 이 영화 앞에서 무너진다. 하네케는 <퍼니 게임>에서 영화를 관객의 폭력을 매개하는 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보며, 영화에 대한 기존의 상들을 도륙낸다.

  이쯤되면 영화사상 가장 논쟁적인 영화 중 한 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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