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랫동안 시를 잊고 있었다. 우연한 계기로 백무산을 다시 읽었고, 우연한 계기로 허수경을 다시 읽었다.
노동의 밥 -백무산-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펄펄 살아 튀는 밥을 먹으리라
먹은 대로 깨끗이 목숨 위해 쓰이고
먹은 대로 깨끗이 힘이 되는 밥
쓰일 대로 쓰인 힘은 다시 밥이 되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이
목숨보다 앞선 밥은 먹지 않으리
펄펄 살아 오지 않는 밥도 먹지 않으리
생명이 없는 밥은 개나 주어라
밥은 분명히 보지 못하면
목숨도 분명히 보지 못한다
살아 있는 밥을 먹으리라
목숨이 분명하면 밥도 분명하리라
밥이 분명하면 목숨도 분명하리라
피가 도는 밥을 먹으리라
살아 있는 노동의 밥을
밥을 보아야 한다. 현장만 보거나, 추상만 볼 것이 아니다. 아니, 밥에서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어디서나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의 목숨이 쥐어짜이며 생산된 밥을 매일 먹겠지만, 그럼에도 소망은 쥐어짜이지 않는 밥을 먹는 거다. 인간이 깨끗이 힘써서 밥이 되고 다시 깨끗이 힘되는 밥을 먹는거다.
공터의 사랑 -허수경-
한참 동안 그대로 있었다
썩었는가 사랑아
사랑은 나를 버리고 그대에게로 간다
사랑은 그대를 버리고 세월로 간다
잊혀진 상처의 늙은 자리는 환하다
환하고 아프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
앓는 꿈이 다시 세월을 얻을 때
공터에 뜬 무지개가
세월 속에 다시 아플 때
몸 얻지 못한 마음의 입술이
어느 풀잎자리를 더듬으며
말 얻지 못한 꿈을 더듬으리라
시작부터 비범하다. 잊혀진 사랑이 아니라 썩은 사랑을 응시한다. 그대로 있었다는 건 언제나 알고 있다. 그리고 그 상처는 환하다. 꼭꼭 숨겨진 게 아니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간다'고 할 때 시의 경지는 도약한다. 이건 주체적으로 선택한 의지나 삶의 태도가 아니다. 운명의 묘사에 가깝지만, 그와도 조금 다르다. '환하고 아픈 자리로 가리라'라는 평범한 열한글자 문장의 여백이 너무나 넓다. 바로 다음 페이지의 <불우한 악기>는 조금 다르게 표현한다
(......)
비에 젖은 세간의 노래여
모든 악기는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
(......)
결국 악기여
모든 노래하는 것들은 불우하고
또 좀 불우해서
불우의 지복을 누릴 터
끝내 희망은 먼 새처럼 꾸벅이며
어디 먼데를 저 먼저 가고 있구나
여기서 '불우'라는 단어는 어떤 단어로도 대체할 수 없다. 심지어 '비애'도 안된다. 자신의 불우를 다해 노래하는 것은 악기의 의무가 아니고 운명도 아니다. 그 둘의 중간에 있는 것을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디 먼데 저 멀리가는 희망을 떠올리는 심상에는 왜 석양이 보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