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은 사람들의 공포 본능을 이용하려는 욕구를 억제하기 어렵다. 주의를 사로잡는 데는 공포만 한 게 없기 때문이다. 사실 가장 주목을 끄는 이야기는 여러 종류의 공포를 동시에 촉발하는 것일 때가 많다.

한때 우리 조상의 생존을 도왔던 공포가 오늘날에는 언론인을 먹여 살리는 데 일조한다. 이는 언론인의 잘못이 아니며, 그들이 바뀌기를 기대해서도 안 된다. 그런 상황은 뉴스 생산자의 ‘언론 논리’ 때문이라기보다 뉴스 소비자의 머릿속에 있는 ‘주목 논리’ 탓이 더 크다.

오늘날 자연재해 사망자가 크게 줄어든 이유는 자연이 변해서가 아니다. 다수가 더 이상 1단계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자연재해는 소득수준을 가리지 않고 닥치지만, 피해 정도는 매우 다르다. 부유할수록 철저히 대비한다.

원색의 헬멧을 쓴 해당 지역 구조대원을 보면 이렇게 생각해보라. ‘저들의 부모는 대부분 글을 읽을 줄 모른다. 하지만 저들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응급처치 지침을 따르고 있다. 세상은 점점 좋아지고 있다.’

카메라가 잿더미에서 끄집어낸 아이의 시체를 훑을 때 나는 두려움과 비통함에 지적 능력이 마비된다. 그 순간만큼은 세상의 어떤 도표도 내 감정에 영향을 미칠 수 없고, 어떤 진실도 내게 위안을 주지 못한다. 그 순간에 세상이 더 좋아진다고 주장한다면, 피해자와 그 가족의 참담함을 하찮게 여기는 것이 되기 쉬워 대단히 비윤리적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큰 그림을 잊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 그들을 도와야 한다.
거창한 진실과 큰 그림은 그 위험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그 후에는 다시 과감하게 사실에 근거해 세계를 바라봐야 한다. 뇌를 식히고 수치를 비교하면서 우리 자원이 미래의 고통을 멈추는 데 효과적으로 쓰이는지 점검해야 한다. 자원 배분의 우선순위를 정할 때 공포를 기준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위험이 지금은 국제적 공조 덕에 우리에게 가장 적은 해를 끼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참혹한 상황 한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는 그런 사실이 조금도 위로가 되지 않는다. 한편 그곳에 살지 않는 우리는 10년 단위로 볼 때 전쟁 사망자 수가 계속 떨어진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위안을 얻어도 좋다.

나는 비판적 사고를 무척 좋아하고 회의주의를 칭찬하지만, 증거를 존중할 때라야 그렇다.

미국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술을 마신 사람 손에 사망할 위험은 테러리스트 손에 사망할 위험보다 거의 50배나 높다.
그러나 4단계 나라에서 극적인 테러 사건은 언론의 대대적인 관심을 받는 반면, 음주 피해자 대부분은 외면당한다. 그리고 공항 곳곳에서 눈에 띄는 보안 요원은 테러 위험을 그 어느 때보다 낮춰주지만, 언뜻 보기에는 위험이 더 커진 느낌을 준다.

나는 내 공포를 우리가 진화하던 그 옛날에 존재하던 위험이 아니라, 오늘날 정말 위험한 것에 집중하고 싶다.

눈앞에서 죽어가는 아이들을 외면한 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어가는 익명의 아이들 수백 명에게 주목한다면 언뜻 비인간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극빈층 국가에서의 냉정한 계산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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