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아 오키프 Taschen 베이직 아트 (마로니에북스) 26
브리타 벵케 지음, 강병직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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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머릿속의 ‘미국‘ 에 가장 가까운 화가, 조지아 오키프. 생전에는 ‘여성‘ 화가라는 말을 늘 들어야 했고, 당시 사람들이 들이댄 성적인 해석을 평생 거부했던 사람.

처음 그의 ‘음악-분홍과 파랑II‘ 을 휘트니 미술관에서 봤을 때, 단순하고 부드러운 색채가 어떻게 저렇게 강렬한 느낌을 줄 수 있는지 충격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당시 내게 생소했던 그의 이름을 한 번에 외웠었다. 미알못(미술을 알지 못 하는 자)인 나에게는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만, 나중에 알고 보니 미국 모더니즘 회화에서 굉장히 유명한 사람이었다.

˝뉴욕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는 없기 때문에 느끼는 대로 그린 것˝ 이라 했던 오키프. 자신의 그림을 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뉴욕 대중에게 그녀는 ˝내 그림을 보면서 당신 자신이 연상한 것을 마치 내 생각인 것처럼˝ 말하지 말라 했다.

미알못이지만 그의 생각은 이해가 간다. 글을 쓰는 게 업인 내 입장에서도 사실 작가의 ‘앵글‘ 이나 ‘렌즈‘ 를 아예 거치지 않은 ‘순수 사실‘만 작품에 싣는 게 과연 가능한가 의문이 드니까. 아니, 애초에 작가의 이해와 해석이 실리지 않은 작품이 작품인가?

사실 내 그림 취향은 대부분 인상파 화가들이 활동하던 시대에 머물러 있고 현대로 가까워질 수록 관심이 덜 했는데, 조지아 오키프가 한 번에 내 시선을 잡아챘었더랬다.

그의 작품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도록이나 책을 읽은 건 이번이 처음이다. 좀 더 비슷한 책들을 읽어봐야겠다.

이 맛에 도록을 읽는구만?

조지아 오키프(1887~1986)가 미국 미술에서 차지하는 뚜렷한 위치와 명성은,
작품뿐만 아니라 뉴멕시코 사막에서 독립적이고 전설적인 삶을 개척한 여성으로서그녀가 보여준 걸출한 개성에서 비롯된 것이다. - P7

 1917년에서 1925년까지 자기 소유의 갤러리가 없었던 스티글리츠는 1921년앤더슨 갤러리에서 자신의 작품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된 사진작품의 절반은 오키프의 여러 모습을 찍은 것으로 상당수가 개인적인 누드였다. 결과적으로 그녀는미술가로서가 아니라 스티글리츠의 모델이자 뮤즈로서 조명을 받게 되었다. 오키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는 성적인 측면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언급된 것은 같은 해에 출판된 하틀리의 수필을 통해서였으며, 이러한 해석은 이미 스티글리츠에 의해서도 시도된 바 있었다. 그러나 오키프는 하틀리의 수필에 나타난 터무니없는 해석으로 인해 깊은 상처를 받았다. 그녀는 "거의 울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다시는 세상을 마주하지 못할 것 같았다" 라고 고백했다.  - P19

그래서 오키프는 클리블랜드 미술관장인 윌리엄 밀리켄에게 1930년에 다음과같은 편지를 썼다. "내가 꽃을 그릴 수 없다는 것을 압니다. 나는 청명한 여름날 아침에 사막의 태양을 그릴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물감의 색채에서 볼 때, 나는 에대한 나의 경험 혹은 특정한 시간에 나에게 의미 있었던 꽃에 대한 경험을 당신에게 전해줄 수는 있습니다."
- P28

20세기 미국의 사회 분위기와 프로이트의 최신 이론에 매료되어 있던 뉴욕 대중에게 오키프의 확대된 꽃 그림과 식물 세부의 해부학적 확대 그림은 사실상 성적인 의미를 지닌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오키프 자신은 이러한 해석을 거부했다. "나는 당신이 시간을 내어 내가 본 것을 보도록 만들었으며, 당신은 나의 꽃을 보기 위해 정말로 시간을 내었다. 그러나 당신은 나의 꽃을 보면서 꽃과 관련된 당신 자신의 연상을 마치 나의 생각인 것처럼 글을 썼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는다."
- P38

오키프의 남자 동료들은 건축 주제를 자신들의 영역으로 인식했으며, 오키프의 생각을 불가능한 것으로 여겼다. 오키프는 그들의 반대에 도전했고 그들이 틀렸음을 입증했다. 뉴욕을 그린 최초의 작품은 전시 첫날에 팔렸다. - P40

생전에 오키프의 작품에 대한 평가는 본질적으로 여성성의 측면에 엄격하게 국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타계한 이후부터 다른 평가들이 내려지기 시작했다. 오키프는 평소 자신의 모델과 영감의 근원에 대해 거의 언급하지 않았으며, 지적인 예술이론과도 어느 정도 거리를 두었다. 이러한 모습이 오키프가 외부의 영향에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내부로부터 영감을 얻는 예술가라는 이미지를 만드는 데 한몫 했다.  - P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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