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를 개발도상국과 선진국으로 이름 붙이는 것이 뭐가 그리 잘못일까? 나는 왜 ‘우리와 그들’이라고 말한 학생을 그토록 곤혹스럽게 했을까?
그 이유는 이 도표가 무려 1965년 상황이기 때문이다. 내가 아주 젊었을 때다.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요즘 1965년도 지도를 들고 여행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의사가 1965년도의 연구를 바탕으로 진단을 내리고 처치를 한다면 신뢰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오늘날의 세계를 보여주는 도표는 다음과 같다.
세상은 크게 변했다.

모든 나라가 아이 수는 적고 생존율이 높은 작은 사각형 안으로 향하고 있으며, 대부분의 나라는 이미 그 안에 들어가 있다. 인류의 85%가 소위 ‘선진국’에 들어갔다는 이야기다. 나머지 15% 중 상당수는 두 사각형 사이에 있고, 세계 인구의 6%에 해당하는 13개 나라만 여전히 ‘개발도상국’ 안에 있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 적어도 서양인의 머릿속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은 그대로다. 서양인 대부분은 시대착오적 생각에 사로잡혀 서양 이외의 세상을 바라본다.

세상은 더 이상 예전처럼 둘로 나뉘지 않는다. 오늘날에는 다수가 중간에 속한다. 서양과 그 외,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간극을 암시하는 이쪽 또는 저쪽이라는 단순한 분류는 쓰지 않는 게 옳다.

개인이든 국가든 단계 이동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세상에는 삶이 두 종류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을 인식하면 좋겠다.

부자와 빈자 사이에 간극이 존재한다는 오해는 왜 그토록 바뀌기 어려운 것일까?
내 생각에 인간에게는 이분법적 사고를 추구하는 강력하고 극적인 본능이 있는 것 같다. 어떤 대상을 뚜렷이 구별되는 두 집단으로 나누려는 본능인데, 두 집단 사이에 존재하는 것이라고는 실체 없는 간극뿐이다. 우리는 이분법을 좋아한다.

언론인도 이를 잘 안다. 이들은 전달하려는 이야기를 서로 반대되는 두 부류 사람들, 반대되는 두 시각, 반대되는 두 집단 사이의 갈등으로 구성한다. 이들은 절대다수 사람들이 서서히 더 나은 삶으로 편입되는 이야기보다 극빈층과 억만장자의 이야기를 더 좋아한다. 언론인은 이야기꾼이다.

평균은 분산(서로 다른 숫자가 흩어진 정도)을 하나의 숫자에 숨김으로써 오판을 불러온다.

독자가 사는 나라에서 가난이라고 하면 ‘극도의 빈곤’이 아니라 ‘상대적 빈곤’을 뜻한다.

오해를 추적해 찾아내고 다른 것으로 대체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데이터다.

부정 본능에 대한 이야기다. 좋은 것보다 나쁜 것에 주목하는 성향이다. 두 번째 거대 오해의 이면에 자리 잡은 것이 바로 이 부정 본능이다.

경고: 기억은 대상을 미화한다

인류의 다양한 발전과 더불어 고통을 감시하는 능력도 놀랍도록 개선됐다. 이처럼 좋아진 언론 보도 자체가 인류 발전의 표시이지만, 그 덕에 사람들은 정반대의 느낌을 받기도 한다.

사람들은 세계가 점점 나빠진다고 말하면서 실제로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보기에는 생각을 아예 ‘안 하는’ 것 같다. 사람들은 생각이 아닌 느낌을 말할 뿐이다.

세계가 점점 좋아진다는 말이 마치 만사 오케이라거나 심각한 문제는 없는 척 외면하라는 말처럼 ‘느껴지고’, 그러다 보니 그런 말이 터무니없어 보이고 스트레스가 되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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