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스 - 매와 소년 - 개정판
배리 하인즈 지음, 김태언 옮김 / 녹색평론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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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소년의 하루를 이야기한 소설, 어떠한 모습의 가족이던 간에 집이 아니면 자신의 터전을 생각할 수도 없고 괴롭던 즐겁던 학교에 가야만 했던 유년시절의 아득함이 떠오른다.  그 시절의 순간순간에 마음을 주게되는 대상을 만나 소중한 마음을 느끼고 떠나고 이별하는 순간에 커다란 통증으로 느끼며 혼자 흐느끼면서 눈물을 훔쳐야만 했던 과거의 나의 모습들이 떠오른다.  그것은 유년기의 누구나 가지고 있을 감성때문이었던지 아니면 벗어나기 어려운 틀에서의 탈출을 갈망하는 마음때문이던간에 신체가 완벽히 성장해버린 지금의 내 안에 묵직한 추억으로 남아있다.  


  조지오웰이 직접 경험하며 쓴 책인 '위건부두로 가는 길'을 읽어보면 1900년대 초반 영국 탄광노동자들의 열악한 현실이 그대로 나타난다.  비좁은 공공주택 공간에서 여러명의 가족들이 비좁게 살며 강도높은 노동과 비참한 삶을 이어나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이 소설의 배경에 그대로 투영된다.  아이의 행복이나 삶의 여건따위는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할 수도 없었을 가족들의 삶과 학교라는 공간은 무관심과 배려의 부재로 소년을 자연스레 소외시키고 고립시킨다.  이 소설의 구성은 고립된 아이의 일상을 통하여 소년을 둘러싼 제도시스템과 환경을 간접적으로 고발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고 있기도 하다.  


  가족구성원의 파탄이 성장기의 소년에겐 불안과 애정결핍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그러한 가족구성원이 삶을 이어나가고 나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는 와중에서 소년의 결핍은 더욱 가중될 수 밖에 없는 상황을 이야기한다.  별로 좋아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결손가정'이라는 여건을 넘는 삶의 유지에 대한 발버둥이 약자일 수 밖에 없는 소년의 고립을 더욱 깊게 한다는 것은 어쩌면 사회적 시스템의 문제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소년 역시 자신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신문팔이와 물건훔치는 일을 하지만 그럼으로서 멀어진 공부는 자연스레 제도교육하에서 적응에 실패한 아이로 낙인을 찍는다.  학교라는 제도교육이 보여주는 엄격함을 빙자한 폭력은 그런 아이를 더욱 더 깊이 고립시킨다.  문제아 소년은 학교안에서 벌어지는 어떤 교육에도 쉽게 동참하지 못하고 그런 모습때문에 폭력적인 교사들의 조롱섞인 장난거리로까지 전락한다.  나락으로 한참 떨어진 아이의 인격은 사회시스템 안에서 어떠한 장치도 구해낼 노력을 하지 않는다. 


  결국 자신이 길들인 매를 통한 애정의 교류와 매를 다룬다는 이야기를 통한 한 선생님의 애정있는 관심이 소년의 마음을 움직이게 되는데, 이는 아무리 완벽하다는 사회시스템이라도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살필 수 없다는 것과 그런 인간의 소외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시스템이 아닌 사람의 관심과 교류라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매는 소년의 실수때문에 화가 난 형의 손에 의해 죽고, 그에 흥분한 소년은 결국 집을 뛰쳐나온다.  어린시절 아빠와 손잡고 놀러온 극장에 몰래 들어가 기억안에 존재하는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고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 잠이 드는 소년의 모습은 끊임없는 애정의 대상에 대한 상실과 그로 인한 분노와 슬픔, 분노끝의 그리움, 그리고 다시금 돌아올 수 밖에 없는 현실을 상기시킨다.  그것은 나의 어릴적 경험과도 일치하며 사회적으로 아직 부족할 수 밖에 없는 능력때문에 일말의 답답함을 숙명적으로 안고 순응해야만 하는 소년기의 우울함을 이야기해주는 듯 하다.  위로도 공감도 격려도 없는 가족과 사회, 또는 그럴 여유조차 가지지 못한 가족과 사회는 소년 개인의 우울과 답답함을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렇게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만드는 사회에 대해 간접적으로 고발하는 소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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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우주 - 우리가 알고 싶은 우주에 대한 모든 것
미치오 가쿠 지음, 박병철 옮김 / 김영사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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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를 가지고 고민을 한다는 것은 나에게 꽤나 골치아픈 일이었다.  흥미로운 동기없이 입시를 위해 파고들었던 수학과의 안타까운 첫만남때문이었겠지만 골치가 아프면서도 나름 이해를 해 나가는 과정에의 재미는 조금 느낄 수 있었는데 그것마저도 결국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것을 보면, 내가 만난 숫자들은 그저 기계적 해를 위한 문제들이었지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했던 것은 아닌 듯 하다.  수학을 넘어 만났던 대학물리는 좀 더 이질적이었다.  물리적 현상을 숫자의 공식으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그닥 이해되지 않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론상으로는 맞을 지 모르나 현실에서 보이는 실험값의 오차들은 숫자로 현상을 설명한다는 일에 대한 불신을 더욱 깊게 만들어 주었다.


  숫자의 표현이 현상과 세계를 설명한다는 것을 조금 이해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더 이상 수학과 물리를 배우지 않게 된 이후였다.  나름의 인문학적 고민을 하게 된 이후로 세계를 설명하는 수많은 방법 중의 하나가 수학과 물리 화학등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아, 이질감으로 점철되었던 내 젊은날의 씨름, 그리고 그 허무함이여..


  다시금 공부하라면 손을 절레절레 흔들겠지만 이 책을 통한 물리와의 다시만남은 정말 가볍고 재미가 있었다.  현대물리의 역사와 이론의 설명, 그리고 진행되는 연구과정을 쉽게 풀어쓴 책인데, 뉴턴부터 시작한 역사 안에서 중요시기들마다 이슈가 된 각 이론들과 공식들을 설명,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실제 현실에 사용되고 증명되었는가, 마지막으로 우주의 역사가 흐르며 인간이 생존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물리적 환경에서 우리는 다른 우주로의 탈출이나 다른 적합한 환경을 가진 행성으로의 이동 등으로 생존을 이어나갈 수 있는가를 고민해본다.  두껍지만 읽어나가기가 물흐르듯 자연스럽다.  물리현상을 이론과 이를 증명하는 공식으로 설명한다지만 이 책에는 숫자공식은 나오지 않고 내용 자체가 소설을 읽듯이 편하고 매끄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과거와 현재에서 일어난 물리학적 사건들을 재미지게 설명하여 흥미마저도 불러일으킨다.


  물리학을 통한 우주의 이해는 사실 무모해보인다.  인간이 가진 몇개의 표현력으로 모습과 공간에 대한 상상조차 불가능한 우주를 이해해보겠다는 것은 장님 코끼리만지는 일보다 훨씬 무모해보이는 느낌이 강하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며 가볍고 재밌게 이해를 해 나가다가도, 허공에 던져진 조약돌의 공허함같은 기분을 종종 느껴야만 했다.  빛의 속도로 팽창하고 수축하고 빛의 속도로 몇억년이라는 시간을 내달리고 하는 등의 그 알 수 없는 공간을, 빛도 삼켜버리는 블랙홀과 순간의 속도로 모든 것을 소멸시키는 엄청난 중력의 별들이 존재한다는 무시무시한 것들을, 무한하고 암흑과도 같지만 그 공간의 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도 이해못한 우주를 일개 티끌에 불과한 지구라는 별 위에서 아주 작은 생명체에 불과한 인간이 이해를 하려한다는 것은 대단하면서도 허무하다.  동시에, 이 작은 지구위의 인간이라는 생명체가 벌이는 수많은 일들은 우주의 상상못할 공간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비하면 얼마나 보잘것없고 허무한 일인가..  결정적 임계점에 도달하는 순간, 인간을 포함한 지구는 수많은 아귀다툼을 포함하여 한순간 사라져버릴 것을..


  한가지 더 의문이 들었던 것은, 인간이 사용하는 숫자의 표현이 과연 사물의 현상을 이해하고 우주를 이해하는 방법으로서 적합한가 하는 것이다.  이전부터 머릿속에 넣고 있었던 고민이 있었는데 그것은 원주율의 이해다.  현실속에서 원은 분명 존재하지만 그 원을 표현하는 방법인 원주율은 실제숫자로는 아직도 소숫점 아래 그 끝을 알 수 없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실체적으로 불가능한 무한수가 실제 존재하는 사물을 표현한다는 것은 아이러니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런 숫자로 우리는 지금 우주를 제대로 이해하고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저자는 물리를 일반인들로 하여금 어렵기만 한 것이 아닌 우리가 현실로 경험했던 것들을 포함하여 아주 쉽고 재밌게 풀어내는 능력자임이 분명하지만 읽다가 문득 한 발을 뒤로 빼고 내용을 바라본 나에게는 아주 조금의 의문을 좀 더 분명하게 만들어 준 장본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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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대를 버린 나라 - 코스타리카 사람들의 평화 이야기
아다치 리키야 지음, 설배환 옮김 / 검둥소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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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강정의 저항을 바라보고 있자면 언제나 바라보게 되는 알력의 공식이 있다.  저항의 앞에는 언제나 방패와 보호구로 무장한 경찰력이 서 있고 그 뒤에는 해군과 자본이 위치하는 모습이다.  저항하는 이들과 경찰은 언제나 얼굴을 마주하고 있다.  힘과 권력의 크기도 순서대로 증가하여 가장 힘이 센 사람들은 경찰이라는 공권력의 뒤에 선 이들이다.  경찰이 얼굴을 마주하는 이들은 항상 저항하는 이들이고, 등을 보이는 사람들은 언제나 권력자라는 사실은 언제 어디서 어떤 쪽의 누가 부당한가에 상관없이 변함이 없었다.  

 

  그 모습이 꼭 강정에서만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4년전의 촛불에서도 경찰은 언제나 저항자들과 얼굴을 마주했다.  가장 약한 이들이 최전방에 서서, 등 뒤에는 조금 더 힘을 가진 상급자나 간부를 두고 있었고 최종적으로는 저항자들의 성토의 대상이었던 최종권력자들을 두고 있었다.  싸움은 그렇게 경찰이라는 공권력과 저항자들 사이의 모습일 뿐이었다.  그 모습은 이제껏 변함없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쌍용차에서 김진숙의 부산 영도에서 유성에서 전북고속에서.. 


  또다른 공권력인 군대역시 마주하는 이는 '적으로 간주된 국외의 세력'이거나 때로는 '체제에 저항하는 내부자'였다.  가장 최전방에는 가장 힘없는 이들이 소총과 수류탄을 꼭 쥐고 사라질지도 모를 자신의 목숨에 두려워하고 있고 그런 그들의 등 뒤에는 상급자들과 권력자들이 서 있었다.  고인이 되신 리영희 선생님의 625와 베트남전쟁의 모습이 이를 증명한다.  그러면 내외적으로 구성된 공권력은 과연 그들의 표면적인 정당한 의미를 실천하고 있을까?  더글러스 러미스가 언급한 사실, 지난 100년간 공권력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수는 세계적으로 2억명 정도인데 그 중 절반이 넘는 1억 3천만명은 자국민이었다는 통계는 공권력은 그렇게 정당한 폭력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있게 증명해준다.  우리가 알고 있던 총칼과 제복의 모습은 결국엔 쉽게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쉽게 유추할 수 있는 결론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은 적어도, 우리보다는 힘을 가진 권력과 자본에 더욱 가깝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 발 더 나아가서, 일종의 폭력이라 규정할 수 있는 공권력은 결국 어떠한 형태로든 정당화될 수 없는 폭력 그 자체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공권력이 없는 국가, 사회는 상상하기 어렵다.  어찌되었든간에 군대와 경찰이 존재함으로서 유지되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설령 그것이 오랜 시간을 지내면서 익숙해졌기에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더라도, 국가간의 관계에서 사회내부적인 현상속에서 그들의 역할은 분명 존재하기에 그들의 부재는 쉽게 상상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쩔 수 없는 필요악인 것일까?  많은 고민과 생각을 이어가면 갈수록 그들을 부정할 수 밖에 없었던 나의 입장에서도 그것은 쉽게 말할 수 없고 풀 수 없는 난제였다.


  군대가 없는 나라 코스타리카가 내가 가진 난제에 대한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하는 기대와 호기심에 충만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집어드는 순간부터 알 수 없는 두근거림에 시달릴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 읽고 난 지금은 약간의 막연함과 불안감이 든다.  지리적 위치와 주변국과의 관계에서 부담을 가지고 있기도 하거니와 군대없는 민주자립적인 중립국이라는 위치를 유지하기 위해 능수능란한 외교력과 분명한 정세파악력을 요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또다른 긴장감이기 때문이다.  내부적 긴장도 만만치 않은 나라에서 군사력을 포기하고 세계적인 민주정의 표본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정말 높이 살만하고 교훈적이지만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공존하는 불안감은 평화와 공존에 대한 완전한 답을 주지 못한다는 아쉬움을 남겨준다.  


  하지만 폭력을 배제하고 스스로의 자립적인 민주주의를 위해 내부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은 정말 부럽고 높이 살만하다.  평화를 하나의 안정적인 상태로 규정하지 않고 어떠한 상태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들, 시스템과 사람들의 의식에 온전히 녹아있어야 한다는 생각, 선거는 단순한 표를 행사하는 일이 아닌 모든 이들의 축제가 되어야 하고 그렇게 실천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민주주의의 진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제시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게다가 선거는 특정나이 이상의 어른들만 추구하는 것이 아닌, 청소년들도 함께 행사하고 참여하는 축제이자, 아주 어린아이들의 모의투표결과까지 정치에 반영하는 성실함은 정말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학교는 민주주의와 평화가 무엇인지를 실천과 토론을 통해 스스로 체득하게 하고, 교도소는 자유를 억압하는 곳이 아닌 인권이 무엇인지를 알게하는 장소인 나라, 이에 연관하여 환경, 발전, 경제가 그들이 공존하는 데 필요한 만큼만 이루어지고 그보다도 공존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 나라라는 사실은 정말 부럽지 않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저자는 직접 코스타리카에 거주하면서 그들의 모습을 세세히 관찰하며 이 책을 집필했다.  그러면서 시선을 긍정과 부정의 사이에서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려 노력한 흔적들이 역력하지만, 그들의 현실적인 고민과 사회문제, 국가간 역학의 문제에 있어 긍정의 모습보다 구체적이지 못했다는 사실은 읽는 이로 하여금 일말의 불안감을 남겨주기에 충분하다.  물론 코스타리카의 평화와 중립은 여전히 진행중인 상황이고 수많은 난제들 속에서 끊임없는 노력은 언제나 불가피하겠지만 그들이 진정한 평화와 민주주의는 무엇인가에 대한 하나의 실제적 대안으로서 보여주는 모습이 좀 더 분명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들이 보여준 이상에 가까운 민주주의의 실제는 정말 감동적이다.  쉽지않은 세월에의 설득을 통해 이룩해낸 그들의 민주주의와 동시에 총칼을 녹여 보습을 만들어 낸 그들의 평화가 언제까지나 온전하게 유지되기를 바라는 내 바램은 단지 나만의 바램이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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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붕괴
제레드 다이아몬드 지음, 강주헌 옮김 / 김영사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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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터섬에서 마지막 나무를 베어내던 사람은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좁은 섬에서 각 세력간의 권위다툼으로 무차별적으로 석상을 세우고 나무를 베어낼 때, 그들은 결국 자신들이 멸망으로 치달을 것이라는 생각은 하고 있었을까?  인간이라는 고등생명체의 특성이랄 수도 있는 욕망의 경쟁과 그 분위기속에 미래에 대한 모든 예측이 망각된 상황은 마지막의 나무 한그루까지 스스럼없이 베어내어 경쟁의 도구로 사용하게끔 만들었겠지만, 혹시 미래를 예견하던 사람들은 쓰러진 마지막 나무의 모습에서 무슨 말을 되뇌었을지 궁금해진다.  거대한 석상으로 상징되는 이스터 섬의 몰락은 이미 5-600년 전의 이야기가 되어 우리는 역사적 연구와 추론을 통하여 그들의 과거를 되짚어 볼 수 있을 뿐, 마지막 나무에 스며든 사람들의 되뇌임은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인간은 위대하지가 않았다.  아집때문에 멍청했거나 자연앞에서 한없이 연약하기만 했던 존재였다.  또는 힘의 우월함으로 서로를 지배하고 또 지배당하면서 한쪽을 완벽히 소멸시키기도 했다.  그린란드에서의 유럽인은 그들의 자존심때문에 이누이트족의 훌륭한 생존법을 배우지 않아 소멸했고, 이스터 섬이나 핏케언 섬에서는 자연의 한계와 세력간의 대립으로 결국 자멸을 초래했고 마야문명은 스페인 군대의 막강한 힘과 새로운 전염병 앞에서 한없이 연약하기만 하였다.  문명이라 이야기되는 인간의 사회는 그렇게 수많은 지리적 환경적 조건과 인위적인 요건 속에서 번성과 소멸을 반복한 역사의 흔적들이다.  마치 땅속 개미굴이 여기생겼다 사라지고 저기 생겼다 사라지듯이 말이다.   

 

  저자는 방대한 지식과 관점을 제시하며 인류의 역사 안에서 이루어졌던 문명의 번성과 소멸을 분석하고 설명한다.  저자가 설명하는 문명의 모습들은 상당히 다양하며 지리적 위치나 그에 따른 삶의 모습, 환경사회적 요건들에 상당한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역사안에서의 그들의 모습은 시간적 차이도 있고 교류가 원활치 않던 오래된 과거의 환경에서 지협적이기도 하기 때문에 모습은 다양할 수 밖에 없다.  그 다양성에서 추출되는 인류사의 교훈 역시 다양하다.  하지만, 폭발적인 산업화에 따른 인류문명의 발전은 이제 지구촌이라는 단어가 가능케 되었을 정도로 획일화되어가고 있고, 이제 우리는 각자의 문명이 아닌 우리가 속한 지구의 운명을 함께 공유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저자는, 역사적 교훈을 통한 현재의 우리의 모습을 조망하고 미래를 예측해보며 과연 우리가 지속적으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아니면 자멸의 길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돌아보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당장의 생존때문에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지막 나무를 베러 가는 길에 있지는 않은지, 자존심때문에 혹한의 생존기술을 거부한 그린란드의 유럽인들과 같은 모양인지, 아니면 호주의 정착자들같이 열악한 환경을 극복해보겠다고 덤벼들다가 더 큰 문제만 만들어 악순환만 초래하고 있는 것인지 심도있는 고민과 분석을 하는 것이다. 


  물론 저자는 미래에 대한 신중한 낙관주의자라고 이야기한다.  인간은 이제 한정된 환경과 지식의 소유가 아닌 폭넓고 치밀하고 분석적인 지식의 동물이 되어있기에 과거의 실수를 쉽사리 되풀이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때문이다.  그리고 실수하지 않으려는 노력은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낙관은 우리에게 늦둥이로 불릴만한 50이 넘어서의 출산을 결정했을 정도이다.  나는 물론 저자의 낙관에 많은 부분을 동의하지는 않지만 저자의 방대한 지식과 분석과 관점은 세상의 역사적 흐름에 따른 미래의 모습을 다시금 살펴보게 만들어 준 것이 사실이다.  따라서 마냥의 비관, 당장 세상이 어떻게 될 것이라는 식의 부정적 사고는 옳지 않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클라이브 폰팅이 쓴 녹색세계사를 떠올렸다.  이스터섬의 비극은 이 책의 내용과 일치하지만 제래드 다이아몬드의 분석과 설명이 좀 더 깊고 체계적이다.  녹색세계사는 환경론의 입장에서 지구의 역사적 흐름과 이에 따른 미래의 위기를 이야기하여 사뭇 부정적인 느낌도 들게 하지만, 이 책은 인류사적, 지리학적, 환경적, 사회론적 등등의 다양한 시각을 통해 좀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의 탄탄한 구성을 바탕으로 과거로부터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한다.  따라서 환경론적인 미래의 고민에 체계를 덧붙여 고민과 성찰을 좀 더 탄탄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다.  다양하지만 저마다의 목소리가 단편적이고 그래서 제각각인 고민과 지식의 세상에서 이런 통합적이고 체계적인 지식을 제공받는다는 것은 자신의 목소리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저자가 펴내는 책들의 가치는 그래서 더욱 빛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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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사람들 - 하종강이 만난 진짜 노동자
하종강 지음 / 후마니타스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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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처절함과 치열함을 이해한다는 것은 두가지의 모습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런 처절함과 치열함을 직접 경험함으로서 이해하는 것과 독서나 3자적 입장을 통한 간접경험으로 이해하는 것.  개인적으로는 후자의 방법을 통한 이해를 가지고 있는데 사실 간접경험을 통해 이해한다는 것은 자칫잘못하면 오만함이나 자기변명적인 입장만 늘어놓기 십상이어서 매사 조심스러워진다.  직접경험을 한다는 것도 자신에게 닥쳐왔을때 겪게된다는 어떤 기회성을 전제로 하기때문에 개개인의 상황에 따라 다르기야 하겠지만 어쨌든 간접경험을 통한 이해는 조심스러움을 수반하는 일이고 그러기에 이 책을 읽으면서 마음에 항상 느껴지는 것은 민망함, 조심스러움 등이었다.


  처절함과 치열함이라는 단어조차도 문자라는 방법론적 표현기법이 가지는 한계가 느껴진다라면 조금 과하다 보아야 할까?  저자가 인터뷰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는 처절함과 치열함, 그리고 진지함이라는 문자 속의 느낌을 뛰어넘어 더욱 깊어지는 듯한 진중감이 있다.  우리의 주변에 도드라지지 않게 어울려사는 사람들이 가지는 어떤 진정성은 시대의 현실과 만나 처절함과 치열함을 만들어 내었고, 그것들이 진중하게 쌓인 경험은 저자의 따뜻하면서도 겸손하고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되뇌이는 성찰적 자세와 만나 작은 웅장함을 만들어내었다.  이 역시 문자라는 표현수단으로 온전히 뜻을 전달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건대, 한사람의 위대한 경험은 호들갑스럽지도 않지만, 잔잔한 문자적 표현으로도 온전히 만들어내지 못하는 어떤 깊이가 있음을 이 책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 준다. 


  저자는 자주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진정성을 가지고 어려움을 감내하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공통점에는 어릴적에 어렵게 살아오며 만들어진 상처를 안고있다고 말이다.  과거의 어려움이 현재의 진정성으로 발현되는 이들은 제도권속에서 익숙한 삶을 살아온 우리에게는 사뭇 이해되지 않는 면을 지닌 사람들이다.  제도권에서 이야기하는 '성공한 사람들'의 과거에 어려움이 묻어있다면 그것은 호들갑스러운 관심의 대상이 되곤 했고 우리는 그것을 '역경을 이겨냈다'라며 그 호들갑에 보탬을 주곤 했던 것이 사실이고 익숙한 모습이다.  하지만 어려움을 진정성을 실현하기 위한 어려움으로 이어나가는 그들의 모습은 실은 우리가 가지고 있었어야 할 도덕적 기본가치가 아니었을까.  그런 기본가치를 너무도 잊어버리고 살았기에 얼마 남지않은 그런 이들의 모습에 우리는 그저 신기함만으로 느꼈던 것은 아니었을까.  다 읽고 난 후의 기분은 그래서 계면적음이었다.  그들이 몸으로 말해주는 도덕적 기본가치를 나는 과연 잘 이해하고 행동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  그리고 그들이 위치한 자리의 공통점이랄까..  그들이 진중한 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는 지점이 사회와 삶의 가장 근본적인 위치라 했을때, 우리가 위치하거나 관심을 가져야 할 지점은 분명해진다.  그 지점이 공통적으로 이해되고 공유되지 않는다면 세상의 변화는 요원해지고 기회주의적인 움직임들만 더욱 늘어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사실 이런 류의 책들을 종종 접하고 있어 공감에의 깊이가 아주 크게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치열함과 진중함이 공존하는 근본에 대한 관심과 시선은 분명 우리사회가 가장 먼저 공감하고 갖추어야 하는 사회인식의 시급한 숙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된 독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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