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슬럼프 - 위기와 저항의 글로벌 정치경제 이야기 트랜스 소시올로지 10
데이비드 맥낼리 지음, 강수돌.김낙중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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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점의 정확한 구분을 하기엔 나의 지식이 아직은 얕아 분명하지는 않지만 과거엔 한정된 자본 또는 개발가능한 자본을 가지고 누가 얼마나 많이 소유할 수 있느냐의 싸움과 경쟁이었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자본이 이윤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은 석유와 천연자원같은 실물적 자원을 통해서이다가 나중엔 주식이나 배당같은 거품경제시스템 등이었을 것이다.  가진자들은 자신의 이윤율을 유지하기 위한 방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지금보다는 덜 잔혹한 방법을 사용하면서도 낙수효과등의 현상으로 어떤 순탄한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이후 어느 시점을 지나면서는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이윤을 만들어내기 위한 수단의 모든 면에 있어서 한계가 분명해짐에 따라 가진자들이 이윤율을 유지하기 위해 점점 파괴적이게 되었고 착취의 강도를 높이게 된다.  한정되고 점점 줄어드는 자원과 수단들을 그들로 하여금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 현상의 시간적 흐름상 나타난 체제가 신자유주의 체제일 것이고 그것의 파국적 위기는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여기서 레이건이나 대처가 신자유주의 체제를 표방하면서 탄압한 미 항공관제사 파업이나 영국 탄광노동자 파업을 이야기하거나 NAFTA이후의 파산이나 다름없는 멕시코의 경제를 이야기하기엔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들이기에 오히려 진부해질 수 있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두렵게 다가왔던 것은 가진자들이 자신의 이윤율과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이를 비호하기 위해 점점 포악해지고 잔인해지는 공권력의 변화였다.  2010년 캐나다에서 열린 G20회담을 보호하기 위한 공권력의 무장과 탄압은 이미 세계의 경제시스템이 그들 소수만의 잔치가 되어버리고 그들만의 이윤과 기득을 위한 제물로 전락했으며 모든 제도시스템 체제가 그런 경향에 맞도록 변화하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였다.  


  그에 대한 증거나 현상을 찾는 일이란 그닥 글로벌하지도 어렵지도 않다.  용산참사의 본질은 단지 과잉진압에 의한 인민의 희생이 아니라, 제도시스템 속의 규칙이나 공권력의 움직임이 이윤을 쫓는 자본의 욕구에 충실하고 신속하게 움직였다는 데에 있다.  그 결과역시, 그들의 이윤추구목적에 손상이 가지 않는 방향으로 결론이 났다.  이윤추구에 방해가 되는 힘없는 소수의 인민이 일방적으로 희생을 당한 것이다.  지금의 강정 해군기지문제 역시 그렇다.  약 1조원의 투자사업 앞에서 조용히 숨죽이고 이윤을 챙기는 집단은 다름아닌 이 사업에 참여한 삼성과 대림 두 토건자본들이다.  해군이라는 얼굴마담을 앞세우고, 토건자본의 이윤추구에 충실하게 반응하는 정부와 공권력을 움직여 저항의 움직임에 무자비한 탄압과 유린을 자행하는 것이다.  특히 저항의 입장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느끼는 것은 공권력이 보여주는 탄압과 유린의 강도이다.  자본의 위기와 한계가 점점 드러나고 가진자들의 이윤율이 위협을 받는만큼, 공권력의 탄압과 유린의 강도역시 증가한다.  그것은 국가에 속한 인민들의 생명과 안전을 보장한다는 공권력의 정체성은 실은 그것이 아닌, 권력과 위정자들의 의지를 보장하는 수단임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권력이 자본에 넘어갔다는 지금 이 시대엔 자본을 비호하는 데에 공권력의 정체성이 자리함을 증명하는 일일 것이다.


  옮긴이 해제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남한이라는 사회에서 신자유주의 체제가 강화되고 FTA를 통한 경제적 착취와 수탈은 점점 심해지겠지만, 남한사회의 높은 지적수준은 저항의 강도 역시 강력하기에 이미 FTA에 수탈당한 여러 다른 나라와는 다르게 쉽게 식민지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었다.  사실 높은 지적수준으로의 저항자체가 얼마나 강력할지에 대해서는 의문과 고민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일이고, FTA에 의한 수탈은 단시간이 아닌 오랜 시간적 흐름위에서 서서히 이루어지는 것이라 적응역시 서서히 이루어지며 저항을 무력화시킬 수 있음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중요한 것은 이런 현시대의 경제환경과 체제의 변화는 언제나 기득권과 자본이 그들의 이윤과 힘을 유지하려는 경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아래로부터의 저항이 필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때문이고 그 저항을 고민함에 있어 이 책은 지금 현시대의 사회경제적 실체에 대한 가장 솔직하고 객관적인 지침서이자 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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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삶을 먹다 - 대지의 청지기 웬델 베리의 먹거리, 농사, 땅에 대한 성찰
웬델 베리 지음, 이한중 옮김 / 낮은산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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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일의 근원을 생각함에 있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그 생각은 관념적일 수 밖에 없다는 함정이 있다.  그때문에 말을 조심해야 하고 함부로 아는 척 하지 말아야 하는데, 정신없이 오가는 수많은 말들 사이에 진정성이 느껴지는 단어들은 그닥 많지 않은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책을 읽는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독서는 간접경험이다라는 명제에 걸맞게 책을 읽음으로서 우리가 알지못했던 세계에 대한 체험이 생기는 일도 많지만, 이 역시 '간접적'이기에 조심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타인이 가진 지식을 글을 통한 간접체험이라는 것은 언제나 조심스러우면서도 겸손을 잃지 않아야 한다는 부담을 가진다. 


  그런 부담은 개인적으로는 땅에 관한 글들을 읽을 때 가장 크게 느낀다.  땅에 대한 실제적 체험과 글을 통한 간접경험은 때로는 괴리감을 느낄 정도의 거리감을 느끼기도 한다.  사실 내가 땅에 대한 경험은 5년여의 주말농장 경험이라 이 역시도 매우 하찮은 경험이지만, 땅을 일구고 가꾸는, 생명을 길러내는 이들의 기록으로 그 위대함을 느끼는 것에 대하여 직접 호미질을 하다 느끼는 등과 허벅지의 통증은 '위대함을 느낌'을 입으로 말한다는 행위마저도 외람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 통증만으로도 하루는 버겁고 며칠의 통증으로 몸이 적응하면 몸은 '스스로 움직여 땅을 일구고 생명을 기르는 노동'을 받아들인다.  때로 그 노동은 삶의 온전한 일부가 되지만, 때로는 그 고됨이 너무 버거워, 삶의 온전한 전부가 되기도 한다.


  웬델 베리의 사상은 그 고통으로부터 시작한다.  물론 그가 직접 몸의 고통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기계보다는 가축을 사용하고, 변화속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현대문물과 화학약품들을 거부하고, 자연과 땅의 감각을 몸으로 느끼는 그가 몸의 고통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이라면, 그 고통을 삶의 온전한 전부가 아니었다는 것일까?  온전한 일부와 나머지의 삶은 마음과 머리를 통한 고찰을 하였으니까 말이다.  당연 그 감각과 고찰은 몸을 통한 경험에서 시작한다.  왜 기계가 아닌 옛날의 방식으로 하는 농사가 필요한지, 땅을 온전하게 다루는 방법은 무엇인지, 기다림은 왜 필요하고 그 기다림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옛날방식의 농촌생활은 수확은 적지만 그것이 사람을 굶게 만들 정도는 아니면서도 대량생산과 자본순환에 의지하는 현대농업보다 위기에 대처하여 뛰어난 완충력을 보여주는지 자신의 경험과 어릴적의 기억으로 설명한다.  그의 이야기는 거기서 멈추지 않는다.  자본 시스템이 농업을 자신들의 구조에 어떻게 집어넣는지, 시스템에 편입된 농부들의 삶은 어떻고 어떠한 방식으로 농업의 자체가 파괴되어가는지를 보여주며, 국가와 자본이 체제아래 만들어가는 사회시스템에 대한 비판을 이어나간다.  그것은 전체적인 관점에서도 이루어지지만, 먹거리를 먹음으로서 소비하는 개개인의 식습관과 행태에 대한 비판으로도 이어진다.  예를 들어, 대량재배를 통해 맹독성의 농약을 피할 수 없이 성장한 먹거리를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섭취하는 일이 과연 옳은 일인가 하는 비판말이다. 


  읽다보면 리 호이나키가 말하는 자연에의 감각과 감성, 농촌사회의 어떤 고난함등이 떠오르고, 윤구병 선생님의 잡초는 없다라는 말도 떠오른다.  스콧 니어링의 땅을 일구며 실천하는 혁명적 삶 역시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수많은 사회운동을 하다가 결국 땅으로 귀의하던 수많은 사상가를 떠올리게 된다.  이 책은 그런 과정을 반대로 땅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를 생각하게 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땅과 먹거리, 그리고 땅을 일구는 일을 통한 사회에의 고찰, 그것은 전적으로 관념적일 수가 없다.  온전한 경험을 통해 우리가 잊고 있는 삶의 중요한 근원과 사회순환의 근원성을 깨닫게 해 준다.  그것은 단순한 땅의 소중함이라기 보다는, 경험과 회고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고 잃어버린 그 무엇은 과연 잃어버린 채 살아도 좋을 것인가 하는 고민을 던져주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 중 하나는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획일화를 통한 경직이 우리를 위기의 순간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치게 만드는 것을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보여지는 다양성안에서는 적어도, 사람들이 곤두박질치고 당하며 비참해지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땅은, 땅을 통한 웬델 베리의 글은 내가 이제껏 가져왔던 생각들에 하나하나 확신을 심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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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열린책들 세계문학 9
막심 고리키 지음, 최윤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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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고전의 느낌이라는 것, 그것은 엄청난 시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읽는 순간의 현재를 돌아보게 하는 은근한 힘이기도 하다.  그것은 고전을 탄생시킨 작가에 대한 존경과 시선에 대한 부러움이기도 하다.  어떤 부분에 대한 예리한 시선을 깊은 글로서 표현해낸다는 것은 블로깅이라는 행위를 통해 글로서 나름의 표현을 하고자 하는 나에겐 본받고 싶을 수 밖에 없는 시선이다.  


  러시아 노동자의 역사적 현실과 변화를 예리한 시선으로 그려낸 이 작품에서 시간을 초월한 공감과 지금의 현실을 느끼는 것 역시 그러하다.  그것은 작가가 지닌 시선에 대한 존경과 동시에 별다르게 변화한 것 같지 않은 현실에 대한 서글픔이다.  물론 작품에서 보여지는 자본가와 공권력의 노골적인 패악은 없어진 지 오래이고 노동자가 자본가에 굴욕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일은 없어졌지만, 그들이 노동자의 의식을 유린하는 방법과 억압하는 모습이 그다지 차이있어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그렇게 유린당하며 살아온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부당한 현실과 부당하게 억압해오는 자본시스템을 깨닫기까지는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치게 되는가.  억압을 이겨내려 책을 읽고 전단을 돌리는 과정의 은밀하고 비밀스러움은 마치 지금의 노동자들과 약자들이 그들의 현실을 알리려 소셜 네트워크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모습과 많이 닮아있다.  자본이 만들어내는 불평등과 이를 이용하여 권력을 거머쥔 이들이 그런 행위들을 억압하는 모습 역시 노골적임에서 좀 더 은밀하고 교묘해졌다는 점을 빼놓고는 별반 차이가 없어보인다.


  노동자 아들의 뜻을 잇기 위해 백방으로 뛰며 맡은 임무를 수행해 나가는 어머니의 모습은 외람될 수도 있지만 이제는 고인이 되신 이소선 여사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답답하고 우울한 현실의 원인을 깨부수러 나선 아들을 이해하며 자신의 그러했던 삶의 이유를 알아나가는 어머니의 모습 역시, 억압받는 삶을 마지못해 꾸려나가야만 했던 또다른 노동자의 모습이다.  자신이 왜 그렇게 우울하고 노출된 폭력하에서 살았어야 되는가에 대한 의문은 결국 남편만의 문제가 아닌 남편을 포함한 사회의 문제, 철저한 억압을 통해 불행을 강요하는 시스템의 문제였고, 어머니는 그것을 아들을 통해 깨달아나간다.  그런 깨달음을 통해 희망을 알게 되고 희망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아들만큼이나 나이든 어머니에게도 고통과 모멸의 시간이었다.

 

  이제 희망은 왔는가.  100년전에 쓰여진 작품에서 갈구한 그들의 희망은 이제 이루어졌는가.  먹고사는 일, 즐기는 일이 많아져서 만족에 차 있다 이야기하면, 작품속에 그려진 우울함과 노골적 폭력에서는 벗어났다 이야기한다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스템의 내면과 사람들의 성토를 듣고있노라면 그렇다 말하기엔 너무도 힘들다.  우리가 왜 고통받고 있는지는 이제 많은 사람이 알게 되었어도, 그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누군가가 크레인 위에서 죽어나가고 309일을 버티며 시위해야만 일말의 변화를 기대할 수 있을 뿐이라는 현실은 여전한 불평등을 유발하는 시스템의 건재함을 깨닫게 한다.  한쪽에서는 여전히 1500일을 넘게 거리시위를 해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는다.  결국,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요구하는 일이 이렇게 고통스러운 현실은 100년이 넘어도 변함이 없다는 것만 깨닫는다.  시간을 초월한 고전의 힘..  고전속에서 현실을 바라보아야만 하는 일..  언제나 고통가득한 존경심으로만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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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없는 이야기 - 최규석 우화 사계절 만화가 열전 2
최규석 지음 / 사계절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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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가장 큰 특징은 아전인수식의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이 아닐까.  이는 보수기독교리가 절대적이라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기회주의성향이 가득한 교회의 목사들이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속담역시 마찬가지이다.  하나의 상황에 대해 수없이 많이 적용되는 속담들은 제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만들어내고 때로는 상황에 직접적으로 처한 사람으로 하여금 혼란만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교리의 해석, 상황의 합리적 낙관 또는 비관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의 선택에 의해 결정되고 받아들여지지만, 문제는 그러한 일반적인 해석의 방식과 상황에 따른 선택의 조언은 언제나 사회적 기득권과 주도적 흐름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유도되었다는 데에 있다.  우리가 보편타당하다 생각하는 사고들은 대부분 제도교육을 통한 습득과 일반적 사회관성에 물들어가며 공고화되는 형태로 규정화되었다.  그것을 달리 생각하려 하자면 개별적인 노력으로 따로 찾아보지 않는 한, 다른 생각의 기회조차도 접할 수 없다.  그렇게 자연스레 인식된 사고의 방식은 실은 기득권의 유지를 위한 수단이자 그런 유지를 가능케하는 일반적인 생각의 흐름을 공고히 한다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우리는 최근에서야 조금씩 깨달아간다.  


  작가는 그런 공고화된 사고의 흐름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들이 실은 그렇지 않거나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넌지시 제기한다.  세상은 이야기가 지배한다고 믿는 작가답게, 그 방식은 우화를 통해서이다.  때로는 이야기로 때로는 그림으로 작가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조용하게 풀어나간다.  이야기하고자 하는 대상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세상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중심에 놓는다.  약하거나 또는 소수이기에 소외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을 중심에 놓고 이들이 왜 부당한 소외를 받고 있는가, 또는 이들이 소외되는 과정은 어떠한가를 이야기한다.  때로는 너무 세밀하고 구체적이어서 우화가 가지는 은유나 비유의 감칠맛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작가가 제기하는 문제의식과 균열을 만드는 방식은 존중되고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어보인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대부분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에 실리기도 한 작품들이다.  한가지 기억나는 에피소드는 긍정만을 심어주던 천사를 죽이는 노인의 모습에 항의가 많았다는 후문이었는데, 이유는 아이들이 보는 내용에 천사를 죽이는 장면이 가당하냐는 것이었다.  고난일 수 밖에 없는 삶에 무조건적인 긍정만을 심어주던 천사에 대한 분노가 과연 잘못된 것일까?  그리고 그 분노의 행위에 심어진 현실성은 과연 아이들이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었을까?  그보다도 더한 현실적 부정성이 이미 아이들의 눈에 노출되어 있는 세상에, 그런 이미지적 우화에 분노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현실적이지 못한 사람들일 것이다.  그것은 역시나 공고화된 사고의 흐름 탓이다.  사람이 대를 이어 살아갈 만한 세상을 위해서,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한 일임을 증명하는 에피소드였다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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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갇힌 사람들 - 불안과 강박을 치유하는 몸의 심리학
수지 오바크 지음, 김명남 옮김 / 창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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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라는 것과 몸 안에 깃든 영혼이라는 것을 달리 분별해낼 수 있을까?  사실 몸과 영혼을 다르게 생각하기도 어려운 일이지만, 두가지를 분리한다 하여도 몸이 먼저인지 영혼이 먼저인지 판단하는 일은 상당히 난해한 일이다.  그렇지만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 이어 수지 오바크의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내 머리속은 몸과 영혼을 달리 생각하기에 조금은 익숙해진 느낌이다.  신경과 의사인 올리버 색스는 정신병적인지 그저 조금 독특한 행동인지 모를 한 인격을 신경계의 미세하거나 독특한 변화나 손상에 연관시키려 노력하지만 그 자신이 종종 환자들에게 영혼이 있을까 하는 의심 형식으로 몸과 영혼에 대한 분리의식을 표현한다.  그에 비해 이 책은 성장과 환경에 영향을 받은 한 인간의 영혼이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형태를 논하며 몸과 영혼을 간접적인 방법으로 분리시킨다.  그리고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몸에 대한 욕구의 다양한 모습을 이야기한다.


  이 책은 성형이라는 사회적 광기와 열풍을 비판하며 한국의 젊은 여성들의 성형열풍을 언급하기도 하여 알려진 책이다.  그러나 이책의 본질적 모습은,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과 욕구에 대한 정신심리를 분석한 책이다.  다 읽고난 후의 한탄은 겉표지띠의 문구와 더불어 책을 소개하는 여러 글들의 본질에 대한 언급이 없는 일률적인 성형비판 때문이었다.  이런 사회과학 분야의 서적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과연 이런 모습일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저자는 성형을 무조건적으로 부정적으로 보거나 비판만 가하지 않는다.  전쟁의 폭력속에서 손상당한 신체를 복원하는 시도에서 시작한 성형의 근본은 정신심리학적으로도 자신의 몸을 바꿈으로써 긍정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성 정체성에 곤란을 겪는 이들의 성전환 수술등이 그렇다.  하지만 자신의 다리가 너무도 거추장스러워 절단하기를 바라는 등의 정신심리학적으로 부정적인 모습도 존재하여, 성형이라는 실제기술론적 기법과 정신심리학적인 분석은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다양한 스펙트럼과 실질적 인용례가 존재한다.


  전세계적으로 획일화되어가는 미인에 대한 기준은 지구상의 대부분의 이들에게 성형수술을 유도한다.  이것은 단지 사회심리학적 차원에서 비판의 대상이다.  브라질의 유방확대술에 대한 정부지원이라던지, 성형이 산업화되어 하나의 유행으로까지 유도된 우리나라의 모습은 매스미디어로 대표되는 외부 영향에 의해 자신이 바라보는 몸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고 그 과정에서 발현되는 불만에 대한 결과이다.  이것은 끊임없는 부정적 피드백으로 작용하여 결국 자신이 인식하던 자아의 모습은 사라지고 획일화된, 구분할 수 없는 천편일률적인 판박이의 모습들 속에 포함되면서 자신만의 모습에서 찾아가던 심리적 안정은 획일화된 다수에 편입되는 방법을 통해 획득하게 된다.  이는 다른 측면에서의 사회적 부작용을 낳게 되는데, 다수의 '미인'에 포함된 사람들과 선천적, 경제적 여건에 의해 포함되지 못한 사람들의 계급적 차이가 발생되고, 이 역시 부정적 피드백으로 작용하여 사회적 활동에 참여여부의 기본조건으로 자리하게 된다.  현재의 한국사회가 대표적이다.  예쁘지 못하고 날씬하지 못한 사람들은 아무리 능력이 뛰어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일을 해야만 하거나 회사의 이미지를 위해 당연히 사표를 내야만 하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을 바라보는 시선속에서 발생하는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으로의 성형이라는 내용은 상당히 신선하고 흥미로운 내용이었다.  성형을 마냥 부정적으로만 바라보고 있었던 나의 이성에 판단의 새로운 기준을 제시해주기도 하였다.  하지만 나의 성형에 대한 비판은 사회심리학적으로, 또한 자본시스템 안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그리고 그 비판은 현재의 한국사회에서 상당한 비중감으로 자리할 수 있다.  자본과 유통이 독점화된 대표적인 형태가 재벌기업과 대형마트이고 다양성을 통한 사회구성원의 보편적인 생존법은 이들을 해체하는 일이듯이, 미적 기준의 획일화를 깨뜨림으로서 우리는 다양한 인간 객체의 인격적 존중을 통해 서로가 공존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할 수 있다.  앞서 말했듯이 미적 기준의 획일화는 계급적, 경제적 분리를 통한 불평등을 낳기 때문이고 이런 논리의 궁극적 증명을 지금 우리사회가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형의 긍정적인 기능역시 존중받아야 하지만, 성형이라는 하나의 분야에 있어 우리사회는 그 순기능과 관점을 너무도 왜곡시키고 있다.  성형은 자신의 몸에 대한 인식의 테두리 안에서 다루어져야 할 보조적인 방법으로 존재할 때, 가장 적확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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