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삶을 만나다
강신주 지음 / 이학사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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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익숙함은 무료한 반복으로 채워진다.  반복은 너무도 매끄럽게 이루어져 인식의 마찰을 불러일으키지 않는다.  단지, 가끔씩 다가오는 사소한 자극은 일상의 소소한 감정이나 감성을 불러일으킬 뿐, 사유를 유도하지 않는다.  반복의 미학이라면 미학이랄까..  익숙해짐의 극대화가 만들어내는 같은 방향성의 극대화는 마지막에 가서 탈출이나 회피의 의지를 만들어 낼 뿐, 과정안에서 생각의 기회를 만들지 않는다.


  철학이 낯선 이유, 그것은 제도교육 안에서 만남의 기회조차 가지지 못한 채, 사회시스템이 만들어내는 극대화된 동일방향성의 반복 안으로 빨려들어가기 때문일 것이다. 생각함을 철학의 기회로 이해한다면, 반복의 피로는 생각의 기회가 될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생각함으로 철학의 기회를 철학의 시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인가.. 저자는 거리두기를 제안한다.  내 주변의 것들과 나를 거리두기, 사회를 타자화 함으로 또는 나를 사회에서 타자화시킴으로서 거리를 두고 바라보기.  그러다보면 신기하게도 익숙했던 모든 것들이 낯설게 보여진다.  철학은 이렇게 시작되고 생각의 깊이는 여기서부터 만들어진다.


  거리두기는 단순한 외면이 아니다.  거리두기는 자신의 내면을 돌아보게 하고 나와 거리를 둔 대상을 더 깊이 바라볼 수 있게 한다.  서로 사랑한다는 이유로, 친하다는 이유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아래, 하나가 되었다는 마음으로 움직이다 상처받아 본 사람들은 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독재시대의 경험뿐만 아니라 패거리문화같은 동일성을 중시하는 사회를 살아온 사람으로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생각의 기회를 박탈하고 같은 발자국으로 다니다가 한두번의 틀어짐으로 얼마나 깊은 상처와 낙오감을 느끼게 했던가.


  저자는 거리두기의 대상을 우리가 아주 익숙해서 대상으로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까지 대상화시킨다.  가족, 국가, 그리고 공기와도 같이 우리를 감싸는 시스템 자본주의까지..  역시 너무 익숙해서 바라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대상들을 들여다봄으로서 익숙함의 이면에 존재하는 비판적인 모습을 밝혀낸다.  이 작업은 결국 철학은 혈연에 따른 공동체, 국가라는 합법화된 폭력, 그리고 자본의 불합리성 안에 존재하는 여러 사상의 근원이자 바탕임을 증명하는 작업이다.  낯설면서도 철학은, 은연중이라도 우리의 삶 안에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거리두기를 통해 철학을 이해한다는 것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는 삶의 자유로움을 말한다.  생래적으로 익숙함이 배어버린 대상들과 사회의 정형화된 틀을 통해 고착화된 삶을 모든 것들과 거리를 둠으로서 생각을 자유롭게 만드는 작업.  이것은 행동과 판단을 자유롭게 만들 것이다.  물론 현실의 많은 요소는 생각의 자유로움만으로 해결되는 것은 아니지만, 익숙함의 순간순간에 피로한 자신을 되돌아보며 '어떻게 할 것인가'라는 고민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는 개인으로부터 시작되는 이러한 현상에서부터 시작한다 이야기한다.


  철학이 누구의 사상이고 법칙이고 하는 것은 어려운 철학자들의 교과서에나 나오는 내용이다.  물론 이런 내용을 알기쉽게 정리해주는 책도 많지만, 이 책의 의미는, 철학은 그리 어려운 것은 아니며, 개인의 삶 속에서 생각을 토대로 만들고 세워나갈 수 있는 친숙한 것임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삶 속에 존재하는 철학적 가치를 이렇게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책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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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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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통념과 이론이 포용할 수 있는 변화의 정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세상은 분명 끊임없이 변화했고 변화해간다.  변화의 가속도를 알 수는 없지만 이제껏 기존의 통념과 이론으로 쌓아올린 철학으로 지금의 세상을 해석하려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다르다.  세상은 과거의 철학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변해버렸음을 느끼게 된다.


  면역학으로 설명되는 대상의 분명한 구분, 그것은 과거의 세상이었다.  너와 나, 착취와 피착취, 동과 서가 분명하게 구분되었던 분명한 이질감이 존재하던 사회는 서서히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너와 나의 구분, 착취 피착취의 구분, 사상의 경계는 이제 불분명해지고 딱히 구분짓거나 경계지을 수 없는 대상들이 서로 엉켜 어딘가로 함께 굴러가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저자는 이를 긍정성의 과잉시대로 표현한다.  언뜻 듣다보면 이는 무척 긍정적인 표현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저자의 단어사용은 무척 역설적이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신이나 서로간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양산한다.  결국 사상과 경계가 모호해진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거나 피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결과를 낳는다.  저자가 사용하지 않은 단어이지만 이를 파시즘적 현상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환경 하에서의 파시즘적 경향의 농밀화는 존재와 대상이 모호해진 자신과 대상들이 뒤엉켜 어디론가 가파르게 굴러가게 만든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 또는 개인적인 표현에 따라 파시즘적 자본주의는 결국 피로와 우울을 양산한다.  이는 과거 면역학적으로 대상과 사상의 경계가 분명했던 긴장의 시절보다 더욱 깊은 피로와 우울이다.  하지만, 다시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피로를 긍정적으로 요구한다.  가파르게 굴러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볼 시간을 가지게끔, 피로의 발생을 활용하도록 주문한다.  그러니까 수동적 피로는 위험하지만, 능동적 피로는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현실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성의 과잉으로 발생하는 사회의 피로도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 시작은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야기한다. 


  책은 얇지만 내용은 무척 어렵다.  쉽게 읽히지도 않는다.  번역의 문제일까?  읽다보면 단어의 사용이 무척 비유적이면서도 역설적인데다가 개념의 정립을 곳곳에서 요구당한다.  저자는 철학적 화두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각과 개념을 제시한 듯 하다.  이는 세상이 이전의 철학이 논의되던 때와는 매우 변화하였음을 논증하는 작업이기도 한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논증을 한나 아렌트, 프로이트, 푸코등의 사상과 철학이 현재의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으로 비판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어렵더라도 찬찬히 읽어보면 다양한 관점에서 이제껏 접해온 이해와는 다른, 한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조금 어려워서 일말의 배경적 이해와 지식이 없으면 무턱대고 읽을만한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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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속에서 자라난 평화
강정마을회 지음 / 단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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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에 발을 디디는 일은 마치 순례와도 같다.  수많은 정보와 소통수단을 통해 강정의 소식을 듣고 한달에 한 번씩 방문하여 변화와 분위기를 느끼는 일이나, 이렇게 책을 통하여 내가 볼 수 없는 또는 바라보지 못했던 내면을 알게 되는 일은 마음 어딘가에 깊이를 하나하나 쌓으며 기도하는 일이다.  쌓인 기도는 마치 지층과도 같다.  과거의 어떤 날은 너럭바위의 부드러움과 바람에 실린 파도의 거침이 만나는 자연의 감동이었다.  어떤 날은 중덕삼거리가 막히고 구럼비가 파괴되는 아픔이었다.  어떤 날은 막무가내의 폭력앞에서의 아픔이었고, 세상의 변화 앞에서는 막연한 기대였다.  그리고 기대와 다른 변화는 허탈함이었다.


  누군가의 강연을 만나는 날엔 평화의 의미를 깨닫는 날이었다.  성토를 듣는 날엔 현실에의 암담함이었고 누군가의 글은 안타까움이었다.  그리고 먼 과거의 역사를 지금의 현재에 끌어들여 이어지는 트라우마의 아픔을 듣는 일은 시공간속에서 현상의 입체감있는 이해를 만들어내는 작업이었다.  이 책을 통해서 만들어진 그런 이해는 기도의 지층을 한 층 형성하는 일이었다.


  4.3의 트라우마를 현재의 강정에 끌어들이는 일은 어떤 면에서는 잘 맞지 않을 수도 있다.  살아있음이 죄로 죽임을 당해야했던 시대와, 공사방해를 했다는 이유로 고착을 당하고 고소와 연행을 통해 구속이나 벌금형을 받는 현재가 같을 수는 없지만, 하나하나의 가족사에 공권력의 폭압이 아픔과 막연한 두려움으로 새겨진 사람들의 공동체가 오랜 시간 후에 다시 공권력을 마주하는 일은, 각인되었던 두려움이 어쩔 수 없이 가슴 한 켠에서 고개를 드는 일이며 잊고 지냈던 트라우마가 마음 어딘가에서 존재감을 강렬하게 발산하게 만드는 일이다.  사실 겪어보지 않은 입장에서 이를 이해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다.  하지만, 90세가 넘은 강정마을의 노인이 자신이 겪은 4.3과 현재의 해군기지 문제에 쉽게 말을 하지 않다가, 종이에 또박또박 죽은자의 이름까지 모조리 기억해 적어내며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의견을 적어내는 모습은, 마을공동체를 관통하는 과거의 트라우마와 현재의 아픔이 얼마나 깊고 거대하며 심정적인 연결선이 얼마나 굵고 질긴지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깨닫게 해 준다.


  책은 가볍다.  읽기도 부담스럽지 않다.  하지만, 씨줄과 날줄처럼 엮인 과거와 현재의 트라우마를 마음으로 느끼고 난 후엔 강정에 대해 입으로 말하고 글로 쓰는 일이 조심스러워지고 부담스러워진다.  한 개인의 상처도 남이라는 입장에서는 함부로 말하기 어려운 일일진대, 길게 이어온 역사와 현재의 규모를 지닌 공동체라는 생물이 지닌 상처를 함부로 재단하고 입에 담는 것은 어떠한 말과 글이라도 상처에 생채기를 더하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부디 이 책을 읽고난 이들이여, 혹여 강정에 대해 해군기지에 대해 이런저런 의견과 생각을 말하던 사람들일지라 하더라도, 마지막 장을 덮고 난 후에는 내가 사는 세상의 아픔과 타인의 상처에 대해 한번쯤은 눈을 감고 곰곰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는 것은 어떨까?  입은 다물고 손은 모으고..  조용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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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주의자가 알아야 할 자본주의의 모든 것 - 자본주의와 환경에 대한 안내서
존 벨라미 포스터 & 프레드 맥도프 지음, 황정규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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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경주의를 논하는 입장에서 과연 자본주의와 타협할 수 있는 것들은 무엇무엇이 있을까 하는 의문과 기대는 제목을 보면서부터 들게 된다.  아무리 파괴적인 자본주의의 속성이라 할지라도 지구라는 닫힌 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행위라면 그 둘 사이에는 어떤 접점이라도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그런 기대가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책을 집어든 다음, 끝까지 읽고나면 그런 기대는 무척 순진한 발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환경주의와 자본주의는 타협의 여지가 없는, 분명한 대척지점에 존재하는 것임을 알게 된다.


  인류가 번성하기 시작하면서부터 환경의 파괴는 시작되었고 그것은 이미 오랜 역사를 지닌 행위였다.  비옥한 토양에서 오랜시간의 경작은 결국 토질과 양분을 서서히 소모시킴으로 척박한 토양으로 변화시키고 인간은 이를 보상하기 위해 개간을 함으로서 주변환경을 파괴하고 변화시켰다.  하지만 이는, 자연 스스로 회복이 가능했던 파괴였다.  척박함을 이기지 못하고 인간이 떠나면 자연은 서서히 그곳을 원래상태와 가깝게 회복을 시켰던 것이다.  문제는 산업사회와 자본주의의 시작에서부터였다.  이윤추구를 목적으로 하는 자본은, 환경은 그저 이윤획득의 자원이자 수단일 뿐, 보존의 대상으로 여기지 않았다.  '이윤획득을 목적으로 하는 자본의 속성'..  이것이 환경과 공존할 수 없는 가장 큰 이유이고, 현재의 사회는 자본의 지배하에서 환경은 무참하게 파괴당한다. 


  자본과 환경이 공존할 수 없음은 현재의 자본주의 사회가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자본주의의 번성은 환경파괴를 극대화시키고 자본주의의 후퇴는 환경파괴를 더디게 한다.  그러면 자본이 더욱 쇠퇴하게 되면 환경은 더욱 보존의 기회를 얻게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런 경우, 자본이 만들어내는 이윤에 길들여진 인간들은 그나마 보존을 위해 개발제한을 해 둔 환경-이를테면 그린벨트같은..-을 자본의 활성화를 위해 규제를 풀어버린다.  자본은 철저하게 자신의 생존과 번성을 위해 환경을 이용할 뿐이다.


  환경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된 존재임은 이미 상식이다.  하지만, 자본과 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상식적인 일들을 애써 외면한다.  우리는 이미 지난 5년간 녹색분칠을 통해 겉모양만 그럴듯하게 치장해놓은 토건자본의 만행들을 익히 보아왔다.  좀 더 적극적으로 자본과 환경의 타협점을 찾으려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제임스 러브록같은 환경과학자는 청정에너지의 대안으로 원자력을 옹호하기도 했다.  하지만 우리는, 후쿠시마 사태를 통해 더이상 원자력이 안전하지 않다는 것을 생존의 위협을 느껴가며 깨달았다.  이 책에서도 주장하지만, 우리가 환경의 위기를 통해 생존의 위협을 느낀다면 작은 행동에서부터 시작하여 자본에 반기를 드는 생태혁명을 준비하는 수 밖에 없다.  타협점은 존재하지 않는다.  웬델 베리가 추구했던 지역적으로 지속가능하고 공동체 추구적인 저기술 해결책과 같은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위기를 느끼고 고민을 준비중에 있는 것인가?  현실적으로 느껴지는 거리감은 무척 크기만 하다.  세상은 그런 고민들을 마치 종말론에 빠져버린 인간의 허무를 대하듯 조롱하기만 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이 책이 과학적으로 주장하는 바와는 조금 다르게 생각해본다.  우리는 정말 우리 스스로에게 필요한 것들을 소유하며 살고 있는 것일까?  혹시 우리가 필요하다 생각하는 것들은 단지 편리를 위한 것들이 아닐까?  필요와 편리를 구분해야만 한다.  그리고 단지 편리만을 위한 소유라면 그것을 과감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자본의 폭주를 제지시킬 것이며, 필요한 것들이 소유의 대부분을 채우는 삶이라면 그것은 자본의 효율을 최악으로 떨어뜨리는 사회가 될 것이다.  동시에 이는, 환경에 가장 도움이 되는 형태의 사회일 것이며 이 지점에서 우리는 생태적인 삶에의 구체적 고민을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공존과 지속은 그렇게 함으로써 가능해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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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산드라의 거울 1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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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를 바라볼 수 있고, 미래를 바꿀 수만 있다면, 인간의 삶은 과연 행복하고 정의로울 수가 있을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상상력과 필력이라면 이 화두에 대한 나름의 결론을 명쾌하게 정리할 수도 있을 것 같다는 판단을 해 보지만, 그도 두 권이라는 방대한 양의 이야기 안에서도 정리를 하지 못했음을 보면, 그건 정말 말 그대로 방대해서 쉽게 말하거나 결론내릴 수 없는 어려운 화두인 듯 하다.  그래서 그런지, 이 소설에 대한 평을 미리 꺼내놓자면, 개연성이나 인과관계에 있어 비교적 허술한 화두만 쌓이고 쌓이다 마는 이야기로 그치고 만다.


  나비효과라는 것이 있다.  지구 어느 한 편에서 가볍게 팔랑이는 나비날개가 일으킨 기류의 움직임은 지구 반대편에서 폭풍이 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이 이론을 일종의 평면 위의 공간적 연결관계를 넘어 시간의 공간관계에 대입해보자면, 미래를 바라보고 미래에 일어날 일에 조절을 가한다면, 그 결과는 과연 긍정적인 모습일까 아니면 부정적인 모습일까?  저자는 이 의문에 다양한 모습을 상상을 통하여 보여준다.  예를 들어, 냉동된 채로 몇백년을 지내다 깨어나 미래세대의 아이들 앞에서 미래의 환경을 파괴할 만큼 자연을 함부로 써버린 전 세대를 대표하여 사형선고를 받는다던지, 과거 트로이의 목마를 막아낸 결과 그곳은 지중해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가장 번성한 교역의 장소가 되어있다던지 하는 대목들이 있다.  하지만, 역시 화두의 방대함 때문일까?  파리에서 왜 폭탄테러등의 일이 발생하는 것인가? 라는 이유는 차치하고서라도 카산드라가 테러를 예견하고 폭탄을 제거한 행위의 결과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달라지는가에 대한 묘사는 전혀 없다.  그것이 수차례 이루어짐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현재의 복잡한 세상만사에 편입되어 일어나는 현상의 변화에 대해서는 어느 누구도 알 수 없음을 부러 설명하려 했던 것일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화두의 방대함과 방대함때문에 이런저런 방향으로 갈라지는 고민은 결국 소설의 개연성이나 구조를 무척 엉성하게 만든 느낌이 있다.  그러다보니 치밀함은 미래를 정교하게 예측하는 능력이 있는 카산드라의 오빠가 자살하면서까지 곳곳에 남긴 예언의 쪽지에서나 느껴질 뿐, 소설속의 현실안에서는 사건의 연계나 인과관계가 너무 허술해보인다.  한가지 더..  작품 밖의 이야기를 하자면, 그림을 그린 홍작가님의 그림스타일인데, 홍작가님의 웹툰을 본 사람들이라면 알겠지만, '도로시밴드'와 '고양이장례식' 이후에 그린 작품속의 그림들은 점점 선이 간단해지면서 강렬해지는 지점을 느낄 수 있다.  이후의 '화자'나 현재 다음에서 '연재중인 안되는 건 안되는 거다'를 감상한다면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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