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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김태환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3월
평점 :
세상의 모든 것을 나름의 방식으로 설명하는 통념과 이론이 포용할 수 있는 변화의 정도는 과연 어디까지일까? 세상은 분명 끊임없이 변화했고 변화해간다. 변화의 가속도를 알 수는 없지만 이제껏 기존의 통념과 이론으로 쌓아올린 철학으로 지금의 세상을 해석하려 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의 느낌은 다르다. 세상은 과거의 철학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설명하기에는 너무 변해버렸음을 느끼게 된다.
면역학으로 설명되는 대상의 분명한 구분, 그것은 과거의 세상이었다. 너와 나, 착취와 피착취, 동과 서가 분명하게 구분되었던 분명한 이질감이 존재하던 사회는 서서히 그 경계가 모호해졌다. 너와 나의 구분, 착취 피착취의 구분, 사상의 경계는 이제 불분명해지고 딱히 구분짓거나 경계지을 수 없는 대상들이 서로 엉켜 어딘가로 함께 굴러가는 모습으로 변화했다. 저자는 이를 긍정성의 과잉시대로 표현한다. 언뜻 듣다보면 이는 무척 긍정적인 표현인 것처럼 들리지만 사실 저자의 단어사용은 무척 역설적이다.
긍정성의 과잉은 자신이나 서로간의 존재를 파악하지 못하게 만드는 부정적 효과를 양산한다. 결국 사상과 경계가 모호해진 세상은 서로가 서로를 착취하거나 피착취의 대상으로 여기고 스스로가 스스로를 착취하는 결과를 낳는다. 저자가 사용하지 않은 단어이지만 이를 파시즘적 현상이라는 단어로 바꾸어 생각해보면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환경 하에서의 파시즘적 경향의 농밀화는 존재와 대상이 모호해진 자신과 대상들이 뒤엉켜 어디론가 가파르게 굴러가게 만든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긍정성의 과잉, 또는 개인적인 표현에 따라 파시즘적 자본주의는 결국 피로와 우울을 양산한다. 이는 과거 면역학적으로 대상과 사상의 경계가 분명했던 긴장의 시절보다 더욱 깊은 피로와 우울이다. 하지만, 다시 역설적이게도 저자는 피로를 긍정적으로 요구한다. 가파르게 굴러가던 길을 잠시 멈추고 뒤를 돌아볼 시간을 가지게끔, 피로의 발생을 활용하도록 주문한다. 그러니까 수동적 피로는 위험하지만, 능동적 피로는 스스로 만들어내야만 하는 현실을 주문하는 것이다. 그것이 긍정성의 과잉으로 발생하는 사회의 피로도를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며, 그 시작은 시스템이 아닌 개인의 차원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야기한다.
책은 얇지만 내용은 무척 어렵다. 쉽게 읽히지도 않는다. 번역의 문제일까? 읽다보면 단어의 사용이 무척 비유적이면서도 역설적인데다가 개념의 정립을 곳곳에서 요구당한다. 저자는 철학적 화두라는 점에서 새로운 시각과 개념을 제시한 듯 하다. 이는 세상이 이전의 철학이 논의되던 때와는 매우 변화하였음을 논증하는 작업이기도 한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 논증을 한나 아렌트, 프로이트, 푸코등의 사상과 철학이 현재의 시대에서는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지니고 있음으로 비판하는 방식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사회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조금 어렵더라도 찬찬히 읽어보면 다양한 관점에서 이제껏 접해온 이해와는 다른, 한 단계를 넘어선 새로운 시야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불만이라면 불만이다. 조금 어려워서 일말의 배경적 이해와 지식이 없으면 무턱대고 읽을만한 텍스트가 아니라는 점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