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소리를 보았네
올리버 색스 지음, 김승욱 옮김 / 알마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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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시작하기가 쉽지 않다.  너무도 익숙해서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던 '말하는' 기능을 청각장애인들의 입장에서 다시 생각하기란, 근본에서부터 아주 다른, 완벽히 새로운 개념영역이기 때문이다.  보편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생성되는 새로운 개념영역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 전혀 다른 공간의 영역이기에 이해는 더더욱 어렵다.  그래서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쓰는 독후감에 나의 이해가 제대로 녹아들어 있는지 스스로 판단하기가 어려워진다.


  귀와 입은 신호의 입력과 방출의 기능으로서 상호작용하는 기관이다.  즉, 귀로 들어오는 소리자극을 입으로 소리를 냄으로서 반응하게 되는데, 청각장애인들은 귀로 들어오는 자극이 차단됨으로서 입으로 내보내는 반응력을 동시에 상실하게 된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그들은 결국 수화를 배워야만 하는 장애우가 될 수 밖에 없다.  그것이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간에 말이다.  이게 보통의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청각장애인의 모습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너무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들에게 수화는 그들의 훌륭한 의사표현 수단이지만, 우리는 그들만의 수화세계가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단지 소리로 표현되는 언어를 수화로 번역한 제도수화가 있다는 정도의 이해만 있을 뿐, 그들에게도 그들끼리의 자생적인 수화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이다.  한반도에서 한국말이 자생되어 나타났고, 영국에서 영어가 자생되었으며, 러시아, 동남아 등에서 자신들만의 언어가 발생했듯, 청각장애인들도 그들끼리 만나 교류하면서 지역마다 독특한 수화가 발생했다.  제도수화는 단지 듣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과 그들을 잇기 위해 만들어진 약속기호일 뿐, 자생적인 수화와는 차이점이 있다.  결국 그들만의 공간과 문화를 우리는 소수자라는 이유로, 또는 이해하지 못해 존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수화는 독특한 면이 있다.  상대방과 집중하듯 서로 마주보며 턱과 입모양, 팔 그리고 손가락이 3차원 또는 4차원 공간에서 펼치는 화려한 움직임은 그들로 하여금 놀라운 집중력과 공감각을 발달시켰다.  감각기관을 잃은 대신 다른 감각이 예민해지고 발달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각기 다른 수화권에 살면서도 처음 만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뜻을 서로 알아차리고 대화가 가능해진다는 점도 독특하다.  한국말을 하는 한반도 사람과 영어를 하는 영국사람이 처음만나면 전혀 대화나 이해의 교류가 불가능한데 말이다.  선천적 청각장애와 후천적 청각장애 역시 다르다.  후천적 청각장애는 소리언어의 이해감각력을 지닌채 수화를 하지만, 선천적 청각장애는 전혀 다른 이해력, 공감각력을 지닌다고 한다.  그래서 뇌의 활용부위도 전혀 다르다고 한다.  그러니까 그들은 전혀 다른 사고체계와 지각력, 그리고 근본적으로 매우 다른 그들만의 문화와 이해가 발생할 수 밖에 없다.  


  그런 그들을 듣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은 인간의 존엄이 중시되는 사회인지라 그렇지 않았지만, 이전의 그들은 단지 듣고 말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정박아 취급을 당했다.  지금에서는 그들의 발달된 다른 감각과 사고력을 존중하고 활용의 기회가 주어지긴 하지만, 여전히 그들은 이해받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만의 세계가 필요했다.  저자가 말하는 그들만의 조용한 수다, 조용한 소음..  수많은 청각장애인들이 만나 소리없이 서로 만들어내는 눈빛과 팔의 화려한 향연은 그들이 일상의 공간에서 얼마나 이해받지 못해왔는가에 대한 반증이었다.  그들만의 공간에서 느끼는 안도감과 해방감은 그들이 존중받아야 하는 문화와 이해가 있음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 그들의 문화와 공간까지도 듣고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이 통제하려는 시도는 이 책에서도 소개된다.  여전히 그들은 도와주어야만 하는 약자이자 소수자로서 이해하던가 이해되어야만 하는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공지영의 소설 '도가니'에 소개된 농아학교의 실제사건이 존재했다.  


  쉽게 나의 느낌을 적어내지 못한 것은 내가 여전히 그들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알기 때문이다.  너무도 새로운 그들만의 세계와 공간을 만났기에 마음은 놀라움 자체에서 쉽게 더 나아가지 못한다.  그만큼 내가 인간의 영역에서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세계가 존재함을 몰랐던 것이고, 그들은 여전히 이해와 존중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었다.  수화를 배우자는 운동이 얼마전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수화를 통해 청각장애인들과의 대화는 어느정도 가능하겠지만, 우리는 수화너머의 그들의 세계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어쩌면 수화의 세계를 이해한다는 일은 '대단히 충격적인 사건'이라는 표현이 잘 어울릴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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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동 더하기 25 -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조은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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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기억속의 우리집과 우리 동네는 그리 풍요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뒷산에서 한두 집 아래에 위치한 작은 집의 뒤칸 단칸방에 세들어 살았던 때의 기억은 4살 부근의 기억임에도, 생각나는 건 하루의 반나절은 물이 나오지 않아 커다란 통에 물을 담아서 사용해야만 했다.  동네를 거미줄같이 가르던 좁고 미로같은 골목을 10분 이상 헤매야만 조금 큰 길이 나오며 버스정류장을 만날 수가 있었다.  다음 이사한 동네는 도심이긴 했지만, 공동화가 진행되며 슬럼에 가까운 곳이었다.  조금씩 키가 커짐에 따라 또렷해지는 기억속의 사람들은 집에서 인쇄소를 차려놓고 낮이면 주변집들이 울릴정도의 진동과 소음을 발생시키던 집, 집에서 수제로 구두제작을 하며 술마신 날의 밤이면 가족들 공포에 떨게 만들던 아저씨,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보에 쌓인 아기를 안은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 온 동네를 뒤집어놓았던 어느 집의 형, 아들을 낳기 위해 열 한명의 자식을 낳았던 어느 아주머니, 지적장애를 앓던 뚱뚱한 누나..  

 

  지금은 첫번째 동네는 재개발이 되어 20층이 넘는 아파트가 들어선 대단지가 되었고, 두 번째 동네는 동네 한가운데로 도로가 생기며 동네의 모습을 확연하게 바꾸어 놓았는데, 내 기억속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나 역시 알뜰했던 부모님 덕에 떠난자가 되어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릴적에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동네를 감싸고 있던 소박한 우울함과 무언가에 억눌려 해결하지 못하는 욕망이 뒤섞여 있던 특유의 분위기를, 이제는 애써 다시 느껴보려 해도 느낄 수 없는 처지 또는 여건에 살고 있게 되었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어떤 기준에서의 가난이나 빈곤에서는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과연 가난이나 빈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물론 그걸 굳이 잘 이해하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어린시절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우울의 기분을 과연 가난과 빈곤에의 처절한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나의 경험이 가난과 빈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는 가끔씩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글이나 말로 표현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정말 가난했던 것일까?  이 책을 읽고나서 그 의문은 더욱 강렬해진다.  

 

  오스카 루이스라는 사람은 '산체스의 아이들'이라는 책에서 '빈곤문화'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당연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을 저 단어는 마치 빈곤은 인간사회에서 빈곤이나 가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부류들이 존재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개개인이 가진 성정이나 성향때문에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듯한 저 말은 뒤집어보면 자본주의라는 설정된 불평등구조 안에서 가진자가 내세우는 논리로 활용되기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저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빈곤문화'라는 단어에 대한 비판을 위한 실증이나 다름없다.  가난이나 빈곤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교육과 경제사회적 활동기회, 그리고 개인사생활에 있어 제약과 제약의 누적을 의미한다.  이 책 안에서 설명되고 이해되는 가난의 모습 속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것은 개인적 욕구의 제약이었다.  환경과 경제, 그리고 정서 등등의 모든 것이 제약된 상태에서 동시에 억제된 개인의 욕구는 분출방식이 매우 비현실적이다.  사랑은 현실의 도피수단이고, 생각없는 소비는 잠시나마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은 유혹에의 넘어감은 잠시나마 희망을 가지게 만든다.  결과는 너무 이른나이의 동거와 출산, 모이지 않는 돈과 재산, 그리고 법률적 구속으로 가난과 빈곤을 이어가는 상황이 되지만, 동시에 욕구는 다시 억압당하고 억압당한 욕구는 비현실적으로 분출되는 악순환을 거친다.  가난과 빈곤은 누적되면서 누적되지 않는 인간의 욕구는 때마다의 비현실적 분출을 통해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빈곤문화'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을 보여준다.  처절하게 제약을 이겨낸 사람들은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후대를 통하여 해방감을 얻어낸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현실적 기회가 주어졌다면, 남들과 공평한 선에서나마 설 수 있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발논리가 지배하고 희생자를 요구하며 자본의 불평등을 받아들인 사회에서 그들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당동 재개발 25년의 기록은 이를 분명하게 증명해내고 있었고, 그 구조는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마무리된다.


  읽는 내내 글의 독특함이 많이 느껴졌다.  논문의 느낌도 상당히 많았지만, 묘사와 서술이 그렇다고 차갑지 않았다.  게다가 연구자의 성찰과 고민까지 있는 그대로 들어있어 현장에서의 기분과 감정의 흐름까지도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25년간 그들을 관찰하며 상당한 의미를 간직한 결론과 수많은 현상들에서 자신의 성찰을 이끌어내었다는 사실이다.  사회사상적으로 지적하고 결론내리는 일도 없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깨닫고 느낀 것 그대로 기록하며 담담하게 현상을 통찰로 연결시켜 이해했을 뿐이다.  그 오랜시간 동안 지쳤다는 기색도 전혀 없다.  연구자의 기록이지만, 같은 생활인으로서의 묘사와 감정 그리고 중립적 객관이 모두 담겨있다.  이 기록은 마치 수도자의 고행이나 수양과도 같은 것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내가 가난을 처절하게 이해하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내가 가난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가난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앞에서 다시금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이 질문들 앞에서 난 여전히 명쾌하지 못하다.  그것은 나의 어릴적 경험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었을, 그 공간에서 벗어나 더 이상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어떤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무엇'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부분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온전한 나의 것은 아니기에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지만, 가난의 바깥에서 스스로 가난의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정리하여 성찰을 말하는 저자의 노력과 결실은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고 존경스럽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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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을 이룬 나라 기쁨을 잃은 나라
다니엘 튜더 지음, 노정태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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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자의 시선으로 우리의 모습을 이야기듣는다는 것, 또는 타인에 의해 나의 모습을 이야기듣는다는 것은, 때로는 기분이 그닥 좋지 않은 일일 수 있지만 대체로는 내가 몰랐던 나 자신이나 우리의 모습을 객관적이고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은 일종의 각성이기도 하다.  나 또는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들에 적응하여 무감각해져버려 어떤 의식도 작용하지 않을때, 각성은 감각을 깨우고 되살려 주변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타인이나 타자에 의한 각성은 나 또는 우리의 삶이 무뎌지거나 고리타분해지거나 꼰대가 되어가는 현상을 견제해 줄 수 있는 훌륭한 기제가 될 수 있다.


  다른 각도로 보자면, 나 또는 우리의 이야기를 하는 타자나 제 3자는 이야기를 듣는 입장에서 보면 말하는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이나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그가 나 또는 우리에게 부정적이고 비판적이기만 한지, 아니면 비판은 하지만 애정이 느껴진다던지 하는 짐작 말이다.  상호교류의 측면에서 보자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서로가 공감하고 애정을 가질만한 관계로 발전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말이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이 책의 저자는 한국에 대한 애정이 무척 깊은 듯 하다.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한반도의 역사까지 공부해서 논리적으로 풀어나가는 과정은 어떤 한국인에게는 어려운 일일 수 있는데 제 3자적 입장에서 능수능란하게 해내는 것을 보면 말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힘을 잃지않고 적당한 깊이로 꾸준하게 이어나가는 필력과 한국에 대한 이해는 정말 감탄할 만 했다.  그의 한국에 대한 사랑과 애정의 깊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몇가지 거슬리는 내용은 어쩔 수 없이 존재한다.  천안함 사건을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모습이나 지난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좌파진영이라 말하는 것은 좀 더 깊은 사고가 필요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경제관련분야에서 일한 사람답게 경제부분을 이야기할 때에는 좀 더 명쾌하고 경쾌한 흐름을 느낄 수 있었는데 한국근대사의 경제적 측면을 너무 비화에 치중하여 흥미위주로 풀어놓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저자가 수많은 인터뷰를 통해 만들어진 책인데, 인터뷰 대상자들의 대부분이 평범한 사람들이거나 정서상 일반론의 범주에 들수 있는 사람들이라 좀더 정직하고 신뢰할 수 있는 내용들로 채워질 수 있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편향은 존재했다.  비유적으로 표현하자면, 그가 서술과 사고의 기준을 조금만 좌측으로 옮겨서 인터뷰이들을 선정하고 만나러 다녔다면 쉽게 드러나지 않는 한국사회의 이면들을 접하며 이야기가 좀 더 깊어지고 객관적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다.


  사실 사회의 흐름과 변화에 대해 조금의 관심이라도 있는 한국인이라면 이 책의 내용은 일반적으로 이해되는 내용이고 그 수준에서 약간의 깊이를 더한 정도일 것이다.  어찌보면 리트머스 시험지같기도 하다.  이 책의 내용을 보고 화들짝 놀란다면 과연 나는 우리사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고민을 해봐야 할 것이고, 조금 심심하다면 저자가 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나의 사고는 어떤 편향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저자와 함께 K-POP이라는 문화나 음악이 생산되고 관리되는 방식에 대해 좀 더 깊은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다.  아쉽게도 그가 그 분야 관계자들을 만날 수 없었다니 더 이상 객관적으로 이야기를 할 꺼리들이 만들어지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여튼, 이 정도로 한국사회를 깊이있게 이해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갈 수 있는 외국인이라면 정말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다.  애정어린 비판은 앞에서도 언급했듯 서로간의 공감과 교류를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후문으로는 그가 서울에서 직접 맥주를 만들어 파는 펍을 경영하고 있다니, 서울에 나들이 갈 일 있으면 한 번 들러봐야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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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군파 - 내부 폭력의 사회심리학
퍼트리샤 스테인호프 지음, 임정은 옮김 / 교양인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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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이념 또는 이론이 인간을 규정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였다.  이론으로 무장한 인간은 과연 인간사회 안에서 하나의 본보기가 되거나 지도자로서 역할할 수 있을까?  이론의 추구는 현상에 따른 반응으로 길을 찾아가거나 방향을 고민하던 인간 역사에 대하여, 반대의 방식으로 하나의 틀을 세운 뒤에 그 틀에 맞추어 현상을 만들어내려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현상에의 반응은 그 결과가 너무도 불투명하여 예측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주기도 했지만, 근대 인간의 역사는 어떤 면에서는 긍정적이지 못한 면만이 부각되어 왔기에 이론을 고민하는 움직임들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론에의 추구가 결과는 만들어내지는 못했더라도 그 과정에서 긍정적이었던가..  사실 이도 그렇지는 않았던 듯 하다.  자본론을 바탕으로 한 맑시즘은 대공황 이후의 전세계 노동자 대혁명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권력의 출현을 예언했지만, 노동자들은 자국 안의 정치적 움직임에서 자유롭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식민지 노동자들에 대한 연대에도 외면한 나머지, 공황에의 극복을 대투쟁을 통하기는 커녕 세계대전이라는 자본의 방식안에서 모든 것을 굴복하고 말았다.  또한 다른 이야기일 수 있지만 히틀러의 광기는 하나의 이론으로서 유대인들과 정치적 좌파와 사회적 소수자들의 학살을 불러 일으켰다.  공산주의 이론 역시 현실 공산주의는 냉전이라는 체제경쟁과 내부의 계급갈등 그리고 변형된 독재형태로서 의도가 변질되며 결국엔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추구했던 이론이 원래부터 결점과 오류를 지니고 있었던 탓일까, 아니면 자본주의 체제의 원리와 이를 바탕으로 한 권력이 너무 유혹적이고 강력해서 그러했던 것일까?  답을 내기는 어렵다.  기대가 가능한 지는 모르겠으나, 완벽한 이론은 없더라도 완벽에 가까우며 현실성 있는 이론은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적군파라는 조직은 19세기 중반의 생디칼리즘 또는 아나키즘 적인 노동자 투쟁을 닮은 면이 있다.  폭력으로 권력을 장악한 뒤에 인민을 설득시킨다는 전술을 사용했던 무리들은 알다시피 또는 당연히 실패했다.  이는 인민에 대해 사후설득이라는 이론적 오류를 지니고 있었던 탓인지 모른다.  폭력을 통해 전세계 동시혁명을 이루고 그 선봉에 자신들이 서야 한다는 적군파의 이론적 오류는 어쩌면 자명하기에 조직안에서의 참극을 불러일으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이론의 심화와 공고화를 위해 동료의 죽음을 초래하고 그것을 패배사라는 말까지 지어내며 합리화하는 과정은 지도자의 이론적 리더쉽을 넘어서는 어떤 공포스러움이다.  동시에 조직원 개개인이 이론을 위해 자신의 이성과 사고를 철저하게 개조해내야만 하고, 그 과정에서 합리적 방향성을 상실한 채 스스로가 파국의 길로 접어들어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은, 조직심리 또는 사회심리는 과연 어떻게 작동하는가 하는 고민을 불러일으킨다.  이는 아이히만처럼 무념의 상태에서 기계적으로 유태인을 말살하는 작업에 참여한 것이 아니다.  개개인이 이론을 통해 몸과 마음이 무장되기를 요구당하고 스스로도 바라고 있던 상태였다.  스스로 죽여지기를 바라고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하기까지 마음의 혼란속에서 몸이 움직이고 나중에는 그것을 어떠한 형태로 합리화시킨 이론이 제시되면 그것을 자연스레 받아들이는 그 심리는 독자의 입장에서나 바라보는 타자의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기는 하나 한가지 의문은 떠오른다. 내가 저들 안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저 심리상태에서 박차고 나와 제정신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의 적군파나 독일의 적군파를 사상적 투쟁으로만 보기엔 좀 더 깊은 지점에 대한 아쉬움이 생길 수 밖에 없다.  극좌파적 의미에서는 국가주의와 부르주아에의 대항이라는 신념을 존중할 수 있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들이 보여준 결론은 이론을 우선적으로 추구한 조직이 보여준 심리학적 기현상이다.  그리고 그것은 한창때를 낭비하고 있는 젊은이들에 대한 안타까움부터 시작해서 인민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는 전술로서 이론안에 심각한 오류가 있음을 재증명했다는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일본사회에서 좌파의 투쟁과 학생운동이 완벽한 무관심과 허약함으로 빠져들었음을 생각하면 적군파의 비극적 결과는 사상적 동일진영 안에서도 부정적일 수 밖에 없는 암적 존재일 뿐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한국사회에서 최근에 벌어진 이석기를 중심으로 한 사태는, 물론 정권차원에서의 교활한 정치적 활용수단으로서 철저하게 이용당함으로 마무리되었고, 자체적인 역량도 무척 허약하기는 했지만, 진보진영 안에서 반드시 경계해야 할 사안이었고 집단이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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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등이 답이다 - 왜 평등한 사회는 늘 바람직한가?
리처드 윌킨슨 & 케이트 피킷 지음, 전재웅 옮김 / 이후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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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계라는 분야가 사회나 과학의 수많은 현상을 해석하고 입증하는 방법으로서 많이 사용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 역시 단점과 오류를 지니고 있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논문을 위한 통계작업을 해 보았던 경험을 복기해봐도, 어떤 결과를 위해 요소들과 변수들을 이리저리 굴려댔던 일은 처음 내세웠던 가설과 전제를 뚝심있게 밀고 나가지 못했음을 반증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수많은 통계자료를 통해 하나의 전제가 일관되게 드러나고 있고, 해석이나 자료의 오류가능성에 대한 수많은 반박에 대해 조목조목 답변을 해 내놓고 있는 이 책의 내용은 결과를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객관적 힘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 신뢰할 수 밖에 없는 결과는 '불평등은 인간 개인과 사회를 아우르는 모든 영역에서 수많은 문제를 야기한다.'는 내용이었다.


  저자는 수많은 통계자료를 인용하여 위와 같은 하나의 강력한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기실은 이전부터 제기되어 왔던 인간사회의 근본적 문제를 연역적 방법으로 재증명해낸 작업이라 볼 수도 있다.  인간사회의 불평등은 자본주의 체제가 도래하면서 나타난 자연적인 현상이라 볼 수 있고, 그것이 신자유주의 체제를 통해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해석한다면, 불평등의 문제는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라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자체의 문제는 다른 표현으로 하자면 분배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은 이윤을 위해 지구환경을 파괴해 온 나머지, 이제 생존을 위한 환경문제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개발과 자원소모를 해대었지만, 동시에 심각한 분배의 불균형을 유발해 여전히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가난한 이들을 존재케 했다.  지구상의 인간은, 동시에 국가라는 어떤 테두리로 구분되어 이들을 각각 대표하는 위정자들은, 그들의 이익과 우월감을 위해 기본적인 생존의 문제가 걸린 이들을 위한 어떤 구제책도 내놓지 못하고 있고, 동시에 차고 넘칠 정도의 물질을 소유한 인간들이나 국가들은 너무 많아서 문제가 되는 개인적 사회적 부작용을 겪고 있다.  사실 이 책이 말하는 불평등의 문제를 자본주의와 분배의 문제로 치환하여 설명하기엔 너무 많은 이야기들이 있어 다시 말하기가 번거로울 정도이다. 


  이를 해결하는 대안의 문제는 참 간단하면서도 어렵다.  사람들은 편리의 문제 앞에서 타인의 어려움을 애써 망각하려 한다.  자신의 물질적 부유함이 주는 편리 앞에서 타인의 가난과 굶주림은 양심적 측면에서 기부나 적선의 방식을 택하고 말지만, 사실 그것이 답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너무 많이 가진 자가 스스로 가진 것을 포기하는 것, 그러니까 적당한 수준의 자발적 가난이 분배의 문제를 긍정적으로 해결하고 생존의 위협수준이 된 지구를 구하며, 기본적인 삶의 요구마저도 위협당하는 이들을 끌어올려 인간적 존엄을 유지케 할 것이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생리상 그것은 자연적으로 이루어질 수 없다.  인간사회가 자본주의를 포기하고 대안적 체제로 나서지 않는 한, 국가통제나 국제적 합의에 의한 규제에 동의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가 없다.  그것은 이제는 언급하기 조차 지리해진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포기하는 일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쉽게 말하여 착한 자본주의, 이것으로의 회귀와 긍정적 조율이 어쩌면 현재로서는 가장 쉬운 공존의 방법이자 합리적인 처치일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근본적인 대안과 주류경제학의 입김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대안경제체제의 존재를 굳이 여기서 언급하지 않고서 말하자면 말이다. 


  이렇게 따져들어가다보면, 이 책은 다시말해 읽기 어렵지가 않다.  연역적 해석의 장점과 통계 그래프가 주는 간편함이 이 책을 쉽게 읽을 수 있게 한다.  이를 바탕으로 설명하는 내용들은 조금의 사회적 이해가 있다면 상식선의 설명이기에 쉽게 받아들여진다.  굳이 독특함을 이야기하자면, 서양의 연구들이 보여주는 연역적 추론과 논리의 어떤 힘이 유독 강렬하게 느껴진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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