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당동 더하기 25 - 가난에 대한 스물다섯 해의 기록
조은 지음 / 또하나의문화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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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기억속의 우리집과 우리 동네는 그리 풍요로운 모습이 아니었다.  뒷산에서 한두 집 아래에 위치한 작은 집의 뒤칸 단칸방에 세들어 살았던 때의 기억은 4살 부근의 기억임에도, 생각나는 건 하루의 반나절은 물이 나오지 않아 커다란 통에 물을 담아서 사용해야만 했다.  동네를 거미줄같이 가르던 좁고 미로같은 골목을 10분 이상 헤매야만 조금 큰 길이 나오며 버스정류장을 만날 수가 있었다.  다음 이사한 동네는 도심이긴 했지만, 공동화가 진행되며 슬럼에 가까운 곳이었다.  조금씩 키가 커짐에 따라 또렷해지는 기억속의 사람들은 집에서 인쇄소를 차려놓고 낮이면 주변집들이 울릴정도의 진동과 소음을 발생시키던 집, 집에서 수제로 구두제작을 하며 술마신 날의 밤이면 가족들 공포에 떨게 만들던 아저씨,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강보에 쌓인 아기를 안은 여자를 집으로 데려와 온 동네를 뒤집어놓았던 어느 집의 형, 아들을 낳기 위해 열 한명의 자식을 낳았던 어느 아주머니, 지적장애를 앓던 뚱뚱한 누나..  

 

  지금은 첫번째 동네는 재개발이 되어 20층이 넘는 아파트가 들어선 대단지가 되었고, 두 번째 동네는 동네 한가운데로 도로가 생기며 동네의 모습을 확연하게 바꾸어 놓았는데, 내 기억속의 사람들은 다들 어디로 가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는 알 수 없게 되었다.  나 역시 알뜰했던 부모님 덕에 떠난자가 되어 아파트 생활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릴적에는 알 수 없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동네를 감싸고 있던 소박한 우울함과 무언가에 억눌려 해결하지 못하는 욕망이 뒤섞여 있던 특유의 분위기를, 이제는 애써 다시 느껴보려 해도 느낄 수 없는 처지 또는 여건에 살고 있게 되었다.  그것이 무얼 의미하는 지는 아직 잘 모르겠으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나는 어떤 기준에서의 가난이나 빈곤에서는 탈출했다는 사실이다. 

 

  지금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나는 과연 가난이나 빈곤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는가 의문이 든다.  물론 그걸 굳이 잘 이해하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어린시절 내 주변을 감싸고 있던 우울의 기분을 과연 가난과 빈곤에의 처절한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또는 나의 경험이 가난과 빈곤이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는 가끔씩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하고 글이나 말로 표현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정말 가난했던 것일까?  이 책을 읽고나서 그 의문은 더욱 강렬해진다.  

 

  오스카 루이스라는 사람은 '산체스의 아이들'이라는 책에서 '빈곤문화'라는 표현을 썼다고 한다.  당연한 비판을 불러일으켰을 저 단어는 마치 빈곤은 인간사회에서 빈곤이나 가난에 빠질 수 밖에 없는 부류들이 존재한다는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개개인이 가진 성정이나 성향때문에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다는 듯한 저 말은 뒤집어보면 자본주의라는 설정된 불평등구조 안에서 가진자가 내세우는 논리로 활용되기 좋을 수 밖에 없다.  그러고 보면 이 책은 저자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빈곤문화'라는 단어에 대한 비판을 위한 실증이나 다름없다.  가난이나 빈곤은 인간이 당연히 누려야 할 교육과 경제사회적 활동기회, 그리고 개인사생활에 있어 제약과 제약의 누적을 의미한다.  이 책 안에서 설명되고 이해되는 가난의 모습 속에서 개인적으로 주목했던 것은 개인적 욕구의 제약이었다.  환경과 경제, 그리고 정서 등등의 모든 것이 제약된 상태에서 동시에 억제된 개인의 욕구는 분출방식이 매우 비현실적이다.  사랑은 현실의 도피수단이고, 생각없는 소비는 잠시나마 자신을 자유롭게 한다.  뒷일을 생각하지 않은 유혹에의 넘어감은 잠시나마 희망을 가지게 만든다.  결과는 너무 이른나이의 동거와 출산, 모이지 않는 돈과 재산, 그리고 법률적 구속으로 가난과 빈곤을 이어가는 상황이 되지만, 동시에 욕구는 다시 억압당하고 억압당한 욕구는 비현실적으로 분출되는 악순환을 거친다.  가난과 빈곤은 누적되면서 누적되지 않는 인간의 욕구는 때마다의 비현실적 분출을 통해 악순환의 고리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는 '빈곤문화'는 원인이 아니라 결과임을 보여준다.  처절하게 제약을 이겨낸 사람들은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나 후대를 통하여 해방감을 얻어낸다.  그러니까 그들에게 현실적 기회가 주어졌다면, 남들과 공평한 선에서나마 설 수 있었다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악순환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개발논리가 지배하고 희생자를 요구하며 자본의 불평등을 받아들인 사회에서 그들은 외부적 요인에 의해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사당동 재개발 25년의 기록은 이를 분명하게 증명해내고 있었고, 그 구조는 점점 더 견고해지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마무리된다.


  읽는 내내 글의 독특함이 많이 느껴졌다.  논문의 느낌도 상당히 많았지만, 묘사와 서술이 그렇다고 차갑지 않았다.  게다가 연구자의 성찰과 고민까지 있는 그대로 들어있어 현장에서의 기분과 감정의 흐름까지도 그대로 느껴질 정도였다.  더욱 놀라운 것은 25년간 그들을 관찰하며 상당한 의미를 간직한 결론과 수많은 현상들에서 자신의 성찰을 이끌어내었다는 사실이다.  사회사상적으로 지적하고 결론내리는 일도 없다.  단지 있는 그대로의 모습 속에서 깨닫고 느낀 것 그대로 기록하며 담담하게 현상을 통찰로 연결시켜 이해했을 뿐이다.  그 오랜시간 동안 지쳤다는 기색도 전혀 없다.  연구자의 기록이지만, 같은 생활인으로서의 묘사와 감정 그리고 중립적 객관이 모두 담겨있다.  이 기록은 마치 수도자의 고행이나 수양과도 같은 것이었다.   


  앞서 말했지만, 내가 가난을 처절하게 이해하고 있을 필요까지는 없겠으나, 내가 가난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가난의 본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앞에서 다시금 생각을 돌아보게 된다.  이 질문들 앞에서 난 여전히 명쾌하지 못하다.  그것은 나의 어릴적 경험이 말할 수 있는 전부는 아니었을, 그 공간에서 벗어나 더 이상은 느끼지 못할 수도 있을 어떤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 '어떤 무엇'을 나는 이 책을 통해 많은 부분을 구체화할 수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여전히 온전한 나의 것은 아니기에 쉽게 말을 꺼낼 수 없지만, 가난의 바깥에서 스스로 가난의 안으로 들어가 모든 것을 보고 느끼고 정리하여 성찰을 말하는 저자의 노력과 결실은 그래서 고맙고 감사하고 존경스럽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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