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 숟가락 하나 - MBC 느낌표 선정도서
현기영 지음 / 실천문학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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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그가 추억의 감정에만 폭 쌓이지만은 아닌, 조금은 우울하고 낮은 어릴적 이야기를 쓴 계기는 막 돌아가신 아버지의 염을 하면서였다.  어릴적 오랜시간을 떨어져 살아야했고 좋은 추억보다는 두려움과 실망감이 더 큰 대상이었던 아버지에게서 느낄 수 밖에 없었던 피내림의 거부할 수 없는 핏줄이라는 끈.  과거와 현재 미래라는 시간의 이어짐과 위에서 아래로의 이어짐 중간에 존재하는 나라는 주체는 나를 있게 한 근원과 내가 존재케 해준 이들의 사이에서 자신이라는 존재를 돌이켜볼 수 밖에 없는 존재임을 이야기하는 듯 한 대목이었다.



  그가 그리는 어릴적의 풍경과 자신의 성장은 사뭇 우울하다.  그가 어린시절을 보내온 제주의 사회상은 험난함의 극에 달했던 4.3과 한국전쟁의 주변부였지만 굳이 그런 시대상을 반영하지 않더라도 그리 넉넉하지 못한 가정에서 자라나는 정적이고 소극적인 아이들의 어떤 눌려있는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나의 어릴적 시절을 연상시킨다.  도심 한복판의 슬럼과도 비슷한 가난한 동네에서 항상 누구의 무언가를 부러워해야 했고, 어떤 고민이 생기거나 일을 만들라치면 본능적으로 집안분위기나 어른들의 눈치부터 떠올리고 살펴야했던 어릴적의 죄여있는 듯한 마음의 답답함 말이다.  가난한 집에서 성장하는 동안의 하나하나에 느끼는 그의 부담과 고민, 그리고 항상 일에 치이고 먹을 것을 장만해 내어야 했던 어머니의 사물들에 대한 애틋한 사고방식은 마치 나의 어릴적 모습을 일부러 환기시키려 하는 듯 하다. 




  그러면서도 그가 그리는 제주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답다.  사진하나 없는 전적으로 글에 의한 묘사와 구술이지만 그가 그리는 병문천의 모습과 물이 터져흐를때의 개천, 그리고 용연바다의 모습은 지금 그곳들의 모습에서는 전혀 느낄 수 없는 순수함과 청명함이 살아있다.  그리고 나무하러 다녀오는 어머니를 만나기위해 오르던 중산간 초원의 모습..  풀이 무릎 위까지 자라 올라와 바람에 나부끼는 광활한 초원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이던 모습은 내 머릿속의 상상만으로도 참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것이 그의 고난한 삶의 한 부분이었을지는 몰라도 나는 그 모습이 지금 삼나무에 가려버리고 여기저기 도로가 나며 황폐해져버린 제주 중산간의 아픔에 반하여 보였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가 그리는 4.3의 모습..  그는 4.3을 너무도 마음아파하여 차마 글마무리를 하지 못했다.  그는 이 소설의 의도와 거리가 있어 더 이상 쓰지 않겠다는 문장으로 4.3을 마무리하였지만 순이삼촌이라는 작품 이후 독재권력에 의해 무참한 고문을 당한 작가로써 그렇게 냉철하게 정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 폭압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있고, 그 아픔이 대물림되어 가정의 역사가 되었고 인식의 한 켠에 오롯이 박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섬에서, 그 역시 산 증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쉽게 마무리할 수 있었겠는가.  개인적으로 그런 기억의 편린들을 함께 공유하고 싶은 입장에서 그러한 마무리는 아쉬움을 많이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쩌랴..  그렇게 아픔의 기억을 옆에서 헤집게 하는 것도 또다른 고통을 만들게 하는 잔인함의 모습이니..  게다가 그가 그렇게 정리함으로써 그의 의도대로 그의 어릴적 성장이야기는 절제된 시간의 흐름을 탈 수 있었던 것을..




  차분하고 낮은, 그리고 담담한 서술 속에 무언가 가득찬 느낌은 이제 어릴적의 공허함을 거의 채울 수 있을 만큼 성장했기 때문일까?  벗어나고 싶고, 몸과 마음의 어딘가를 무엇으로든 채워가고 싶었던 나의 어린시절이 이제는 어떤 시간과 경험적 능선을 넘어 아직은 불완전하지만 일말의 여유를 느끼듯,  어릴적의 고민과 갈증이 뒤섞인 회상의 시선에는 어떤 여유가 느껴지기도 한다.  이제 그에게 청년이후의 이야기를 기대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시대의 질곡을 겪은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  담담하면서도 낮은 기분으로 풀어내는 그의 이야기는 나에게는 하나의 매력으로 다가온다.  그래서 그가 이 책 이후의 삶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하는 기대감을 가지게 되었다.  너무 버거운 주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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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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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에르라비에게는 어린시절 백인의 부모에게 입양되어 키워진 알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의 혼란 이전에 고향 오아시스를 연상케하는 어떤 강인한 사상이 느껴진다.  대개 정체성의 혼란은 혼란 그대로 낙오되거나 사회변혁을 생각하게 되는 어떤 계기로 작용되지만, 그는 파리에서의 노동자생활을 거쳐 인위적인 사회시스템에 대해 자연스런 거부감을 느끼고는 삶과 자연의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어찌보면 좀 더 특이해보일 수도 있는 삶, 미국의 스콧 니어링과 비교해보아도 좀 더 조용하면서도 자연스레 근본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그렇게 그는 척박한 프랑스 남부의 한 시골로 찾아들어가고 그곳을 기반으로 아프리카로 생명의 농업을 전파한다.



  땅에서 근원을 찾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많은 활동가, 사상가들이 종국에는 땅을 갈고 밭을 일구며 생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모습은 한때 나에게 어떤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것이 지극히 근원적인 사상과 삶의 차원에서 당연한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산업사회를 형성하면서 자본의 순환시스템에 하나의 부품으로 각인당하고 이를 빠져나와야 한다는 강박과 동시에 이탈에 대한 자발적 공포감을 키워왔다.  나 역시 그런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대안이랍시고 작은 텃밭이나 일구며 자위하고 있지만, 의사라는 직업적 사고로 따져보아도 지금의 사람들이 사회시스템에서 키워가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질병들 삭막하거나 폭력적인 관계속에서 행해지는 상해들은 어떤 의미에서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결국 그가 돌아간 근원의 땅과 생명의 농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그가 돌아간 땅의 생활은 단지 농부라는 직업적 귀결만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즐기고 가꾸어가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한다.  니어링부부가 하루 4시간 노동, 4시간 여가, 4시간 독서와 글쓰기를 실천했듯이 피에르라비 역시 그의 아내와 다섯 자녀들이 각각 악기를 다루고 저마다의 능력을 키우며 스스로의 시간을 채워나가는 자발적인 성장과 삶을 즐겨왔다.  노동은 힘겹지만 삶의 전부를 지배하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돈을 벌기위해 하루 온종일을 일에 매달려도 언제나 빈곤감을 느껴야만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면서도 쉽게 연상되지 않는 모습이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예전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근원의 삶이 그다지 고난하지도 않으며 지금보다 오히려 여유로왔음을 피에르라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이나 글로밖에 이야기하지 못하는 비겁한 신세이지만 다시한 번 생태주의를 이야기한다.  피에르라비도 이야기했듯, 세상의 모든 생명은 나무하나 풀 한포기 의미없는 것들이 없으며, 이들을 그대로 이용하며 공존했던 전통사회속의 공동체와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전통농법이 우리에게는 지속가능하고 생존에 필연적인 삶의 유지법이다.  그것은 이제 점점 절실해져온다.  지구는 한계가 있는 닫힌 계이고 그 안에서 인간은 오로지 파괴의 역할만을 수행해왔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그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진 지금, 더 이상의 지금의 모습은 자멸행위 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핵발전사고가 증명해주듯, 더 이상의 인간의 행위는 차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린 삶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사상가, 성자라는 칭호까지 듣는 이들의 모습이 기실은 우리가 보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위해 벌이는 싸움들이 결국엔 이런 근원을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상, 종교, 철학보다도 이들을 공통으로 관통하는 근원이 절실한 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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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락 한알 속의 우주 - 무위당 장일순의 이야기 모음, 개정판
장일순 지음 / 녹색평론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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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결기에 찬 투사의 느낌이 없다.  배어져 나오는 말씀 하나하나는 그저 부드럽고 어떤 강인함이나 강요가 없다.  하지만 동양의 철학속에 진보의 사상을 녹여 부드럽고 편안하게 담아내는 그의 말 속에는 깊이를 가늠치 못할 어떤 힘이 스며들어 있다.  그것은 가벼이 듣자면 상식수준의 할아버지 잔소리같이 엷기도 하지만, 조금만 가까이 다가가보면 깊이를 쉬이 감지할 수 없는 심연이 느껴진다.



  무언가를 알아가며 머리와 가슴에 생각을 쌓아가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나의 사고와 사상을 받아들이는 일은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한 일인가.  의식의 왜곡과 물질을 바탕으로 한 이기의 생각들이 판치는 세상에서 생각이 없다면 그모습 그대로 왜곡된 의식속에서 속편하게 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세상의 변화는 루쉰의 이야기처럼 철벽속 몽환에 빠진 사람들을 두드려 깨우는 사람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그들은 대부분 시끄러웠다.  그들은 생각없이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고 이제 막 깨어난 사람들을 향해 자신의 생각이 옳음을 큰소리로 외치며 따를 것을 주장한다.  하나의 세력이 형성되면 그것이 마치 세상의 가장 바른 진리인양 고착화시켜 더 이상의 근본을 보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세상의 모습에 진리란 존재했던가..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면서 이미 오래전부터 여일한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었다.  변화와 자유를 부르짖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싸우던 시대에 그는 수많은 주장 이면의 근본성을 파악하고 이를 실천했다.  조용하면서도 부드러운 실천..  그리고 조언과 이야기들..  그 모습은 너무도 유연하여 공권력마저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고, 수많은 이들에게 조언과 안식처와 마음의 힘이 되었다.  진보하되 조용하고 차분했다.  보이지 않는 뒤에서 어루만지고 감싸안으며 세상의 변화를 긍정적인 시선으로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하다.  마치 조용히 입을 다문 대인배의 모습같기도 하다.  그리고 겸손하였다.  그 겸손이 글마저 남기려 하지 않아 지금의 나와같은 사람들이 그의 사상을 접하기 어려워진 면도 없지 않지만,  겸손마저도 하나의 힘으로 만들어냈던 사상가였다. 




  노장사상과 진보철학, 그리고 세상의 수많은 종교사상이 그를 통해 하나로 통합이 되고 서로를 이해하는 통로가 만들어졌다.  나락 한 알 속에서 우주를 보는 그의 사상은  더 이상의 깊이를 만들 수 없는 근원의 사상이 아닐까..  너무 깊고 근원적인 나머지 지금껏 '변절'이란 단어와 연관시켜 생각했던 김지하 시인에 대한 개인적 생각도 조금 달라진 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여전히 김지하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풀어놓지는 못한다.  그리고 주로 강연과 대담으로 엮은 이 책으로 선생님에 대한 생각과 족적을 완전히 이해하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었다.  나의 게으름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의 생각을 담은 책 하나 만나보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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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세계사 - 개정판
클라이브 폰팅 지음, 이진아 옮김 / 그물코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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닫힌 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생명의 모습, 쉽게 말하자면 사육통 속의 쥐들이랄까?  결론적으로 말하면 쥐들은 모두 죽고 만다.  외부에서 먹이와 물의 공급, 그리고 환경의 정비가 제공되지 않으면 이들은 처절한 삶의 모습으로 보여주다가 종국에는 종말을 맞이하는 것이다.  한정된 공간과 환경안에서 생존이란 최적의 순환을 유지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이 책의 시작은 이스터 섬의 이야기로부터이다.  우리 그저 신기한 불가사의의 현상이라고만 이야기들었던 이스터 섬의 석상은 실은 닫힌 계 안에서 인간의 문명이 얼마나 부질없었던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이라 이야기한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3200킬로미터 떨어진 고립된 아주 작은 섬에서 몇천명의 인구가 제각각의 부족을 이루고 나름의 문명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에서 점점 더 불어나는 인구는 먹을 것의 부족을 야기했고,  각 부족간의 문화과시에 대한 경쟁은 석상세우기라는 행위를 낳는다.  거대한 돌을 깨고 다듬어 얼마나 많이 쌓고 얼마나 좋은 위치에 놓느냐가 부족의 우월성을 나타내는 조건하에서 돌을 옮기는 데에 엄청난 양의 목재가 사용됨으로서 숲은 황폐화되어갔고 이에 따라 먹을 채소와 숲에 살던 동물들이 줄기 시작한다.  결국 생존을 위한 전쟁과 식인의 잔인함에 치닫던 섬은 자멸하고 만다는 이야기..  닫힌 계 안에서 인간은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우매함만 보여준 대표적인 예라고 말한다.  

 

  지구 역시 닫힌 계이다.  1만여년의 인류의 역사는 인간종 특성의 문화를 일구고 자연을 소비하는 행위를 이어가며 닫힌 계 안에서의 적절한 순환을 유지하다가 이를 넘어서는데 지구의 한계에 다가가는 속도는 지극히 느렸다.  하지만 지난 200여년 인류의 역사는 그 한계상황에 급속도로 치닫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였다.  그리고 지구는 자신이 한계상황임을 서서히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지구온난화에 따른 남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리고, 생물종은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으며, 대지와 대기의 에너지순환 불안정에 따른 지진과 해일, 그리고 이상기후가 곳곳에서 나타났다.  그 안에서 인간은 바벨탑과도 같은 핵발전소를 만들어냄으로서 종국에는 후쿠시마 원전붕괴와도 같은 최악의 상황을 야기해내었다.  닫힌 계 안의 인간은 물과 먹이가 공급되지 않는 사육통 속의 쥐들처럼, 파국의 상황을 만들어내었고 이제 파국만을 남겨놓고 있다.

 

  세계사라는 것이 이제까지 인간의 눈으로만 보아졌던 면은 다분했다.  찬란한 인간의 문명, 역사, 자연에의 정복..  하지만 그것은 전 지구 안에서 가장 두뇌가 명석하지만 자연의 극히 일부일 뿐인 인간이라는 종의 역사였을 뿐이다.  지구 전체와 자연계를 시야에 두고 그 안에서 인간이라는 자연계의 한 생물종이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모습은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이다.  그것은 마치 전지전능한 신의 시야를 가지는 착각에 들게 하기도 한다.  동시에 인간종의 자연에 대한 인식과 1만년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행위를 보자면 상당히 파괴적이고 오만하며, 이기적임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지극히 자기파괴적이기도 한데 인간종은 그것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지금껏 살아온다.  자연상태에서 수렵과 채취행위로 살던 이들이 농경과 목축을 하며 문화를 형성하지만 저자는 이 시점부터 인간은 자신의 삶의 측면에서도, 자연계 전체적으로도 상당히 비효율적이고 비생산적이며 오히려 파괴적인 행위를 해왔다고 설명한다.  끝까지 읽고나면 인간은 마치 지구에 존재했어서는 안될, 신의 실패작과도 같은 존재라는 느낌도 들게 된다.

 

  하지만, 그런 불만에 우리는 불평을 하지 못한다.  그 이유는 지금 우리가 사는 현재의 모든 모습이 분명하게 증명하고 있다.  인간이 자연을 파괴하고 이기적으로 살아오기 시작했음에 대한 시점설명에는 좀 더 깊은 생각을 하고싶긴 하지만, 분명한 것은 어떤 시점부터 그래왔던, 지난 1000여년의 역사는 분명 자연과 인간종 자신에 대한 파괴적인 역사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 결과로서 생존가능성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만한 수많은 자연현상과 인간문명의 결과물의 부실함등을 바라보면서, 돌이키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린 시점은 아닌가 하는 절망감이 드는 것은 어찌할 수 없는 마음이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등등, 인간계 안에서 조절이 가능한 개념이 아닌 자연계라는 생존의 근본지점에서 시작하는 두려움이기에 절망감은 어찌해도 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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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자서전 1 니코스 카잔차키스 전집 17
니코스 카잔차키스 지음, 안정효 옮김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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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본질을 형성케 하는 요소는 무엇일까.  그것은 성장과 삶의 과정에 있어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것들의 집합이지는 않을까.  한 개인이 자신에 주어진 환경에 아무런 생각없이 안주하지 않는 한, 끊임없는 접촉과 그로 인한 자극, 고민과 깨달음은 한 인간이 지니는 무형의 존재감을 끊임없는 변화속에서 성숙케 한다.  만일 그런 개인에게 성숙된 존재감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유형화된 객체로서 존재하게 될 것이지만 어떤 경우엔 하나의 작품이나 예술로서 승화될 것이다.  카잔차키스는 자신의 삶을 그렇게 작품으로 승화시킨 인물이었다.



  카잔차키스의 삶이 결국 영혼과 육체의 자유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는 상당한 흥미를 유발한다.  인간의 불안에 대한 두려움으로 종교에 귀의하거나 어떤 사회구조 안으로 안주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를 넘어, 결국은 대담성까지 엿보이는 그의 자유는 남다르지만 인간의 본연에 기초하여 당연할 수 밖에 없는 자유로움 그 차제를 느끼게 해 준다.  단순히 자유로움을 넘어 죽음마저도 두려워하지 않는 삶에 대한 자신감은, 인간의 자유는 어떠한 인위적 저항이나 부정을 넘어 객체 자체로 존중되어 발현되는 그런 온전함이 충족되어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 듯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의 자유가 그리스도나 붓다의 사상을 통해 표현되었다는 것은 더더욱 독특해 보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런 사상의 온전하고 당연한 귀결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여행은 그리스도와 붓다의 사상을 깨닫고 느끼는 과정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인간이 만들어놓은 정형화된 종교 교리와 수행과 사상을 벗어남으로서 종교적 사상의 결론은 영혼과 육체의 온전한 자유임을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본연의 사상은 인간의 행위와 사고안에 온전하게 존재하지 않음을 그는 여행을 통한 경험으로 깨달은 것이다.  그래서 수도사들의 고행과 베르그송과 니체의 철학적 고민과 레닌의 공산주의를 뛰어넘어 다시 크레타로 돌아오는 그의 모습은 그가 이야기한 중국의 속담 '중대한 시대에 태어나 사는 저주'를 역으로 표현하여 '중대한 시대에 태어나 경험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던 대표적 상징'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다.




  그의 자유는 크게 '거짓말을 하거나 남에게 맞고 있지 않는 한 가만 내버려두라'는 부담스러웠던 존재인 아버지와 긴 여행을 마치고 광산산업을 통해 만난 알렉시스 조르바에 의해 완성된 것은 아니었을까.  조르바가 죽기 전 카잔차키스에 보낸 마지막 메세지와 그의 아내였던 엘레나 카잔차키가 이야기하는 카잔차키스의 마지막은 너무도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는 언제나 부담스럽고 무서운 존재였지만 매서운 침묵으로 그를 가만히 바라보았던 아버지를 마지막에 서술한다.  그의 바탕이 되었고 결정적인 순간에 이루었던 관계는 그를 완전한 자유의 소유자로 성숙케 하였다.  그런 그가 한편으로 부러운 이유는 여행을 통한 사고의 성숙과 인간관계를 통한 사고의 완성을 이룰 수 있었다는 면에서 사회 시스템의 톱니바퀴로 엮여 살아가고 있는 답답한 나의 현실을 돌아볼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개인적으로 인간 개인의 완벽한 자유의지는 스스로 온전한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온전한 개인의 자유의지라는 것을 알고 있을까?  사회시스템 안에서 살아가며 형성되는 자유란 정형화된 어떤 요소때문에 온전하다 할 수 없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느끼는 자유가 그저 온전하다는 상대적 만족감을 느끼며 살고 있기도 하다.  우리사회가 불합리와 편견과 편차가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을 역으로 반증하고 있는 모습이다.  카잔차키스가, 그리고 조르바가 삶의 마지막까지 추구하려 했고 표현했던 자유, 그것을 삶을 통하여 진정한 인간미와 온전한 인간성이 존재하는 사회를 추구함으로서 온전한 자유란 무엇인가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자의든 타의든 활용했기에 나는 그들의 삶을 하나의 지표로 삼고 싶다.  아직은 소심하고 나약한 사회시스템의 톱니바퀴에 불과하지만, 끊임없는 사고의 성숙을 거치며 만들어지는 삶의 모습은 그들의 자유의지와 그를 통한 온전한 공동체의 지향을 꿈꿀 수 밖에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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