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부 철학자 피에르 라비
장 피에르 카르티에.라셀 카르티에 지음, 길잡이 늑대 옮김 / 조화로운삶(위즈덤하우스) / 2007년 1월
평점 :
절판


 피에르라비에게는 어린시절 백인의 부모에게 입양되어 키워진 알제리인이라는 정체성의 혼란 이전에 고향 오아시스를 연상케하는 어떤 강인한 사상이 느껴진다.  대개 정체성의 혼란은 혼란 그대로 낙오되거나 사회변혁을 생각하게 되는 어떤 계기로 작용되지만, 그는 파리에서의 노동자생활을 거쳐 인위적인 사회시스템에 대해 자연스런 거부감을 느끼고는 삶과 자연의 근본으로 되돌아가게 된다.  어찌보면 좀 더 특이해보일 수도 있는 삶, 미국의 스콧 니어링과 비교해보아도 좀 더 조용하면서도 자연스레 근본을 찾아가는 모습이다.  그렇게 그는 척박한 프랑스 남부의 한 시골로 찾아들어가고 그곳을 기반으로 아프리카로 생명의 농업을 전파한다.



  땅에서 근원을 찾는 이들에 대한 이야기는 나에게 어색하지 않은 이야기이다.  많은 활동가, 사상가들이 종국에는 땅을 갈고 밭을 일구며 생각의 깊이를 더해가는 모습은 한때 나에게 어떤 궁금증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이제 그것이 지극히 근원적인 사상과 삶의 차원에서 당연한 모습이라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다.  인간은 산업사회를 형성하면서 자본의 순환시스템에 하나의 부품으로 각인당하고 이를 빠져나와야 한다는 강박과 동시에 이탈에 대한 자발적 공포감을 키워왔다.  나 역시 그런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대안이랍시고 작은 텃밭이나 일구며 자위하고 있지만, 의사라는 직업적 사고로 따져보아도 지금의 사람들이 사회시스템에서 키워가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질병들 삭막하거나 폭력적인 관계속에서 행해지는 상해들은 어떤 의미에서 근원으로 돌아감으로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본다.  결국 그가 돌아간 근원의 땅과 생명의 농사는 인간이 인간답게 살고 행복하고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닐까.




  그가 돌아간 땅의 생활은 단지 농부라는 직업적 귀결만 이루어낸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 어떤 모습으로 즐기고 가꾸어가며 살 수 있는가에 대한 해답이 되기도 한다.  니어링부부가 하루 4시간 노동, 4시간 여가, 4시간 독서와 글쓰기를 실천했듯이 피에르라비 역시 그의 아내와 다섯 자녀들이 각각 악기를 다루고 저마다의 능력을 키우며 스스로의 시간을 채워나가는 자발적인 성장과 삶을 즐겨왔다.  노동은 힘겹지만 삶의 전부를 지배하는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그것은 돈을 벌기위해 하루 온종일을 일에 매달려도 언제나 빈곤감을 느껴야만 하는 현대인들의 모습과는 상당히 대조적이면서도 쉽게 연상되지 않는 모습이다.  역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예전 우리의 조상들이 살았던 근원의 삶이 그다지 고난하지도 않으며 지금보다 오히려 여유로왔음을 피에르라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말이나 글로밖에 이야기하지 못하는 비겁한 신세이지만 다시한 번 생태주의를 이야기한다.  피에르라비도 이야기했듯, 세상의 모든 생명은 나무하나 풀 한포기 의미없는 것들이 없으며, 이들을 그대로 이용하며 공존했던 전통사회속의 공동체와 그 안에서 이루어졌던 전통농법이 우리에게는 지속가능하고 생존에 필연적인 삶의 유지법이다.  그것은 이제 점점 절실해져온다.  지구는 한계가 있는 닫힌 계이고 그 안에서 인간은 오로지 파괴의 역할만을 수행해왔고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그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진 지금, 더 이상의 지금의 모습은 자멸행위 외에 어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스리마일, 체르노빌, 후쿠시마의 핵발전사고가 증명해주듯, 더 이상의 인간의 행위는 차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잊어버린 삶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사상가, 성자라는 칭호까지 듣는 이들의 모습이 기실은 우리가 보편으로 받아들여야만 하는 모습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바라는 변화를 위해 벌이는 싸움들이 결국엔 이런 근원을 지향하고 있음을 분명히 인식해야 하지 않을까?  어떤 사상, 종교, 철학보다도 이들을 공통으로 관통하는 근원이 절실한 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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