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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
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 오마이북 / 2011년 10월
평점 :
구럼비의 기억은 이미 일년전의 모습에서 멈추어 버렸다. 설령 공사장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지금은 이미 형체를 잃어버린 채 아픔만이 가득할 곳. 역시 내 발바닥이 닿았던 너럭바위도 일년 전 기억속의 모습으로 추억에서나 존재하게 된 곳. 뜨거운 검은바위 맨발을 대고 앉아 낮에는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는 공연을 보던 그곳은 이제 사라졌다.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강정마을과 포구에 들러본다. 처음엔 조금이라도 구럼비의 모습을 뇌리에 새겨보려는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변화를 느끼고 사람들과 공감하려는 마음으로 들른다. 하지만, 주로 주말의 평온한 시간에 들르게 되는 강정마을은 친근하면서도 여전히 낯설다. 아픔이 시작된 이후로 강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마찰과 내면에 새겨들어가는 상처, 그리고 폭력은 내가 갈 수 없는 시간에 일어나기에, 공감할 수 없는 마음과 기분을 애써 SNS에 기대어 짐작할 뿐, 나는 익숙한 강정마을의 풍광과 익숙해져가는 구럼비 위에서의 파괴의 모습과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는 상처와 아픔의 변두리에서 이질감과 낯선 느낌만을 받는다.
강정 해군기지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논리는 언제나 첨예하다. 하지만, 논리의 싸움에서 언제나 불리한 편은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군사전략과 안보, 평화유지를 위한 수단의 논리 앞에서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절차상의 문제제기를 제외하고는 어딘가 부족함이 있었다. 거기에 공권력을 앞세운 국가폭력과 애써모른 척으로 일관하는 도정의 비루함 앞에서 저항은 고되고 힘들고 처절하기만 하였다. 평화와 군축을 외치는 이들의 주장은 어딘가 추상적으로만 보였다. 그것이 논리가 아닌 억지로만 받아들여졌을 때, 저항은 더욱 외롭고 힘들기만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국가의 부당성을 몸소 깨달으면서도 과연 국가주의를 쉽게 떨쳐버릴 수 있었던가..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그 대안은 과연 현실적이고 논리적으로 느껴지던가.. 논리로 따질 수 없고 단지 양립하는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사상과 세계가 존재한다. 그런 사상과 세계는 생각해보지 않고 느껴보지 못하며 경험해보지 못할수록 비현실적으로만 생각된다. 특히 남한이라는 구조적 파시즘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는 그런 사상과 세계의 대립이 현재의 강정이라 생각한다. 해군기지를 거부하고 군사주의를 거부함으로서 평화라는 사상의 가치를 세우고, 공권력의 폭력과 위정자들의 위선에 반하여 공동체적 선을 세우며, 인간이 자연의 한 일부로서 합리적인 자연계를 이루는 세상.. 그것은 국가주의와 군사주의 안에서 분석되고 현실적이라며 주장되는 모든 논리의 대척에서 독립적인 가치체계로 존재하는 주장인 것이다. 저항과 파괴, 폭력의 구조적 순환속에 존재하는 모든 이면적 현실적 현상을 구체적으로 따지기에 앞서 가장 근본의 맨 얼굴은 앞서말한 대척하는 가치의 싸움이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나 냉혹한가.. 우리는 이미 평택의 대추리에서 치명적으로 깊은 상처를 경험한 바 있다.
이 책은 논리적이지 않다. 강정의 한사람 한사람의 생각과 입을 통해 그들이 느끼고 주장하는 것들을 사진과 글이 가지는 적당한 살을 붙여 마음에 호소한다. 사실 우리가 터전을 이루고 사는 데에는 많은 논리나 사고를 요하지 않는다. 주어진 자연적 조건에 적응하며 시간의 흐름속에 쌓인 경험을 토대로 '이제껏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만을 요구한다. 사실 그게 평화의 모습 아니던가. 서 승 선생님 말씀대로,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며 싹을 틔우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고 자연스레 스러져가는 모습, 그 자체가 평화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강정의 사람들은 평화라는 가치와 사상의 모습을 온전히 주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개발과 군사주의의 대척에 선 평화적 사상의 지침이자 설명서인 셈이다. 거기에, 직접적인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는 나의 이질감이 어느정도 호전되는 책이었다. 함께하지 못하고 함께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경청하는 것, 그것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연대의 한 방법일 것이다. 시각의 익숙함을 넘어, 내면의 교감이 조금 더 익숙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