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머니란 존재를 생각해본다.  '어머니'라는 호칭에 이미 함축되어 있는 가족이란 테두리, 그 안에서 여인은 한없이 포근하고 희생하는 상으로 보여진다.  어릴적 기억과 자의식이 형성되어가면서부터 존재하는 어머니란 여인의 모습은 내가 속한 가족의 하나의 기둥으로서 포근한 의지처였을 뿐이다.  어머니에게서 '여자'를 느끼는 건, 극히 의도적이지 않으면 무척 어려운 일이다.  


  어머니는 세상의 많은 여인들이 보여주는 그런 삶과는 무관한 사람이어야만 했다.  아버지와는 사랑으로 만나서 결혼한 것이고 남편과 가족만을 바라보며 행복해야 했다.  바람을 피우거나 자신만을 위한 행동을 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여성의 삶을 바라보는 과정에서 지워지는 이해의 경계는 이 지점에서 발생한다.  경계가 일으키는 갈등을 받아들이는 것은 나이가 들면서 점점 쉬워지긴 하지만, 이 소설에서도 나오듯 우리는 어머니의 삶에 대해 그닥 관심을 두지 않기에 우연히 알게 되거나 이야기로 직접 듣지 않으면 어머니는 그렇게 가족안의 고정된 이미지로 존재하고 만다.


  작가는 복잡한 가족사를 통해 어머니란 존재를 한 여인의 삶으로 바라보기를 권유한다.  내게는 언제나 이상적인 의지처이지만 한 여인으로서 가족이라는 테두리는 때론 감옥같기도 하고 그래서 잠깐이라도 탈출하고 싶은 담장이었을지 모른다.  결혼이라는 제도로 이성에 대한 관심을 저당잡히고, 자식이라는 존재로 여자로서의 매력과 감성의 풍부를 거세당해야만 하는 삶이 때론 행복하지 않았을 것이다.  결혼 전에는 나름 아름답고 매력있었지만 어떤 연유에서 지금의 가족을 이루게 된 자신의 늙어버린 현실이 때론 후회스럽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지금의 시간을 이어나가지 않으면 안될 삶, 아무리 나이들고 늙어도 눈에 밟히는 자식들을 챙기면서, 뒤늦게나마 자신의 인생을 조심스럽고 조용하게 챙겨본다.  


  자식들의 복잡하고 구질구질한 처지와 사건들의 충돌사이에서 소설의 말미까지 조용히 중심을 잡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이 잔잔하면서 인상적이다.  나이든 자식들의 구질구질한 사건들의 충돌은 결국 어머니의 과거를 상기시키고 그 의미를 이해하게 만드는데, 그 과정은 어머니를 '여자'로서 이해하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현란한 말솜씨는 없지만 적당한 재미를 유지하며 어머니를 통한 여자의 삶을 다시금 바라보게 만드는, 구조와 관점유도의 매력이 살아있는 소설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멋진 신세계 소담 베스트셀러 월드북 56
올더스 헉슬리 지음, 정홍택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1997년 6월
평점 :
품절


가공되어 태어나는 인간사회, 계급과 역할의 통제와 동시에 자신의 입장을 당연시함으로서 만족과 행복감만을 느끼게 되는 세상.  감정과 이성이라는 인간의 가장 근본을 통제하는 세상은 관찰자의 입장에서는 끔찍하거나(독자의 입장), 만족스러울(통치자의 입장) 수 있겠지만, 어쨌든 그 안에서 살아가는 가공된 인간들은 당연함을 가지고 행복하게 살아간다.  스스로의 생각이 통제된 이성과 감정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일은 억압의 한 형태이긴 하지만, 그것이 스스로의 만족과 행복감을 느끼게 하는 기제라면 억압을 당하는 입장에서는 억울함이란 존재할 수 없는 감정일 것이다.  매트릭스 안에서의 시선이 마치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연함을 가지듯 말이다.  


  통제의 방법이 구사하는 매트릭스의 세상은 올더스 헉슬리가 묘사하는 이 책과 조지오웰의 1984 가 대표적이다.  1984는 끊임없는 외부의 위협요소를 만들어내어 감시와 억압을 자행하는 미래인 반면, 멋진 신세계는 인간의 출생자체에서부터 이성을 통제하는 미래이다.  따라서 1984의 계급은 권력을 바탕으로 하는 후천적 획득요소라 하면, 멋진 신세계의 계급은 생체조절을 통한 선천적 획득요소이다.  그러다보니 물론 당연한 현상이긴 하겠지만, 1984년의 시선은 감시와 억압을 피하고자 하는 매트릭스 내의 구성원의 시선으로 전개되고, 멋진 신세계는 생체통제에 이상이 있었던 상위계급과 생체통제력의 외부에서 생활하는 야만인이라는 매트릭스 바깥의 시선으로 전개된다. 


  두 개의 소설을 읽고 난 후의 내 느낌은 당연히 답답함이다.  두 소설이 묘사하는 미래는 현재의 시점에서 바라보아 미래같지 않은 원시적이고 때로는 구차해보이는 묘사도 있어 그렇긴 하지만, 전체적인 인간사회의 모습은 어떠한 형태로든 통제이고 통제에 의한 비인간성 때문에 답답함이 밀려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멋진 신세계가 그려내는 선천적 통제의 세상에 살아가는 이들이 행복과 만족을 느낀다는 점에서 사뭇 생각이 달라지기도 했다.  그것은 현실을 살아가는 나의 입장에서 답답하고 괴롭고 이해하지 못할 기분과 감정들이 복잡하게 엃혀있기에 들게 되는 상대적 현상이다.  게다가 나 역시 어떤 뭔가가 잘못된 매트릭스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 세상은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과 존엄을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하는 세상이고, 혹시 그것이 어떤 매트릭스 내의 현상이라면 우리는 잘못된 매트릭스를 깨고 시선을 한 단계 높여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지만, 고민과 과정이 주는 괴로움과 답답함은 소설에 대한 엉뚱한 생각을 가지게 한다. 


  야만인이라 표현되는 이의 자살..  그것은 통제가 당연화된 세상이 어떤 물리적 강요가 아닌 자연적인 흐름안에서 이루어진 질식이다.  결말은 비관적이지만, 통제안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겐 낙관이다.  무엇이 옳은가에 대한 판단은 잠시 유보해야 할 것 같다.  지금의 나는 비관적인가 낙관적인가 하는 수많은 것들이 뒤섞인 입장에의 고민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내가 속한 매트릭스에 이질감을 느끼기 시작한 때문일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유리 동물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8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뜨거운 양철위에서 자신의 발이 타들어가는 느낌에도 동동거리며 내려오지 않는 고양이의 모습은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사실은 그런 뜨거운 바닥 위의 고양이라면 당장에 내려올 것이다.  오히려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인간이기에 연출이 가능한지 모른다.  뭔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행동의 의아함, 다급함.  지금 당장의 비난과 바보스러움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계산된 의지.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의지이자 판단착오이다.


  등장하는 모든 이를 통하여 충만하고 긴장감있는 욕망이 느껴진다.  삶의 마감을 앞둔 이의 누리지 못한 것과 손 안에 쥐어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 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으려는 자식의 욕망, 모든걸 내려놓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채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이 된 아들, 그리고 그 옆에서 재산에 대한 욕망을 절대 숨기지 않는 여자..  집 안이라는 공간안에 제각각의 욕망이 한껏 부풀은 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거칠게 부벼대는 마찰의 긴장감. 


  욕망의 마찰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원활하지 못했던 소통의 문제와 결부된다.  모든 것을 거머쥔 채, 배우자에 대한 불만족을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애착으로 해소하는 아버지, 그런 마초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만 했던 아들, 그에 반하여 소외된 채 성장한 다른 아들..  그리고 그 옆에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여자들..  이는 욕망의 거친 충돌을 더욱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유리동물원은 작가의 자전적 극을 무대에서의 새로운 연출적 시도면에서 더욱 호평받는 듯 하다.  작품으로 읽는 무대연출기법이 그 시대에 얼마나 호평받을 만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작품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선택하는 사람들의 지향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의 소외를 더욱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개인의 쇠락과 개인의 결점과 개인의 어렵기만 한 열망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여 서로를 돕거나 위안은 커녕,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는 모습은 왠지 어색해보이거나 답답해보이지는 않는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사회시스템의 지향점과 하위묶음인 가족안에서의 현상순응적인 모습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또는 서걱거림이 작품의 외연에서 느껴지면서도 그 느낌때문에 작품속의 가족을 지배하는 우울한 느낌은 하나의 가능한 경우로서 납득이 된다.


  납득되는 어떤 우울함은 세상에 너무 많다.  뭐라 표현하기도 어색한, 또는 너무 많아 표현자체가 이미 불필요해진 그런 것이랄까?  희망을 가져보지만 결국 실망으로 좌절되고 위축된 자기안의 삶으로 복귀하는 모습에서 희망이란 것은 쉽게 깨져버리는 유니콘의 뿔같은 것이었다.  특별했지만 우연히 깨져나간 유리 유니콘의 뿔은 유니콘을 평범한 유리 말로서 제자리에 놓여지게 된다.  누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마치 그게 네 몫이라는 것처럼 귀결되는 자리..  그건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어색하지 않은 답답한 귀결에 설명이 쉽지 않은 느낌만 가득해지는 작품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럼비의 노래를 들어라 - 제주 강정마을을 지키는 평화유배자들
이주빈 글, 노순택 사진 / 오마이북 / 2011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구럼비의 기억은 이미 일년전의 모습에서 멈추어 버렸다.  설령 공사장 안으로 들어간다 해도 지금은 이미 형체를 잃어버린 채 아픔만이 가득할 곳.  역시 내 발바닥이 닿았던 너럭바위도 일년 전 기억속의 모습으로 추억에서나 존재하게 된 곳.  뜨거운 검은바위 맨발을 대고 앉아 낮에는 이야기를 나누고, 밤에는 공연을 보던 그곳은 이제 사라졌다.  


  한 달에 한 번은 반드시 강정마을과 포구에 들러본다.  처음엔 조금이라도 구럼비의 모습을 뇌리에 새겨보려는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변화를 느끼고 사람들과 공감하려는 마음으로 들른다.  하지만, 주로 주말의 평온한 시간에 들르게 되는 강정마을은 친근하면서도 여전히 낯설다.  아픔이 시작된 이후로 강정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마찰과 내면에 새겨들어가는 상처, 그리고 폭력은 내가 갈 수 없는 시간에 일어나기에, 공감할 수 없는 마음과 기분을 애써 SNS에 기대어 짐작할 뿐, 나는 익숙한 강정마을의 풍광과 익숙해져가는 구럼비 위에서의 파괴의 모습과 동시에 그곳에 존재하는 상처와 아픔의 변두리에서 이질감과 낯선 느낌만을 받는다. 


  강정 해군기지의 문제를 논함에 있어 논리는 언제나 첨예하다.  하지만, 논리의 싸움에서 언제나 불리한 편은 해군기지를 반대하는 이들이었다.  군사전략과 안보, 평화유지를 위한 수단의 논리 앞에서 반대하는 이들의 논리는 절차상의 문제제기를 제외하고는 어딘가 부족함이 있었다.  거기에 공권력을 앞세운 국가폭력과 애써모른 척으로 일관하는 도정의 비루함 앞에서 저항은 고되고 힘들고 처절하기만 하였다.  평화와 군축을 외치는 이들의 주장은 어딘가 추상적으로만 보였다.  그것이 논리가 아닌 억지로만 받아들여졌을 때, 저항은 더욱 외롭고 힘들기만 하였다.


  하지만, 우리가 국가의 부당성을 몸소 깨달으면서도 과연 국가주의를 쉽게 떨쳐버릴 수 있었던가..  국가주의를 부정하는 입장에서 그 대안은 과연 현실적이고 논리적으로 느껴지던가..  논리로 따질 수 없고 단지 양립하는 존재로서 가치를 인정받아야 하는 사상과 세계가 존재한다.  그런 사상과 세계는 생각해보지 않고 느껴보지 못하며 경험해보지 못할수록 비현실적으로만 생각된다.  특히 남한이라는 구조적 파시즘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더욱 그렇다.  나는 그런 사상과 세계의 대립이 현재의 강정이라 생각한다.  해군기지를 거부하고 군사주의를 거부함으로서 평화라는 사상의 가치를 세우고, 공권력의 폭력과 위정자들의 위선에 반하여 공동체적 선을 세우며, 인간이 자연의 한 일부로서 합리적인 자연계를 이루는 세상..  그것은 국가주의와 군사주의 안에서 분석되고 현실적이라며 주장되는 모든 논리의 대척에서 독립적인 가치체계로 존재하는 주장인 것이다.  저항과 파괴, 폭력의 구조적 순환속에 존재하는 모든 이면적 현실적 현상을 구체적으로 따지기에 앞서 가장 근본의 맨 얼굴은 앞서말한 대척하는 가치의 싸움이다.  하지만 현실은 얼마나 냉혹한가..  우리는 이미 평택의 대추리에서 치명적으로 깊은 상처를 경험한 바 있다.


  이 책은 논리적이지 않다.  강정의 한사람 한사람의 생각과 입을 통해 그들이 느끼고 주장하는 것들을 사진과 글이 가지는 적당한 살을 붙여 마음에 호소한다.  사실 우리가 터전을 이루고 사는 데에는 많은 논리나 사고를 요하지 않는다.  주어진 자연적 조건에 적응하며 시간의 흐름속에 쌓인 경험을 토대로 '이제껏 살던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것'만을 요구한다.  사실 그게 평화의 모습 아니던가.  서 승 선생님 말씀대로, 하나의 씨앗이 땅에 떨어져 주어진 조건에 적응하며 싹을 틔우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고 자연스레 스러져가는 모습, 그 자체가 평화의 모습이라 생각하면, 어쩌면 이 책에 나오는 강정의 사람들은 평화라는 가치와 사상의 모습을 온전히 주장하고 있는지 모른다.  결국 개발과 군사주의의 대척에 선 평화적 사상의 지침이자 설명서인 셈이다.  거기에, 직접적인 아픔을 함께하지 못하는 나의 이질감이 어느정도 호전되는 책이었다.  함께하지 못하고 함께 느끼지 못한다면, 그들의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나마 경청하는 것, 그것이 완전하지는 못하지만 연대의 한 방법일 것이다.  시각의 익숙함을 넘어, 내면의 교감이 조금 더 익숙해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의자놀이 - 공지영의 첫 르포르타주, 쌍용자동차 이야기
공지영 지음 / 휴머니스트 / 2012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안정된 직장이라 믿으며 지방 도시에서 가정을 꾸려나가며 소박하게 살아가던 이들.  때로는 다른 노동자보다 급여많고 복지혜택도 많아서 '부르주아 노동자' 등등의 비아냥섞인 말들로 다른 노동자들에게 부러움을 사기도 했었을 이들.  탄탄한 직장과 안정된 생활이 주는 안락감은 세상일에 관심을 가짐으로 방해받고 싶지않은 어떤 소중함이었을지 모른다.  세상이 태평하면 왕이 누군지도 모른다는 옛 말이 한때의 이들에게는 당연한 말이었을지 모른다. 


  절박함이란 이런 것이다.  자신이 딛고 선 바닥이 탄탄한 줄 알고 있던 사람들이 실은 얇은 나무판자였고, 이제 그것이 걷어지면서 대다수의 누군가는 끝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야만 한다는..  누군가는 불안하지만 나무판자 위에 서고 누군가는 떨어져야만 하는 상황에서 '산 자'가 되기 위한 치열한 싸움.  그 싸움은 거칠게 판자를 걷어내는 이에 대한 분노와 함께 어제까지 함께 서 있던 이들과 처절하게 다투어야 한다는 비참함이다.


  국가의 부에 걸맞은 국민의 기본적 삶에 대한 개념이 없는 사회에서 자본의 이기심만으로 재단된 칼에 의해 설 곳없이 나락으로 급격하게 떨어져야 하는 현실은 전쟁의 트라우마에 비교된다.  여기에 자본의 편을 든 국가의 공권력을 이런 절박감에 맞선 노동자의 저항에 대고 '폭력의 실험장과 경험장'으로 알뜰하게 사용한다.  그 무식함은 트라우마를 극대화시켜 노동자들과 그 가족들을 스스로 죽게 내몬다.  뒤늦게서야 이들을 감싸안고 위로하는 것은 국가도 자본도 아니었다.  극악한 현실에 마음아픈 또다른 사람들이자 노동자들이었다.  쌍용차의 저항은 국가/자본이 그리고 공권력이, 국민/노동자와의 거리가 얼마나 먼 존재이며 얼마나 위압적인 존재로 군림하려 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팩트 자체로도 글은 힘을 얻는다.  요즘같은 세상에선 험한 일들이 하도 많다보니 더욱 그렇다.  하지만 팩트에 작가의 감성이 실리면 이렇게 마음을 뜨겁게 만든다.  그리고 아프다.  마치 아물어가는 상처에 염증이 도지며 뜨겁고 불편해지듯, 절대 잊어서는 안되는 상처라는 듯, 책을 읽어나가며 읽은 후의 마음은 이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던 쌍용차라는 간접적 트라우마를 다시금 꺼내어 짓이기듯 답답하고 아프고 괴롭다.  쌍용차는 여전히 진행중이고 상처받는 이들은 여전히 존재하니 시선두기에 지쳐하지 말고, 절대 망각해서는 안된다는 듯 뜨겁게 짓누른다.  그리고 이는 절대 남의 일만이 아닌, 우리가 겪을 수 있는 일임을 무겁게 상기시킨다.  우리는 언제까지 통제를 상실한 자본의 난도질을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것일까?  


  사족 : 공지영 작가가 이 책을 펴내면서 불거진 하종강 교수와 이선옥 작가와의 논쟁에 대한 개인적 견해는,  인용의 문제에 있어 공지영 작가의 실수이자, 이에 대한 대처과정은 공지영작가의 명백한 잘못이라 생각한다.  2쇄 이후의 대처에 대해서도 사후 대책에 대한 약속이 지켜지지 않음에도 작가의 태도에 문제가 많다고 생각한다.  이 독후감은 전적으로 내용에만 충실하여 작성한 것이다.  작가의 어딘가 이해할 수 없는 태도가 쌍용차 노동자들을 포함한 모든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편견으로 확장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