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양철 지붕 위의 고양이.유리 동물원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8
테네시 윌리암스 지음, 김소임 옮김 / 민음사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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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양철위에서 자신의 발이 타들어가는 느낌에도 동동거리며 내려오지 않는 고양이의 모습은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워 보인다.  사실은 그런 뜨거운 바닥 위의 고양이라면 당장에 내려올 것이다.  오히려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모습은 인간이기에 연출이 가능한지 모른다.  뭔가를 기대하고 바라는 욕망이 만들어내는 행동의 의아함, 다급함.  지금 당장의 비난과 바보스러움은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계산된 의지.  그것은 인간이기에 가능한 의지이자 판단착오이다.


  등장하는 모든 이를 통하여 충만하고 긴장감있는 욕망이 느껴진다.  삶의 마감을 앞둔 이의 누리지 못한 것과 손 안에 쥐어진 것을 놓지 않으려는 욕망, 아버지의 재산을 이어받으려는 자식의 욕망, 모든걸 내려놓고 싶지만 그러지도 못한채 아버지의 욕망의 대상이 된 아들, 그리고 그 옆에서 재산에 대한 욕망을 절대 숨기지 않는 여자..  집 안이라는 공간안에 제각각의 욕망이 한껏 부풀은 채,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거칠게 부벼대는 마찰의 긴장감. 


  욕망의 마찰은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도 원활하지 못했던 소통의 문제와 결부된다.  모든 것을 거머쥔 채, 배우자에 대한 불만족을 자식에 대한 무조건적 애착으로 해소하는 아버지, 그런 마초적인 아버지 아래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숨겨야만 했던 아들, 그에 반하여 소외된 채 성장한 다른 아들..  그리고 그 옆에서 자신의 욕망을 투사하는 여자들..  이는 욕망의 거친 충돌을 더욱 긴장으로 몰아넣는다.


  유리동물원은 작가의 자전적 극을 무대에서의 새로운 연출적 시도면에서 더욱 호평받는 듯 하다.  작품으로 읽는 무대연출기법이 그 시대에 얼마나 호평받을 만한 것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단지 작품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선택하는 사람들의 지향은 다양하지만 그것이 현실에서의 소외를 더욱 가중시키는 방향으로 흐르는 모습은 안타깝기까지 하다.  개인의 쇠락과 개인의 결점과 개인의 어렵기만 한 열망이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모여 서로를 돕거나 위안은 커녕, 더욱 어렵게 만들어가는 모습은 왠지 어색해보이거나 답답해보이지는 않는다.  가족이라는 테두리 밖에 존재하는 사회시스템의 지향점과 하위묶음인 가족안에서의 현상순응적인 모습 사이에서 느껴지는 이질감 또는 서걱거림이 작품의 외연에서 느껴지면서도 그 느낌때문에 작품속의 가족을 지배하는 우울한 느낌은 하나의 가능한 경우로서 납득이 된다.


  납득되는 어떤 우울함은 세상에 너무 많다.  뭐라 표현하기도 어색한, 또는 너무 많아 표현자체가 이미 불필요해진 그런 것이랄까?  희망을 가져보지만 결국 실망으로 좌절되고 위축된 자기안의 삶으로 복귀하는 모습에서 희망이란 것은 쉽게 깨져버리는 유니콘의 뿔같은 것이었다.  특별했지만 우연히 깨져나간 유리 유니콘의 뿔은 유니콘을 평범한 유리 말로서 제자리에 놓여지게 된다.  누가 일부러 그렇게 한 건 아니지만 마치 그게 네 몫이라는 것처럼 귀결되는 자리..  그건 아니라 말하고 싶지만 어색하지 않은 답답한 귀결에 설명이 쉽지 않은 느낌만 가득해지는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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