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굴뚝청소부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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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의 주체는 신에게 있는 것인가 아니면 인간 개인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진리는 궁극을 추구하는 과정이라면 그 끝은 과연 어디에 어떻게 존재할 것인가.  주체와 사유와 대상은 과연 각각의 정당성과 합리성을 내포하고 있는가.  인간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생각의 논리, 사유가 지배하는 세계의 구성.  그 근본적 원리는 언제나 끊임없는 의문을 가지기이다. 

  경계짓기라는 것.  인간의 언어가 그리고 사고가 만들어내는 인식의 영역, 그리고 영역의 주변부를 둘레짓는 경계.  사물의 경계, 사유방식의 경계..  수많은 철학자들의 고민과 연구를 관통하고 지금까지도 이어지는 철학의 중심적 의문은 이런 경계를 허무는 일이 아닐까. 그것은 그래프로 표현되는 무한대의 함수를 숫자로 분명한 표현과 경계를 어떻게 연동시킬까 하는 고민일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빨간색’이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있는 색은 실은 CMYK 시스템에서는 수없이 많은 색들의 집합이다.  하지만, 수많은 색들을 ‘빨간색’으로 경계짓는다 해도 경계 주변의 색들은 ‘빨갛지 않다’로 말할 수 있을까?  동시에, 그 경계는 모두가 동의하는 그런 것일까?

  경계를 허문다는 것을 우리는 마치 미분적분을 하듯 더 세세한 분류로 나누어 결국엔 좀 더 작은 경계를 짓는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미끄럼틀 같은 자연의 흐름을 계단화시키는 일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미끄러지는 기능을 그대로 유지하기 위해 계단을 계속 세세하게 만들어나가는 과정..  그것은 과연 합리적인 방법일까?  그것에 자연스럽지 않은 비합리의 느낌이 존재한다면, 인간이 사유의 방법으로 추구하는 것들, 언어등의 표현방식은 그 자체로 잘못된 방식이 아니었을까?  남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의문과 고민뿐이다.  철학의 본질은 어쩌면 누구의 사유가 더 합리적이라는 주장이 아니라, 언제나 이어질 수 밖에 없는 의문의 향연에 있을지 모른다. 

  철학은 여전히 나에겐 어렵다.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들뢰즈, 가타리...  책을 읽고나서도 그들이 각각 어떤 철학적 사유를 하고 주장을 했는지 머릿속에 쉽게 들어오지 않는다.  강연형식으로 쉽게 풀어 설명해 놓았는데도 그렇다는 건, 분명 나의 문제가 클 것이다.  어릴적 암기위주의 쌈닭훈련만 받아 사고의 방법과 방식에 익숙치 않은 머리의 습관때문이라 해도 될런지 개인적인 의견을 살짝 얹어본다.

  고민과 의문은 사실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두뇌작용의 한 모습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게 합리성에의 고민에 좀 더 가까운 것을 철학적 고민이라 하는 건 아닐까?  나라는 주체에 대한 고민, 대상에 대한 고민,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한 고민..  철학은 이런 추상성과 비현실성이 언뜻 느껴지는 본질에 대한 고민이라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성과 현실성에 어느정도 타협한 고민을 이어나가는 것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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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8
에밀리 브론테 지음, 김종길 옮김 / 민음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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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느끼게 되는 어떤 답답함, 조여드는 듯한 기분, 우울함, 그리고 괴기스러움..  대표적인 비극답게 한 권에 담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희망이라고는 보이지 않는다.  괴기스러움은 유령과 같은 어떤 영적인 존재가 아닌 작품속에서 실존하는 인물들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된다.  그런 분위기가 차라리 유령이나 귀신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면 덜 비극적이거나 덜 음산할 지 모르겠다.  그 주체가 인간이라는 점에서 더욱 비극적이고 음산하고 우울하게 만드는 요소일 것이다.


  원한을 품은 인간의 독한 의지가 나약한 인간들을 잠식하고 정복해가는 과정은 무척 잔인하다.  마치 한정된 공간안에서 먹이를 맘대로 몰아대다가 하나하나씩 잡아먹는 맹수와도 같다.  작품안에서는 다행히도 시선을 맹수와 먹이 모두를 바라볼 수 있는 3자의 시선으로 설정하여 답답하고 안타까운 마음만으로 마무리할 수 있지만, 맹수 히스클리프의 입장에 동일시되기보다는 잠식당하는 워더링하이츠 사람들에 동일시되기 쉬워 위기에 따른 긴장감 역시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다가오는 요소이다.


  작가의 감성과 환경이 작품의 내용과 분위기를 만들어낸다는 점을 감안하면 대체 작가는 얼마나 우울한 삶을 살았길래 이런 스산한 비극을 만들어냈을까?  향수병과 고독, 지병에 따른 젊은 나이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작품에서 느껴지는 한기가득 서린 비극만큼이나 커다랐던 것일까?  동시에 지금의 시대엔 이해하기 힘든 상황들..  여성들의 수동성과 제도에 엃매인 채 스스로 일어설 수 없었던 분위기, 그리고 고립된 채 근친에 가까운 사랑과 관계를 유지해나가야만 했던 상황은 작가의 시대에 당연하게 받아들여야만 하는 그런 것들이었을까?  비극은 사람을 우울하게도 만들었지만, 이 시대엔 이해하지 못할 등장인물들의 나약함에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껴야만 했다.


  희망을 일찌감치 포기당한 채, 누군가에 의해 자신의 신체와 자존감을 잠식당하는, 증오와 한기가 가득 배인 비극으로 철저하게 빠뜨리는 모습은 어쩌면 작가의 경험이 바탕이 되는 정밀한 구성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아마도 추측을 넘어서는 어떤 최악의 경험이 작가에게 있을지 모를 일이다.  개인이 겪은 최악의 경험이 세상에서 가장 인정받는 비극문학이 되었다 생각해보면, 그런 아이러니를 받아들이는 것 자체도 답답하기만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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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해도 괜찮아 - 영화보다 재미있는 인권 이야기
김두식 지음 / 창비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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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사회의 사안을 조금 다르게 본다는 것은 시선을 달리 가져보는 하나의 경험이기도 하지만, 사실 사회와 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을 가져본 입장이라면 '다르게 보기'는 한편으로는 당연하면서도 우리에게 가려진 세상의 평범한 이면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사회와 사람에 대한 인문학적 관심이 만들어내는 화면에 대한 불편함, 그것은 다르게 이야기하면 인문학적 감수성 내지, 사회와 사람에 대한 보편적 감수성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사회의 질서를 이유로 차단된 인간적 감성이기도 하다.


  '욕망해도 괜찮아'가 제도와 관습에 의한 인간적 감수성의 자기검열을 벗어나기를 바랬다면, 이 책은 사회구조와 시스템이 의도적이던 아니던간에 억압하고 통제하는 인간의 이면과 사고를 영화라는 매개체를 통해 다르게 생각해보기를 권유한다.  그런 작업을 통해,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동참하고 있는 사회적 억압이나 통제기제를 느껴보고 그런 구조가 과연 인간적인가, 또는 통제의 대상들이 과연 인간의 사회에 비우호적인 존재들인가에 대한 되물음을 가지게 한다. 


  그 과정은 상당히 불편해지기도 하다.  개인적 사고의 자기검열을 넘는 것은 '괜찮을까?'라는 걱정이지만, 구조적인 통제의 문제는 집단에 대한 이해의 문제이기에 공유하던 통념을 뒤흔드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의 특성답게 부드러운 어체로 괜찬다고 말한다.  불편해도 괜찮다는 말의 다른 의미는 우리는 이제껏 사회적 통제의 방식을 무의식적으로 수용하고 그것을 옳게 봄으로서 인권과 평등과 존엄에 대한 부당함에 간접적으로 동의해왔음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는 것은 '타인의 취향을 인정하는 첫걸음'이기도 하다.


  영화를 통한 인권감수성을 알고 깨달아가기란 이 책의 큰 틀을 다른 의미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문화와 예술이라는 것은 인민대중의 첨예한 관심을 증폭시키고 제도화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동시에 집단이 깨닫지 못하는 보편의 문제를 여러방식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한다.  역할의 다양성이라는 면에서 문화와 예술의 모습을 규정지을 수는 없지만, 이런 모습들은 진정한 역할의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고 그런 매체의 역할을 글을 통해 쉽게 설명하는 작업은 세세하면서도 좀 더 깊은 사고와 이해를 유도한다는 점에서 의미있어 보인다.  인권과 존엄에 대한 감수성을 편하고 부드럽게 깨닫게 해준다는 면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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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도 말고 덜도 말고 쫄깃 - 메가쑈킹과 쫄깃패밀리의 숭구리당당 제주 정착기
메가쇼킹.쫄깃패밀리 지음 / 청어람미디어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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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제주정착기는 트윗을 통해서 이미 오래전부터 생중계되어 왔다.  그래서 트윗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그의 모든 일거수 일투족을 알 수 있었다.  사실 메작가를 위시한 쫄패들의 안정적인 제주정착의 한 줄기는 트윗을 통해서라 해도 무리는 아니다.  그가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던, 그의 노력과 생각하는 것들의 진정성은 적절한 방법과 모습으로 보여졌고, 그것은 지금 현실의 모습으로 구체화되어 오기까지 수많은 유형과 무형의 도움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긍정만큼 비판적인 시선도 많았고, 제주 안에서도 그런 그의 모습에 대한 여러 의견들을 감지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그는 지금 나름의 순항끝에 책까지 내는 수순에 이른다.


  개인적으로 쫄패들의 순항을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메작가가 가진 생각들도 많은 부분에서 공감하고 그들의 노력은 독특하지만 서로간의 신뢰와 진정성에 기인하고 주변을 배려한다는 모습에서 어쩌면 이상적인 제주정착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이기 충분해 보인다.  자주가지는 않지만 어쩌다 가끔씩 가보게 되는 쫄깃센터의 모습과 분위기는 그런 모습들을 바탕으로 강요되지 않는 자유로운 질서가 엿보이고 운영의 진지함이 느껴진다.  그 자체가 쫄패들의 마음임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같은 제주안에서 사는 나 마저도 어떤 아련함과 부러움을 느끼게 하는 이 책을 통해 과도한 '제주앓이'를 유발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물론 이 부분은 내 블로그를 통해 어떤 고민이 느껴지지 않는, 마냥 화려한 제주살이를 이야기하는 내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이미 제주는 인구유입으로 인한 인구순증가 추세를 보이면서 곳곳에 게스트하우스, 펜션, 까페가 난무하는 중이다.  괸당문화의 이주민 배척분위기와 제주도정의 이주민에 대한 무관심, 그리고 딱히 어딘가에 들어가 할 수 있는 직업적 환경의 척박함이 겹치면서 꿈을 안고 들어온 제주의 삶이 현실이라는 벽에 부딫혀 여기저기 좌초되고 있는 모습을 눈에 띄게 많이 볼 수 있다.  그런 현실에서, 마냥의 '제주앓이'는 사뭇 위험해 보이는 부분이 적지 않다.  물론 책의 내용에도 제주에서의 삶이 녹록하지만은 않음을 밝히고도 있음이 사실이지만, 이미 현실적 고충에 대한 성토가 곳곳에서 터져나오고 있는 상황에서 쫄패의 '나름 성공스토리'는 평균영역을 벗어난 범위의 독특한 케이스라는 점에서 '일반적이지 않음'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메작가 특유의 말장난같은 단어의 위트가 곳곳에 배어있으면서도 진정성과 성찰의 모습, 그리고 자유롭고 싶은 의지가 진하게 배어있다.  그런 의미에서 같은 제주에 살면서도 부러울 수 밖에 없는 모습이다.  그는 말한다.  제주의 삶이 지금까지는 무척 행복하고 재밌지만, 언젠가 행복이 시들해지고 재미가 없어지는 지점이 오면 이를 다시 회복할 수 있는 어딘가로 떠나갈 것이라고..  그는 분명 개인의 행복과 삶의 의미를 깊게 이해한 사람이다.  개인의 행복과 즐거움이 타인과 주변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카잔차키스가 만난 사람, 조르바와도 같은 사람이다.  물론 책에 묘사된 조르바의 거친 모습과는 달리 깡마르고 머리숱 없어 부실해보이긴 하지만(!), 생각과 마음은 조르바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자유인이다.  제주라는 공간에서 보고 느낀바가 작게나마 있어 이 책의 소감이 입체적이긴 하지만, 나는 그의 자유의지를 마음 깊이 존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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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의 진실 - 갤브레이스에게 듣는
존 케네스 갤브레이스 지음, 이해준 옮김 / 지식의날개(방송대출판문화원)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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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브레이스에 붙은 양심적 경제학자라는 말에서 나는 자본주의의 어떤 대안을 기대했던 것 같다.  마치 우리나라의 장하준이나 김상조와 같은, 미쳐 돌아가는 신자유주의 자본에 대해 착한 자본주의로 돌아설 수 있는 소소하거나 거창한 대안을 제시하는 모습을 기대한 것이다.  책을 들었을 때, 생각외로 무척 얇은 분량을 보며, 얼마나 명쾌한 대안을 제시하였길래 이렇게 분량이 적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실 이것은 나의 갤브레이스에 대한 철저한 무지때문이다.  갤브레이스는 자본주의의 행보에 이런저런 땜빵식의 대안을 제시하는 그런 경제학자는 아니었다.  경제학의 엘리트이자 미국의 수뇌부와 학계에서 중요한 일들을 모두 경험하고 지휘하고나서 늘그막의 말년에서야 이런 분명한 에세이를 써내었다는 것이 한편으로는 얄밉고 허탈하기도 하지만, 그는 분명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자본주의는 사기라고 말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자본주의는 용어의 선택에서부터 자본의 운용까지 치밀하게도 소수의 경제권력을 거머쥔 기업들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고 있고, 이들이 다수의 인민에게 행사하는 모든 행위는 명백한 사기이지만 현실적으로 법적인 제재가 가해지지 않는 '처벌받지 않는 사기'라 설명한다.  이는 우리나라에서도 이야기되는 '권력은 자본에게로 넘어갔음'과 일맥상통한다.  기업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일반 소비자로 표현되는 다수 인민을 현혹하고 조종하기도 하지만, 이제는 정부의 공적영역에까지 마수를 뻗침으로서 정부의 정책까지도 옆에서 간섭하고 조종하기까지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실제로 효율성이라는 명목아래 정부가 통제해야 할 공적영역을 민영화라는 미명아래 민간기업에게 넘겨 위험한 자본의 본능아래 국가시스템의 근간까지 맡겨두려 한다.  방식이야 어찌되었든 이런 현상은 결국 자본의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기업이 국가시스템의 대부분을 포함한 인간의 삶 전반을 지배하게 만든다.  그것은 법적으로도 제지가 불가능한 방법으로 즉, 합법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결론적으로는 전체 인간의 삶을 파국으로 치닫게한다는 명백함때문에 '처벌받지 않는 사기'라는 논리가 성립되는 것이다.  말년의 갤브레이스의 축적된 경험은 사기극일 뿐인 현대의 경제시스템에 대해 명백하고 명쾌한 고발과 비판을 날린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동의하는 데 크게 어렵지 않은 내용이다.  현재의 자본주의는 소수를 위한 다수의 피해가 극심하며, 지구전체의 계 안에서 인간의 파괴행위가 극대화된다는 점에서 비판적 시선을 가지고 있고, 자본과 국가를 넘어선 대안에 대한 일말의 관심을 가지고 있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좀 더 새롭게 받아들인 것이 있다면, 갤브레이스가 이 책에서 언급한 기업의 국방에 대한 간섭인데, 국민의 간섭이 비교적 적고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될 국방사업에 기업이 관여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그것은 정부의 국방정책과 군수산업에 간섭과 투자를 함으로서 정부가 명분을 세운 전쟁행위에 기업의 이윤추구행위가 덧붙여진다는 것이었다.  지금의 이라크 공습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공습이 미국의 전쟁물자와 기업이 고용하고 훈련시킨 용병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면에서 자본의 이윤추구는 이제 인간의 생명보다도 더욱 중요한 사안이 되어가고 있으며, 이는 결국 자본주의의 원활한 작동을 위해 지구 어디에선가는 반드시 전쟁이 일어나야만 한다는 논리가 성립이 된다.  세상의 미래는 알 수 없음이 자명하지만, 그 방향은 분명 친인류적이거나 평화적인 것은 아님 역시 자명한 일이다.


  갤브레이스의 마지막 저서인 이 책은 명쾌한 고발과 비판은 분명하나 아쉽게도 대안은 없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저자가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았거나 하나의 숙제로 남겨두었을 수도 있지만, 저자의 비판의 대상이 현대의 큰 기둥의 하나인 자본이라는 점에서 언급된 대안은 없지만서도 대안은 분명해보인다.  그것은 자본을 거부하는 것이다.  물론 막연하다.  개인적으로는 녹색평론을 읽으며 반자본적 대안에 대한 힌트와 접근법을 하나의 시선으로서 받아들이고 있어 자본거부라는 막연함은 조금 덜한 느낌이다.  조금 돌려 말하자면 갤브레이스는 우리에게 숙제를 하나 내 준 셈인데, 그것은 자본의 반인간성과 패악을 깨달은 사람들이라면 조금씩이라도 시작해야하는 당위가 아닐까?  이 역시 쉽지 않다.  개인적으로 권해보는 고민의 시작은 '불필요한 편리'를 깨닫고 지양하는 일, 그리고 삶에 '실질적 필요'는 얼마만큼인가를 생각해보는 일이다.  작은 고민의 시작이지만 커다란 의미를 지닐 것이라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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