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세트 - 전2권 열린책들 세계문학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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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으면서 작가가 이토록 완벽해보이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있나 싶었다.  중세철학의 원리들과 역사에 대한 지식, 그리고 중세권력의 분투, 종파간의 갈등과 수사학, 세상에 대한 관점 등등이 추리소설이라는 형식 안에서 이토록 긴장감있게 구성되는 걸 보면 소설을 읽으며 이해를 하려하기보다는 작가의 해박함과 완벽함에 감탄부터 하게 된다.  마치 틀 속에 자신이 가진 모든 지식을 넣고 잘 섞어 흥미로운 미로를 만들어내는 느낌이랄까?  


  호르헤 노인과 윌리엄 수도사가 마지막 순간에 만나 나눈 이야기를 들으며 아드소가 느낀, 서로가 각각 만들고 향유한 지적 즐거움과 치밀함을 서로에게 칭찬받고 싶어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어쩌면 작가가 원하는 느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 사실과 실존인물이 조금씩 섞여 만들어 낸 중세의 갈등과 철학은 무조건 책을 펼치고 읽는다고 해서 쉽게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는 내용은 아니었다.  그것을 추리소설이라는 형식으로 구성해서 완벽한 하나의 이야기로 만들었다는 것은 작가로서 소설속의 유능하고 영리한 윌리엄수도사와 동일시하고 싶었을지 모를 일이다.  어쨌든, 이 작품은 작가가 글을 쓰면서 자신이 가진 지식의 옷을 입고 능란한 춤을 추는 느낌이다.


  황제와 교황의 갈등, 종파간의 갈등, 그 안에서 실질적 이유가 되는 권력에의 욕심, 그리고 왜곡된 진리추구에의 방법, 화형, 살인..  그 모든 것의 위에는 신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신을 이유로, 신을 이해하고 다가가는 방식을 이유로 인간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판단하고 처벌하고 죽인다.  그것은 과연 신을 위하는 진정한 모습일까?  하나하나 진실이 드러나면서 동시에 밝혀지는 것은 그런 것이다.  인간은 과연 신과 진리를 위해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의문..  불길에 휩싸이며 무너져버리는 수도원은 결국 신에게 다가간다는 이유로 인간이 쌓았다가 무너져버린 바벨탑의 또다른 모습이었다.  신과 진리를 추구하는 수도사들이 모인 수도원의 몰락..  인간은 신의 존재를 이해하지도 못할 뿐더러 존재를 추구하는 방법도 왜곡시킬 뿐임을 말해준다.  그 모습은 현재에도 충분히 보고 느낀다.  그러면서도 신의 존재를 포기하지 않는 인간은 영원히 우매한 것일까, 아니면 알뜰하게 활용할 줄 아는 영리한 존재들일까? 


  작품은 정말 쉽지 않다.  세 번의 번역교정 작업에도 강유원 선생님이 철학적 이해문제와 더불어 지적한 오역부분이 230군데라는 사실은 그냥 읽어내려가기에 미안함마저 느끼게 하는 어려움이다.  동시에 소설안에 차려진 지적 향연의 즐거움은 조금만 이해할 수 있다면 간접적으로나마 즐길 수 있는 요소이기도 하다.  개인적으로는 무척 엄청난 부피와 깊이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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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에타 랙스의 불멸의 삶
레베카 스클루트 지음, 김정한.김정부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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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인 나도 헬라세포라는 단어는 종종 들어보았다.  임상에서 활동하는 입장에서 쉽게 접할 수는 없지만 교과서나 논문에서 종종 들어보았던 이름은 그저 여러 다양한 실험대상세포 중 한 종류로서만 인식되었다.  과학은, 이제까지 이루어져 온 토대를 당연하고 가벼운 현재의 결과로 인식하고 미래의 숙제에 너무 비중을 두는 경향이 있다.  숙제에 치중하는 과학의 입장에서 과거는, 잠시 머리를 식힐만한 잔잔한 이야기거리로 생각하는 경향이 종종 있다.


  그러니까 이 이야기는 헬라세포의 과거이야기이다.  수많은 과학자들이 헬라세포를 통해서 자신이 생각하는 의학적 생물학적 숙제를 해결하려 골몰하는 현재에, 그 유명한 헬라세포는 과연 어떻게 태어났고 이제껏 어떤 역사를 만들어왔는가를 돌아보는 작업이다.  하지만, 그것은 마냥 머리식힐만한 잔잔한 이야기는 아니다.  헬라세포의 역사 안에서, 윤리적이거나 도덕적인 또는 도의적이거나 합법적인 문제의식을 들추어보는 작업이기도 한 것이다.


  헬라세포의 탄생에서부터 이제까지의 역사엔 크게 두 가지의 문제를 지닌다.  첫째는 헬라세포의 모체인 헨리에타 랙스가 흑인이었다는 점에서 인종차별의 문제가 불거지고, 두번째는 헬라세포라는 인체조직을 사용함에 있어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합의가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문제의 관점은 사실 수많은 인식들이 형성된 상태의 현재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여전히 보편적인 삶과는 조금 거리가 있어보이는 헨리에타 랙스일가의 모습에서 문제는 더욱 부각되어진다.  모든 것이 인종차별적 구조안에서 이루어졌던 시대에 병원안에서 흑인들에 대한 대우란 그닥 다르지 않은 상황과 인체조직을 사용함에 있어 윤리도덕적 문제의식이 희박했던 시대의 상황은 헨리에타 랙스의 암조직을 채취하고 활용하는 데에 있어 의료인으로 하여금 어떤 불편한 감정을 유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시간이 점점 흐르며 인체조직 활용에 대한 윤리도덕적인 그리고 법적인 인식은 체계적으로 성장하는 반면, 헬라세포는 여전히 광범위한 실험에 사용됨에도 불구하고 그런 인식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 있다.  이런 현상을 합리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는, 아마도 현재 우리의 판단의 틀이 법적인 테두리안에서 이루어지며 안게 될 이러저러한 복잡한 부담들과 다툼들에 대한 두려움때문인지 모른다.  그래서 헬라세포는 단지, 도의적인 인식과 기념차원에서 머물러지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헬라세포의 존재를 알게 된 랙스일가는 현재의 삶이 그리 크게 변화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맘은 더욱 복잡해졌고 헬라세포의 과거를 알아내려는 이들의 접촉에 무척 귀찮아하기까지 한다.  헬라세포가 증식하게 두면 다시 엄마로 재생하는 거 아니냐 말할 정도로 그리 지적이지 않은 사람들이 보여주는 삶은 그닥 행복해보이지 않는 미국의 흑인하층민의 모습 그대로이다.  그러나 현재의 시점에서 헬라세포 자체이던, 헨리에타 랙스의 자녀들의 삶의 모습이던 어느것 하나 쉽게 법적이거나 윤리적인 문제를 따지지 못한다.  어느누구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제는 인식틀의 바깥에 존재하는 문제로 남아버린 헬라세포의 문제는 단지 우리에게 어떤 자각을 끊임없이 요구할 뿐이다. 여전히 의학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 중요하여 널리 활용되지만, 그에 대한 윤리도덕적인 문제는 논외로 남은 헬라세포의 이야기는 아쉽지만 딱 그 지점에서의 딜레마로 마무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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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운디드니에 묻어주오 - 미국 인디언 멸망사
디 브라운 지음, 최준석 옮김 / 한겨레출판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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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들은 과연 인디언들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읽어나가면서 느껴지는 백인들의 교묘함과 폭력적 우월함, 그리고 그 앞에서 쫓겨나고 스러져가는 인디언들의 모습.  그 모습에서 문득 떠오른 것은 어릴적 내가 보았던 만화속에서의 인디언 캐릭터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상의를 벗고 독수리깃털을 길게 꽂고다니며 악역의 모습이거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등장했지, 절대 친구의 모습으로 등장한 적은 없었다.  인디언들은, 철저하게 적이나 사라져야 할 야만인의 모습으로 인식되어야만 했다.


  '우월한 문명'을 지닌 백인이 신대륙으로 진입하면서 보여진 역사적 현상의 하나일 것이다.  잉카제국에 스페인 사람들이 들어서면서 보여준 잔인한 살육이나 호주에 백인이 들어서면서 태즈매니아인들이 당했던 학살 등등에 이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백인이 들어서면서 보여준 학살,  달라진 건 백인이 세운 체제가 잔인함과 더불어 교묘함을 더한 것이랄까? 


  문득 궁금해진다.  '우월한 문명'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폭력과 탐욕의 다른 말일까?  역사속에서 백인의 영역확장활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해왔던 토착민의 멸망을 초래했다.  인디언과 백인간의 갈등만 보아도 갈등구조는 순진함과 포용 대 교묘함과 폭력의 구도였다.  그 구도에서 백인의 승리를 정당화한다면 우리는 인간정신을 자연에 의존하여 어우러지는 삶과 타인에 대한 포용을 말살해버리는 폭력과 탐욕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의 역사적 결과는 '우월한 문명'을 폭력과 탐욕에 기초한 인간정신으로 보아야 할까?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평화와 포용을 이야기한다.  인간역사의 이 딜레마는 또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것일까.  


  백인과 인디언과의 생각은 근본적인 차이가 있었다.  인디언에게 땅은 태어나 의지하며 살고 묻혀야하는 가장 소중한 존재였고 들소는 필요한 만큼만 잡아 식량과 살림으로서 활용하는 공존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백인에게 땅은 돈을 주고 살 수 있으며 아무렇게나 파헤쳐서 돈이 될만한 것들을 찾아낼 대상이었고, 들소는 단순히 가죽을 벗겨 팔아먹을 수 있는 대상일 뿐이었다.  인식과 삶의 방식의 차이에서도 역사는 자본에 기초한 탐욕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이는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여전한 딜레마를 안겨준다.  그런 방식으로 발전해 온 인간의 삶은 여전히 그런 방식에 의존한 삶을 살면서 자연과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디까지 잘못 들어온 것일까?  다시 되잡으려면 어느만큼 되돌아가야 하는 것일까?  그런 의미에서 문명사회가 멸망시킨 과거의 수많은 사람들과 사라져버린 삶의 모습들은 인간의 공존과 지속 가능성에 대한 스승이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는 부끄럽고 민망해도, 역사라는 우리의 과거를 되짚어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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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싸우는 사람들 우리시대의 논리 14
서형 지음 / 후마니타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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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이 법을 다루는 이들의 폐쇄되고 모순된 모습을 고발하며, 법이 독점된 권력이 되며 사람들과 얼마나 거리감있는 존재인가를 이야기했다면, 이 책은 그런 독점된 권력에 대해 힘없는 일개 인민이 어떻게 싸우고 있는가를 구체적으로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을 읽다보면 글이 쉽게 들어오지 않는 기분을 느낀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번째, 여기저기 인용된 법정대화록이나 판결문 등의 단어들이 너무 생소해서 눈에 쉽게 들어오지 않고 잘 이해되지 않는다.  두번째, 너무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건 속에 줄줄이 겹치고 꼬여있는 소송들이 개연과 인과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는 이 책의 내용이 어렵거나 어딘가 어색하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내 생각으로는, 이 현상은 조금은 다르고 깊게 해석되어야 한다.


  첫번째로 수많은 법률용어들이 난해하다는 것은, 법이라는 인간의 질서규범을 일부 전문가들이 독점해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어와 개념을 일부러 어렵게 만듦으로 거리두기를 시도하고, 거리가 생긴 법을 전문가라는 집단이 독점화하면서 거리만큼 권력을 거머쥔,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안에서 법이 존재하는 위치를 간접적으로 고발하는 의미를 지닌 것이다.  두번째로, 소송이 줄을 잇는 것은 벌써 20년 이상을 자신의 억울함을 벗기기 위해 스스로 법을 공부하고 공부한 법대로 소송을 이어가는 일개 소시민의 싸움의 방식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어찌보면 너무 곧바르다거나 끈질기다거나 아니면 지저분하게까지 보일 수 있는 모습이지만, 권력화된 법 앞에서 일개 소시민이 소신과 진실을 앞세워 싸울 수 있는 방법은 그다지 많지 않은데다가 권력이 주는 위압을 이겨내어야 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읽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해진 사건개요와 줄소송은 법 앞에 선 소시민의 현실을 상징해주는 모습인 것이다.


  재밌는 것은 재판의 진행과 판결에 따라 진실은 수시로 모습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 책의 주인공이 주장하는 사건개요가 마냥 사실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독자가 당사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20년간의 법정싸움이 이어지는 내용을 읽다보면, 재판이 길어지고 판사가 바뀌고 변호사가 바뀌며, 원고와 피고, 증인과 증언이 반복되고 바뀌며 진실과 거짓, 이해와 판단은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결국 법에 따른 판단도 사람의 일이기에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는 현상인걸까?  아니면 권력화 된 법의 테두리에서 이를 다루는 사람들의 어떤 매너리즘이라 해도 되는 걸까?


  오랜 시간동안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린 주인공의 싸움과, 법적 억울함을 가지고 조직까지 만들어내며 법과 대항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자면,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지만 존재함은 확실한 법적인 어떤 허점을 느끼게 된다.  동시에 법은 무척 먼거리에 있음을 느낀다.  그런 법과 싸울 수 밖에 없는 소시민들의 힘이란 무척 미욱해보인다.  지리하고 지저분해보이기까지 한 이 싸움을 끝까지 읽고도 뭔가 쉽게 말할 수 없었던 가장 큰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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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법의 풍경 - 잃어버린 헌법을 위한 변론, 개정증보판
김두식 지음 / 교양인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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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내내 '전문집단은 지식을 독점함으로서 하나의 계급이 되고, 독점된 지식은 점점 무식해진다.'는 말이 떠올랐다.  이반 일리치가 한 이야기인데 독점된 지식은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서 지평을 넓힐 수 없다는 의미일 것이다.  당장의 내가 속한 분야인 의학도 서양의학을 습득한 의사들을 중심으로 지식을 독점한 집단이 경계를 분명히 함으로서 다른 의학의 가능성이나 연관성을 철저히 배제시킨다.  독점된 지식은 다소 일방적인 성격의 공급체계를 통하여 권력이 되고, 경계지은 사고는 다른 의료의 가능성과 다양성을 무시한 채 고집스럽게 자신을 정당화시키기에 급급하다.


  개인적으로는 법에 대해 잘 모르니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의 시선으로 이 책을 바라볼 수 있었다.  법 역시 전문가집단의 소유물이 된 채, 좀체 사람들과 친해지지 않는 모습이다.  오히려 독점을 통한 권력을 더욱 강화시킴으로서 거리감을 두려하는 느낌이다.  의학 역시 비슷한데, 용어와 개념을 이해하기 어렵게 유지함으로서 거리감을 공고화 한다.  조금 다른 면은 우리나라의 법 전문가들의 배출방식이 상당이 획일화되고 좁다는 것인데, 사법연수원이라는 유일한 통로로 나온 사람들의 구분법이 단지 졸업기수 차이라는 점과, 그렇게 얽힌 사람들이 판사 변호사를 나누며 법적 판단에 개인적 이해가 얽히지 않을 수 없는 구조라는 점은 법의 객관성과 공정성에 대한 고민을 다시금 하게 만드는 모습이다.


  그렇게 내부의 한계를 지닌 법이 사법독립이라는 면에서도 그리 당당하지는 못했다.  법체계 자체와 정치권력과의 거리두기에 실패한 사법체계가 이중으로 보여주고 행해온 지금까지의 모습은 자체로 권력과 폭력이었다.  권력과 폭력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단어들과 개념들로 채워졌을 때, 두려움은 극대화된다.  그런 법에 인민이 친숙해질 일은 만무할 뿐이다.  법을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인민에게 주어진 결과는 결국 자신이 법의 주인이라는 사실과 법을 통해 주어진 권리를 망각한 것이다.


  망각이 폭력을 더 키워온 것 역시 사실이고 역사였다.  법의 진정한 목적은 평화라 이야기한다.  동시에 평화를 얻는 수단은 투쟁이건만, 법이 말하는 우리의 권리와 법에 대한 우리의 권리를 망각한 현실은 법이라는 폭력을 더욱 키웠을 뿐이었다.  내가 읽은 책은 개정판이긴 하지만 이 책이 나온 건 8년전인데 그럼에도 읽고나서의 어떤 신선함, 자각같은 것을 느꼈다는 것은 나 역시 망각의 늪 안에서 유유자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되돌아보게 되었다.  동시에, 참 답답했던 최근의 현실 안에서 사람들이 점점 변화에 대한 여론을 만들어내고 소소하지만 다양한 행동들을 만들어내는 모습을 보면 우리가 점점 법이라는 권력화된 타자를 우리에게로 조금씩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느끼게 된다.  이 책이 그런 노력에 근본적 이해를 도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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