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조세희


조세희의 '내 그물로 오는 가시고기'(이하 내 그물)는 중심 플롯이 전개되면서 여러 삽화가 중간에 삽입되어 표현하려는 대상을 중층적으로 조각하는 특징을 지닌다. 여기서 삽화는 사건을 입체적 시각에서 조명하는데 도움을 주며 등장하는 인물의 내면을 형상화하는데 마치 몽타주와 같은 구실을 한다.

'내 그물'의 중심 플롯은 화자의 숙부를 살해한 난장이의 큰 아들이 처벌을 받게 되는 흐름에 따라 전개된다. 단순해 보이는 이러한 구조는 여러 삽화가 삽입되면서 복잡해져 가는데 우선 사건 자체와 관련해서 보면 범인이 살해하려던 대상은 숙부가 아니었으며 숙부는 화자의 아버지와 닮았다는 이유로 살해된 것일 뿐이다. 화자는 자신의 아버지가 살해될 수도 있었던 상황에 대해 위협을 느끼며 아버지를 비롯한 부유층의 행동을 합리화해 보려고 하지만 화자가 나름의 논리로 내리는 판단은 일면 타당성이 있어 보이면서도 곧이어 벌어지는 반전을 통해 스스로 오류였음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재판이 벌어지는 상황에서 화자는 노동자가 단순한 열등감 때문에 부유층을 증오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막상 지섭의 증언을 들어보면 그것은 오히려 아버지의 노동력 착취에 대한 정당한 항변이 되는 것이다. 또한 노동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사촌과의 대화 역시 살인사건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부조리한 현실을 우회적으로 드러내 준다.

화자의 인물됨을 형상화하는 삽화의 경우를 보면 먼저 화자의 할아버지를 언급할 수 있다. 할아버지는 히틀러식 사상을 지닌 인물로서 󰡐나는 언제나 옳다. 나를 믿고, 복종하고, 싸우라󰡑 라는 문구가 나타내는 것처럼 자기중심적이며 동시에 약육강식의 세계관을 신봉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상에 걸맞게 사냥을 즐기기도 했는데 화자가 죽이려고 했던 늙은 개는 젊은 시절 할아버지의 사냥도구로 사용되었다. 할아버지가 개를 도구로 사용했던 방식을 그 다음 세대인 화자의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를 상대로 반복하는 것이다. 다만, 사업의 규모가 커지고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에 대한 태도가 더욱 잔인해지는 것이 발전(?)적인 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것은 곧 화자에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야 한다는 압박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부담감으로 인해 화자는 경쟁자인 형들을 두려워하게 되고, 한편으로는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쫓아가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가족 안에 도사리고 있는 父性的 시니피앙으로써의 정신적 억압의 기제가 화자의 세상에 대한 일그러진 시각을 설명해 준다.

형과 관련된 삽화는 화자의 여성에 대한 태도 원인을 짐작하게 한다. 그는 자기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고 여성에 대해 미숙하면서 동시에 성급한 태도를 보이는데 이것은 형이 교통사고를 당한 사건과 관련해 자신에게도 죽음이 가까이 다가올 것 같은 불안감이 표출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따라 화자는 살아있는 동안 어떻게 해서든 자기 욕구를 해결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게 되고 약육강식의 가족 내에서 느끼는 압박과 스트레스가 이러한 출구를 통해 배설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알몸으로 더러운 정액을 빨아들였던 계집애'와 같은 표현을 통해 알 수 있듯 형의 행동에 대해서는 증오심을 드러내는 모순된 감정을 보여준다. 작가는 이러한 갈등과 모순을 통해 자본주의의 욕망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즉, 작품의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물로 온 가시고기에 의해 살갗이 찢어지는 것처럼 자본주의의 욕망에 되레 찔리게 되는 부유층을 풍자하는 작가의 비판적 태도를 읽을 수 있다.

화자가 꿈에서 본 요트는 억압된 구조로부터 빠져나가려는 하나의 탈주선인지 모른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아버지에게 밝고 큰 소리로 떠들며 맞이할 준비를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이미 세속적인 가족구조 내에서 벗어나기에는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의 노예가 된 현대인들은 요트를 탈 꿈마저 버린 채 살아가고 있지는 않을까? 자신의 살점을 뜯긴 노동자가 가시고기가 되어 세상을 공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오늘도 나는 어떤 억압에 시야를 가린 채 가시고기가 되어 가는 이웃을 외면하지는 않는지 되짚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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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당신의 추천 도서는?


<바람의 넋>이라는 제목은 우선 자유로운 느낌이 든다. 더군다나 여성작가가 썼으니 아무래도 여성 해방에 관련된 내용이 아닐까하고 짐작하며 읽으니 긴장이 되기도 했다. 남성 중심의 사회에서 아등바등하며 자기 존재의 의미를 되묻는 여성의 이미지는 투사처럼 위협적이기까지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작품을 읽고 난 뒤 작가가 남성과 여성의 구도를 단순한 정과 반의 입장에 세우지는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남성의 시각에서 볼 때 은수는 위협적이기 보다는 넋이 나간 여자정도로 여겨질 뿐이다. 과연 그녀는 어디에서 불어와 어디로 갈지 모를 바람일 뿐일까? 이제 그녀와 그녀의 주변 인물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부모를 잃은 은수의 행동은 위에서 언급했듯 무계획적이고 불안정하다. 작가는 표지판을 잃은 은수의 방황을 그녀 자신만의 폐쇄적시점이 아닌, 아내를 기다리는 세중의 시점과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을 교차함으로써 다소 진부한 소재가 될 수도 있는 부모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주제를 호소력 짙게 표현하고 있다. 만일 여성의 입장에서 작품이 전개되었다면 일방적이고 고집스런 이야기가 되었을지 모른다. 그랬다면 집 밖을 헤매는 여성의 입장에서 구차한 변명을 해야 했을 테고 어떻게든 독자를 설득시키려 애쓰는 작가의 의도가 드러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반면, 세중은 가식 없는 남성의 입장에서 객관적이고 솔직하게 자신의 불만을 표출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중은 끝내 그의 아내를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 이유는 아마도 남성과 여성이라는 태생적 근본의 차이 때문인지 모른다.

메를로 퐁티는 신체가 공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공간을 출현시킨다고 했다. 가족의 구성원은 집이라는 공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집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세중은 내 손으로 일군 가정만은 새의 보금자리처럼 포근하고, 호두껍질처럼 견실하고, 안전해야 한다는 신념을 지니고 있다. 바슐라르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의 둥지는 작은 공간임에도 그 내밀함이 우주와 같다. 세중은 몸으로 벽을 밀어 둥근 공간을 만드는 수컷 새처럼 자신만의 아늑한 집을 꿈꾸었던 것이다. 자신의 체온과 살이 맞부딪혀 생성되는 공간은 단지 기하학적 수치나 재료의 성분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은 자신에게 인식되는 현상의 뼈대만으로 그것이 대상의 전부라고 파악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고 지칠 때 쉴 수 있는 공간, 따뜻한 웃음소리와 서러운 눈물이 배인 집안의 곳곳은 이제 인간의 몸과 분리될 수 없는 일부처럼 느껴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 상황에서 세중의 집은 호두껍질처럼 견실함을 기대하기 어려운 ‘도시의 집’이다. 그는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가 손바닥처럼 빤해서 싫다고 말을 하는데 이는 그가 사는 집이 내밀한 공간, 즉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무언가를 안에 감추고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중은 ‘화가 나거나 뭔가 마음에 차지 않을 때 들어가 숨어 있을 수 있는, 아무도 찾아내지 못할 장소’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그런 공간을 만드는 데에 있어 아내가 차지하는 비중은 다른 구성원에 비해 더욱 절실하다. 세중은 자신이 머무는 집에 본인 혼자가 아닌 아내를 비롯한 가족의 땀과 체온이 섞이길 기대했던 것이다. 따라서 아내의 손때와 숨결을 잃어버린 집은 더 이상 온전한 보금자리로써 존재하지 못하고 세중은 아내 역시 그 사실을 알면서 밖으로 나갔다고 믿고 있기에 분노를 참지 못하는 것이다.

세중은 은수를 원망하면서도 그녀가 집을 나간 이유에 대해 이성적으로 추리해보려고 하지만 정답을 찾지 못한다. 왜냐하면, 은수의 행동은 이성적으로 내린 판단에 의한 것이기 이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 결과이기 때문이다. 작품의 내용 중 다리가 잘린 환자가 자신의 다리가 잘린 후에도 그 부위에 마치 다리가 있는 것처럼 감각을 느끼는 ‘虛體現像’이 등장하는데 이것은 메를로 퐁티가 몸 철학을 진척시키는 과정에 있어 주요 근거로 내세우는 요소 중 하나다. 즉, 몸이 우리 삶의 방향을 결정지으며 이성은 몸의 행로를 쫓아가기에 바쁘다는 말이다. 인간은 때로 본능적으로 움직일 때가 있다. 물론 이것은 신경의 단순한 반사적 반응일 수도 있고 호르몬의 이상으로 발생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문제는 근본적으로 마음으로부터 온다. 은수는 마음이 갇혀 있기에 몸은 그 보상을 받으려고 바람처럼 헤맨다.

은수가 이처럼 ‘몸의 시대’를 체험하는 반면 세중은 아직 맹신적 이성주의에서 빠져 나오지 못한 근대적 인물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이뤄진 것이 현실화되어야만 한다고 믿는 그는 아내의 충동적 행동을 이해하지 못한다. 이처럼 세중은 삶에서 별다른 선택 사항 없이 그저 주어진 대로 걸어야 하는 대다수 한국 가장의 모습을 대변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오랫동안 관료적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위에서 명령을 내리면 밑에서는 그 명령에 따라 로봇처럼 움직이면 그만이었다. 때로는 그 명령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문제는 주어진 명령에 따라 얼마나 일을 반듯하게 수행해 내느냐에 달려있었다. 세중은 어쩌면 이러한 사회구조에 길들여진 탓에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나 더욱 당황하게 되는 것인지 모른다. 나름대로 이런저런 가정을 세우고 추리를 해보지만 결과에 다다라서는 역시 아내를 원망하면서 초조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가 근대적 유형의 인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도, 아내를 이해할 여력을 남겨두지 못하는 것도 아들인 승일이에 대한 걱정이 큰 몫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아내가 집을 나갔다고 해서 자기 생활이 당장 무너지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승일이에게 있어서는 어머니의 부재가 지워지지 않을 상처로 남게 될 것이다.

글 전체 내용 안에서 승일의 시점이 크게 부각되지는 않지만 아이는 어쩌면 가장 큰 피해자일 수 있다. 어린이에게 어머니가 없는 집에서 살도록 한다는 것은 가혹행위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이에게는 집이라는 공간 안에 어머니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이가 정서적으로 성숙해 가는 과정에 있어서도 아버지보다 어머니가 차지하는 비중이 상대적으로 더 클 수밖에 없다. 어머니는 아이에게 곧 집이고 휴식처인 것이다. 승일이는 그런 면에서 보금자리를 잃어버린 어린 새와 같다. 자기 둥지를 스스로 짓지도 못하고 언제나 어미 새가 날아와 주기를 바라는 입장이다. 그래서인지 어머니의 부재에 지친 승일은 치마가 찢어지도록 은수를 붙잡는다. 이러한 모습은 어머니의 품에 대한 아이의 절실한 심정을 드러내 주는데, 방황하는 은수에게도 아들의 품이 되어야할 어머니로서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아픔이었을 것이다. 주부가 된 은수가 바람처럼 날아가 자신의 밑바닥을 들추어 음미해볼 시간조차 없는 이유는 바로 한 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아이 때문이다.

은수는 산에 갔다가 남성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난 후 卽自的 과거의 세계로 빠져든다. 의식이 약화되면서 ‘불현듯 기억의 맨 밑바닥에서 물에 잠긴 사금파리 조각처럼 빛나는 최초의 기억, 튀어 오를 듯 강한 햇빛과 나뒹굴어 진 두 짝의 고무신'을 떠올리게 된다. 마음에 새겨진 상처는 지워지지 않고 내면 깊숙한 곳으로 주름져 있다가 인식적 폭력을 당하는 순간 트라우마로 펼쳐지는 것이다. 뚜렷이 인식되지 않으면서 결코 쉽게 지워지지 않는 과거는 언제나 현재와 맞닿아있다. 인간은 언제나 현재라는 공간 안에서 살지만 과거라는 씨앗은 우리 몸 안에서 언제나 꿈틀대고 있는 것이다. 봉우리를 열지 않은 과거는 제 본 모습을 펼쳐 보이지 않으면서도 현재를 사는 우리를 기웃거리도록 만든다. 은수는 접혀있는 봉우리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남편과 자식, 그리고 자기 자신의 몸에 상처를 입는다.

우리도 가슴에 감춰두었던 상처를 언제든 다시 꺼내어 볼 날이 있지 않을까? 마치 바람에 숨겨진 넋이 다시 숨을 쉬는 것처럼, 그리고 그 숨결을 따라 정처 없이 방황하는 시간이 올 것이다. 이것은 새로운 세상이 아니다. 이미 지나쳐 왔지만 놓쳐버린 삶의 흔적일 뿐이다. 잃어버린 흔적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도 없는 사막 위를 홀로 걸어가야만 한다. 나를 붙잡는 이들의 외침을 뒤로한 채 은수는 힘겹게 발걸음을 내딛었다. 과연 은수는 다시 돌아갈 수 있을까? 나는 이 글을 읽으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인간의 고독과 함께 가족이 지니는 소중한 의미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은수 역시 자신의 넋을 찾게 되면 그녀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을 돌아보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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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당신의 추천 영화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비디오 가게에서 너무 재미없고 고객들 반응이 형편없어서 폐기처분 했다던 영화, 보는 내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화가 났다던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인기 가수이자 월드 스타인 비를 보려고 했다거나 임수정의 빼빼마른 몸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했을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우들조차 자신이 맡은 역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을지도 의심스럽고 대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연기를 했는지, 혹시 박찬욱을 미쳤다고 욕하면서 겉으로는 열심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장르를 규정하자면 나는 코미디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웃기려는 흔적들이 역력했으니까. 굳이 비교해 보자면 ‘지구를 지켜라’와 조금 흡사하다고 할까? 물론 ‘지구를 지켜라’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적어도 정상인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소 엉뚱하고 자신이 믿는 대로 저질러 버리는 점은 있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일단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정상인과 일말의 소통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언어다. 정신병원 내에 있는 사람들은 비논리적, 비이성적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자신들끼리는 뭔가 의미가 통하는 것처럼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대변되는 정신병원 의사들과는 그야말로 개와 닭의 대화처럼 한쪽에서는 왈왈대고 다른 한쪽에서는 꼬꼬닭 한다. 아니 사실, 한쪽은 이성적인 쪽이라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한다. 바로 인류가 만들어 놓은 상징계 안에서 그들(바로 우리다.)은 안타까워하며 정신병자들을 치료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도와주려고 한다. 물론 강제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크다. 기억은 지워져도 좋으니 밥은 먹게 해달라는 말에 따라 전기충격 요법을 쓰기도 한다. 밥은 곧 인류의 언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곧 멸망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시인이다. 가수 비(영화 속 이름보다 그냥 실제 이름을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법원 판사로부터 점으로 소멸될 것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현대 시에 있어서 점으로의 소멸이나 사라짐에 관한 담론은 확대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나 이병률 시인의 ‘바람의 사생활’ 역시 그런 상황을 나타낸다.(두 시인의 시집은 훨씬 더 큰 의미들을 담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자아의 소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나 기타의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는 남과 소통하지 못해 점점 소멸해가는 소수자를 의미하고 있다. 이 영화가 이질적이고 반대중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이 사회의 점과 같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병자라면 피할 뿐 그들과 대화하거나 소통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단지 영화 스크린을 통해 걸러진 잔상을 볼 뿐이었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정신병자들을 떠올려보면 다소 엉뚱한 말을 하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으며 심지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도 했다. 그에 비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한 인물들을 내세움으로써 과감한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결코 사회와 동화되지 못하는 대상을 보여줌으로써 반대로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낸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까지 제도나 법, 윤리의 폭력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의 영화에 등장했던 배경을 떠올려보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병원이 등장했다. 마치 도살장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병원은 학교나 교도소(물론 잘 알다시피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교도소와 학교가 등장한다.)와 함께 제도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임수정은 폭력을 없애기 위해 전투로봇이 되어 보다 강력한 폭력을 행사한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발사되는 무자비한 총알들, 총알은 악당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치료해 주려는(밥을 먹이려는) 의사(이성인)에게 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상상으로 엄청난 짓을 저지르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멀쩡하다. 어쩌면 이것이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지나치게 관대한 시선(실제로 정신병자들은 상상만 하지 않으므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이 사회를 보면 이성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폭력이 비이성인의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보다 잔인하다.

이런 사회적인 비판 의식 이외에도 박찬욱 감독은 정신분석학의 담론을 펼쳐 놓는다. 사실 내가 좀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다만 우연인지는 몰라도 내가 읽고 있던 슬라보예 지젝은 ‘HOW TO READ라캉’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두 장면만 해석해 보려고 한다. 미리 밝히지만 이것이 영화의 전체 내용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전체 환자들을 분석할 수 있다면 혹시 모를까.

주인공인 비는 어린 시절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해 자신을 투명인간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는 도화지로 만든 헬멧을 쓰고 다니는데 이제는 보일지도 모르니 한번 벗어보라는 말을 듣고 헬멧을 벗으려다가 깜짝 놀라며 말한다. ‘남들이 날 못 보면 어쩌지?’(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비슷한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앞서 말한 책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지젝의 말로는 이것이 라캉주의자들 사이에서 10년 전부터 유행했던 말이라고 했다.(물론 나는 처음 들었다.)

그 얘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을 곡식이라 믿는 남자가 병원에 입원했다. 제대로 치료를 마치고 병원 밖을 나가려다가 문 밖에 있는 닭을 보고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온다. 의사가 당신은 이제 곡식이 아니란 걸 알지 않느냐고 묻자. 환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지만 닭들도 그것을 알까요?’(HOW TO READ라캉 -p144의 내용 요약) 두 이야기는 모두 대타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타자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젝은 신을 예로 든다.(비에게 있어 대타자는 부재하는 어머니다.) 앞선 얘기가 실린 파트의 주제문이 ‘신은 죽었다 하지만 신은 그걸 모른다.’이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면 절대적 구원자가 없다. 뜬금없는 이야기 인지 모르겠지만 ‘친절한 금자씨’에서 신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목사는 신을 팔아 자신의 비열한 행동(예를 들면 금자의 정보를 백선생에게 팔아넘기는 짓)을 정당화 한다. 신이 없는 세상,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는 묻는 것이다. 과연 누가 날 봐준단 말인가? 주체를 형성시켜주고 가꿔줄 타자가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사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형성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우리 아들, 딸 잘한다는 칭찬이 아이를 형성시키고 발전시킨다. 영화가 흐르는 과정을 보면 비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뭔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뒤로 걷는 사내를 흉내냈다가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받은 목소리로 멋진 요들송을 부른다. 자신을 투명인간이라 여기는 비는 이처럼 주체가 틀을 형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과 미끄러지며 질주한다. 바로 어릴 적 부모의 부재가 만들어낸 유령 같은 주체다. 그래서 그는 언뜻 자유로운 것 같지만 동시에 뭔가에 속박되어 있다. 가면과 같은 헬멧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날 보지 않는데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강박증을 지니고 있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사악한 신의 강박적 주문 하에 있는 것이다.'(HOW TO READ라캉-p153) 신이 없다는 것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다 강력한 초자아로써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비는 임수정이 밥을 먹지 않아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여기서 거짓이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말한 거짓이란 개념과 유사하다. 진중권은 백남준의 거짓을 두고 마법적인 힘을 언급했다.)을 한다. 그래서 그녀의 등에 문을 그리기도 하고 조잡한 기계 장치를 보여주며 밥을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제목인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바로 밥을 먹어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비가 임수정을 살리려고 했던 것은 물론 그녀에게 이성적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비는 대타자의 위치에 어머니 대신 임수정을 올려 놓는다. 이제 임수정이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에게 키스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키스를 하는 순간 임수정은 발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하늘로 떠오른다. 목이 180도 돌아간 상태로. 그녀는 키스를 하는 내내 변신을 한다.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변하기 때문에 타자는 완전한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어머니의 부재를 경험한 비는 임수정을 살리려고 한다. 그녀의 등에 문을 그려 넣을 때 비는 눈물을 흘린다. 주체는 진정 타자의 등으로만 통할 수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이 마지막 장면에 비(하늘에서 내리는)를 맞으면서도 함께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하자는 것 같았다.(사실 이런 결론은 이 영화에 있어서 별 의미 없다.) 일체감을 느낄 수 없지만, 타인이 타자로밖에 남을 수 없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본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젖은 게 그것 뿐인가 하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설마 성적인 의미였을까? 충분히 가능하다.)대사가 끼어들지만.

영화를 보고난 후 그냥 잊어버리기 아까워서 몇 자 끼적여보기는 했지만 영화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실하며 또한 피상적이다. 영화 내에서 할머니가 말 하려던 존재의 목적(아마도 타인과의 공존이겠지.)이나 기타 다른 환자들의 태도와 대사들 (가령, 오대수는 왜 뒤로 걸을까? 앞으로 걸으면 불안한가?)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것으로 마치겠다. 앞으로 나올 박찬욱 감독 영화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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