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당신의 추천 영화는?


사이보그지만 괜찮아


비디오 가게에서 너무 재미없고 고객들 반응이 형편없어서 폐기처분 했다던 영화, 보는 내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없어 화가 났다던 그 영화를 보게 되었다. 아마도 인기 가수이자 월드 스타인 비를 보려고 했다거나 임수정의 빼빼마른 몸매를 감상하는 것만으로 만족하겠다는 사람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 했을 것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배우들조차 자신이 맡은 역할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알았을지도 의심스럽고 대체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며 연기를 했는지, 혹시 박찬욱을 미쳤다고 욕하면서 겉으로는 열심이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이 영화의 장르를 규정하자면 나는 코미디라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웃기려는 흔적들이 역력했으니까. 굳이 비교해 보자면 ‘지구를 지켜라’와 조금 흡사하다고 할까? 물론 ‘지구를 지켜라’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는 적어도 정상인처럼 보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소 엉뚱하고 자신이 믿는 대로 저질러 버리는 점은 있었다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일단 말이 통하지를 않는다. 정상인과 일말의 소통조차 허용되지 않는 것이다. 그들의 언어는 그야말로 그들만의 언어다. 정신병원 내에 있는 사람들은 비논리적, 비이성적 방식으로 대화를 시도한다. 자신들끼리는 뭔가 의미가 통하는 것처럼 눈빛을 교환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시늉을 한다. 그러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로 대변되는 정신병원 의사들과는 그야말로 개와 닭의 대화처럼 한쪽에서는 왈왈대고 다른 한쪽에서는 꼬꼬닭 한다. 아니 사실, 한쪽은 이성적인 쪽이라 제대로 된 언어를 구사한다. 바로 인류가 만들어 놓은 상징계 안에서 그들(바로 우리다.)은 안타까워하며 정신병자들을 치료하려고 애쓴다. 그들은 도와주려고 한다. 물론 강제적 방식이기는 하지만 효과는 크다. 기억은 지워져도 좋으니 밥은 먹게 해달라는 말에 따라 전기충격 요법을 쓰기도 한다. 밥은 곧 인류의 언어다. 우리는 생존을 위해 언어를 배우는 것이다.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자들은 곧 멸망하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 남과 소통하지 못하는 언어를 구사하면서도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바로 시인이다. 가수 비(영화 속 이름보다 그냥 실제 이름을 말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법원 판사로부터 점으로 소멸될 것이라는 판결을 받는다. 현대 시에 있어서 점으로의 소멸이나 사라짐에 관한 담론은 확대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최근에 읽은 김경주의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나 이병률 시인의 ‘바람의 사생활’ 역시 그런 상황을 나타낸다.(두 시인의 시집은 훨씬 더 큰 의미들을 담는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자아의 소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정신분석학적으로나 기타의 방식으로 해석이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는 남과 소통하지 못해 점점 소멸해가는 소수자를 의미하고 있다. 이 영화가 이질적이고 반대중적인 이유는 바로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이 사회의 점과 같은 부분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정신병자라면 피할 뿐 그들과 대화하거나 소통해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다. 단지 영화 스크린을 통해 걸러진 잔상을 볼 뿐이었다. 그동안 드라마나 영화에 등장하는 정신병자들을 떠올려보면 다소 엉뚱한 말을 하지만 최소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가능했으며 심지어 의미심장한 말을 던지기도 했다. 그에 비해 ‘사이보그지만 괜찮아’에서는 소통이 불가능한 인물들을 내세움으로써 과감한 시도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결코 사회와 동화되지 못하는 대상을 보여줌으로써 반대로 사회의 폭력성을 드러낸 것이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까지 제도나 법, 윤리의 폭력성을 드러내 주었다. 그의 영화에 등장했던 배경을 떠올려보면 ‘복수는 나의 것’에서도 병원이 등장했다. 마치 도살장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로. 병원은 학교나 교도소(물론 잘 알다시피 ‘친절한 금자씨’에서는 교도소와 학교가 등장한다.)와 함께 제도의 폭력성을 상징한다. 임수정은 폭력을 없애기 위해 전투로봇이 되어 보다 강력한 폭력을 행사한다. 열 개의 손가락에서 발사되는 무자비한 총알들, 총알은 악당에게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치료해 주려는(밥을 먹이려는) 의사(이성인)에게 향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환상일 뿐이다. 상상으로 엄청난 짓을 저지르지만 꿈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멀쩡하다. 어쩌면 이것이 정신병 환자들에 대한 지나치게 관대한 시선(실제로 정신병자들은 상상만 하지 않으므로)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 이 사회를 보면 이성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폭력이 비이성인의 상상 속에서나 일어날 법한 일보다 잔인하다.

이런 사회적인 비판 의식 이외에도 박찬욱 감독은 정신분석학의 담론을 펼쳐 놓는다. 사실 내가 좀 더 깊은 지식을 가지고 있다면 훨씬 더 많은 이야기를 할 것 같은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 다만 우연인지는 몰라도 내가 읽고 있던 슬라보예 지젝은 ‘HOW TO READ라캉’에 실린 내용을 바탕으로 두 장면만 해석해 보려고 한다. 미리 밝히지만 이것이 영화의 전체 내용에 있어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전체 환자들을 분석할 수 있다면 혹시 모를까.

주인공인 비는 어린 시절 부모의 무관심으로 인해 자신을 투명인간이라 여긴다. 그래서 그는 도화지로 만든 헬멧을 쓰고 다니는데 이제는 보일지도 모르니 한번 벗어보라는 말을 듣고 헬멧을 벗으려다가 깜짝 놀라며 말한다. ‘남들이 날 못 보면 어쩌지?’(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비슷한 의미였던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장면을 보는 순간, 앞서 말한 책에서 봤던 내용이 떠올랐다. 지젝의 말로는 이것이 라캉주의자들 사이에서 10년 전부터 유행했던 말이라고 했다.(물론 나는 처음 들었다.)

그 얘기는 다음과 같다. 자신을 곡식이라 믿는 남자가 병원에 입원했다. 제대로 치료를 마치고 병원 밖을 나가려다가 문 밖에 있는 닭을 보고 부들부들 떨면서 들어온다. 의사가 당신은 이제 곡식이 아니란 걸 알지 않느냐고 묻자. 환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물론 나는 알고 있지만 닭들도 그것을 알까요?’(HOW TO READ라캉 -p144의 내용 요약) 두 이야기는 모두 대타자에 관한 이야기이다. 대타자는 간단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지젝은 신을 예로 든다.(비에게 있어 대타자는 부재하는 어머니다.) 앞선 얘기가 실린 파트의 주제문이 ‘신은 죽었다 하지만 신은 그걸 모른다.’이다.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보면 절대적 구원자가 없다. 뜬금없는 이야기 인지 모르겠지만 ‘친절한 금자씨’에서 신은 조롱의 대상이었다. 목사는 신을 팔아 자신의 비열한 행동(예를 들면 금자의 정보를 백선생에게 팔아넘기는 짓)을 정당화 한다. 신이 없는 세상, 아무도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못하는 상황에서 비는 묻는 것이다. 과연 누가 날 봐준단 말인가? 주체를 형성시켜주고 가꿔줄 타자가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어려운 이야기 같지만 사실 사람은 타인에 의해 형성된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우리 아들, 딸 잘한다는 칭찬이 아이를 형성시키고 발전시킨다. 영화가 흐르는 과정을 보면 비는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 뭔가 안절부절 못하면서 뒤로 걷는 사내를 흉내냈다가 목소리가 아름다운 여인으로부터 받은 목소리로 멋진 요들송을 부른다. 자신을 투명인간이라 여기는 비는 이처럼 주체가 틀을 형성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타인과 미끄러지며 질주한다. 바로 어릴 적 부모의 부재가 만들어낸 유령 같은 주체다. 그래서 그는 언뜻 자유로운 것 같지만 동시에 뭔가에 속박되어 있다. 가면과 같은 헬멧을 쓰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날 보지 않는데 얼굴을 가려야 한다는 강박증을 지니고 있다. 라캉 식으로 말하자면 '사악한 신의 강박적 주문 하에 있는 것이다.'(HOW TO READ라캉-p153) 신이 없다는 것은 자유를 주는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 보다 강력한 초자아로써 환상을 불러일으킨다.

비는 임수정이 밥을 먹지 않아 죽을 수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를 살리기 위해 거짓말(여기서 거짓이란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이 말한 거짓이란 개념과 유사하다. 진중권은 백남준의 거짓을 두고 마법적인 힘을 언급했다.)을 한다. 그래서 그녀의 등에 문을 그리기도 하고 조잡한 기계 장치를 보여주며 밥을 먹어도 괜찮다는 것을 설득하려고 한다. 이 영화의 제목인 ‘사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바로 밥을 먹어도 괜찮다는 말이었다. 비가 임수정을 살리려고 했던 것은 물론 그녀에게 이성적 감정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비는 대타자의 위치에 어머니 대신 임수정을 올려 놓는다. 이제 임수정이 욕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그 증거로 그녀에게 키스를 하기도 한다. 그런데 키스를 하는 순간 임수정은 발에서 불꽃을 내뿜으며 하늘로 떠오른다. 목이 180도 돌아간 상태로. 그녀는 키스를 하는 내내 변신을 한다. 라캉이 말한 ‘성관계는 없다’가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변하기 때문에 타자는 완전한 나의 것이 될 수 없다. 어머니의 부재를 경험한 비는 임수정을 살리려고 한다. 그녀의 등에 문을 그려 넣을 때 비는 눈물을 흘린다. 주체는 진정 타자의 등으로만 통할 수 있는 것인가?

두 사람이 마지막 장면에 비(하늘에서 내리는)를 맞으면서도 함께 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주제를 혼란스럽게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다름을 인정하면서 함께 하자는 것 같았다.(사실 이런 결론은 이 영화에 있어서 별 의미 없다.) 일체감을 느낄 수 없지만, 타인이 타자로밖에 남을 수 없지만 그래도 두 사람은 같은 곳을 바라본다. 물론 그 상황에서도 젖은 게 그것 뿐인가 하는 다소 엉뚱해 보이는(설마 성적인 의미였을까? 충분히 가능하다.)대사가 끼어들지만.

영화를 보고난 후 그냥 잊어버리기 아까워서 몇 자 끼적여보기는 했지만 영화평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부실하며 또한 피상적이다. 영화 내에서 할머니가 말 하려던 존재의 목적(아마도 타인과의 공존이겠지.)이나 기타 다른 환자들의 태도와 대사들 (가령, 오대수는 왜 뒤로 걸을까? 앞으로 걸으면 불안한가?)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것으로 마치겠다. 앞으로 나올 박찬욱 감독 영화가 더욱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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