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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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온동물로 산다는 것에 깊은 피로를 느낄 때가 있다.

더위와 추위에 맞서는 육체뿐 아니라 감정도 그 육체의 일을 답습하니 말이다.

제대로 의식하지 못한 채 통과하기 바쁜 생에서 계절이 '울컥'의 다름아닐 때

분명 시간은 지나갔는데 지나가지 않는 계절이 있다면 어떠할까.

 

유리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인. 시끄럽고 왕성한 계절인.

 

바깥은 여름....의 의미는 그렇게 풀이된다.

바닥이 없는 계절에 푹푹 빠지기에 표면장력으로 세상에 닿지 않고 살아가는 소금쟁이 같은.

지난 계절에 버려져 언제 회수될 지 모르는 사람.

 

자루에 담겨 끈으로 묶인 채 나뭇잎 다 떨군 나무 옆에 덩그마니 버려진 개.

자루 아래 따뜻한 피가 서서히 흘러나와 주변을 적시는 데도 외면당하는.

피의 사연에 손을 대면 피가 전염되리라는 미신을 가진 사람들 속에서.

 

수식어가 없는 눈물, 아프다 발설하지 못하는 통증으로 가득찬 문장들이다.

폭설과 결빙이 심장을 통과하며 흘리는 이야기들이다.

비극이 바라보는 타인의 생을 맑게 한다. 비극적이게도.

 

작가의 손가락을 따라 눈물 몇 방울 떨구다 보면 잊고 있는 타인이라는 단어가 오롯이 떠오르고

달빛이 천처럼 드리워진 테이블 앞에 앉게 된다.

작가는 말한다.

'오래 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들 모두 어디에서 온 걸까. 그리고 이제 어디로 가고 싶을까.'

 

책을 덮어도 책 속의 인물들이 가족처럼 이웃처럼 느껴져서 신경이 쓰인다.

사라진 이웃과 묽어진 가족이 그리워서일까.

훗날 이 책의 분위기를 잘 기억하기 위해 하나의 글을 요약한다.

 

          

*노찬성과 에반


찬성이는 트럭운전사였던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돌아가신 후 할머니와 둘이 살고 있는 소년.

휴게소 음식점에서 일하시는 할머니는 퇴근해서 돌아오면 담배 한 대를 물고

 

주여, 저를 용서하소서.... 읊조리며 하루를 마무리한다.

용서가 뭐야? 없던 일로 해달라는 거야? 잊어달라는 거야?

그냥 한번 봐달라는 거야.

 

그러던 어느 날, 휴게소에 묶인 채 버려진 강아지에게 얼음을 먹여준다.

손바닥에 에반의 혀가 남긴 분홍의 감촉 때문이었을까.

찬성은 할머니의 반대를 무릅쓰고 연로한(?) 강아지를 데려와 에반이라 이름 붙여준다.

이 년이라는 세월 동안 에반은 늙고 소년은 성장한다.

찬성에게 중고 핸드폰이 생기게 되고 거기에 마음을 빼앗긴 찬성은 노쇠한 에반이 예전처럼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다 병들어 투병에 가까운 삶을 이어가는 에반에게 안락사를 선물해주고 싶어서 광고전단지를 돌리며 그 비용을 마련하지만 다른 소비의 욕구에 시달린다. 핸드폰을 치장하는 데 조금씩 사용하다가 결국은 턱없이 모자라게 되는 비용.

 

찬성은 이제 자신의 욕망과 타협한다. 자신의 욕구에 찬성한다.

에반에게 안락사가 최고의 선택은 아닐 수도 있어. 나와 함께 지내다가 아프지 않게 죽을 수도 있어. 에반의 통증은 날로 깊어갔고 찬성의 욕구도 커져갔다.

 

어느 날 귀가해보니 에반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자 휴게소로 가보는 찬성.

입구에서 한 자루를 보게 되고 직감적으로 유기견을 처리한 자루임을 알지만 찬성은 생각한다.

찬성은 끈을 풀고 주머니를 열어 에반인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자루 아래 따뜻한 피가 서서히 흘러나와 주변을 적시고 있었지만 그런 것을 애써 확인할 이유가 없었다.

 

에반이 유기견은 아니었잖아.

식사를 마친 주유소직원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다.

정말이야, 그 개는 마치 죽으려고 기다리고 있다가 뛰어든 것 같았다니까.

 


 

극은 예쁜 여인의 눈동자와 개의 코와 사자의 이빨과 뱀의 피부와 독수리의 날개를 가졌다.

얼마나 반짝이는 눈인가. 얼마나 민감한 코인가. 얼마나 빠르게 낚아채던가. 얼마나  매끈하게 날아오르던가. 비극은.

그것의 온전한 외부는 또 얼마나 높이 솟아오르던가.

 

비극에 감염되지 않으려 발버둥치며 희극을 쫒아가다가 희극이 원래 비극이었다는 사실을 감지하며 우리는 어른이 되어왔다.

그리고 늙어가고 있다. 비극이든 희극이든 오늘을 살아내는 게 중요하다는 주문을 걸며.

소리를 내고 공중을 울리다가 사라지는 음정을 보는 것처럼 그것을 하나의 연주처럼 듣고 보고 견디며.

그러다 주인공이 되어 세상이라는 무대에서 사라진다.

사라질 때만 내가 주인공이었다는 것을 온전히 의식하면서.

희극이라 여겨다오.

가끔은 피할 수 있었던 것과 가끔은 피할 수 없었던 것과 가끔은 선택했던 것들이

하나의 계절이 되고 하나의 사람이 되고 하나의 사고로 남는다.

그 중심에 늘 나는 영문을 모른다는 얼굴로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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