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나는 없었다 애거사 크리스티 스페셜 컬렉션 1
애거사 크리스티 지음, 공경희 옮김 / 포레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구태의연하지만 우선 봄의 성질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봄은 구부러짐과 웅크림과 비어있음을 펴고 채워준다. 꽃이 핀다. 아름답다. 싱그러움으로 세상을 덮는다. 마음이 열리고 가벼워진다. 웃음과 감동의 시간이 많아진다.

그런 봄에 어디로 가있었길래 없었다는 것일까. 저 여자는 왜 타인의 봄에 속하지 못한 채 얼굴 없는 모습으로 표지에 도도하게 앉아있는 것일까.

 

조앤 스쿠다모어라는 중년여인이 있다. 그녀는 주(州)의 원예가협회 총무를 맡고 있고 지역 병원의 이사이고 지역단체와 걸스타우트 일도 돕고 있다. 성공한 변호사 로드니 스쿠다모어의 아내로써 또 나름 꿀리지 않는 자식들의 엄마로써 올바른 양육과 성공한 인생에 대한 자부심이 있다.

자식들을 키우면서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고비를 자신의 지혜로 훌쩍 넘을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큰 딸 에이버릴이 아픈 아내를 가진 스무살 연상의 의사와 내연의 관계에 있을 때도 남편과 합작하여 그들을 보기좋게 갈라놓지 않았던가. 이젠 부유하고 멋진 주식중개인과 정상적인 결혼을 했으니 안심이다. 부모로써의 사랑은 잃었지만 존경마저 잃지는 않았으니 그것으로 만족이다. 차갑고 이성적인 성격이야 마음에 들지 않지만 다 가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아들 토니 또한 성에는 안차지만 멀리 떨어진 주에서 큰 오렌지농장을 경영하고 있고 그 곳에서 결혼을 해 잘 살고 있다. 부모에게 얼굴 한 번 보이지 않은 여자와 결혼했고 부모와 교류가 없어도 상관이 없다는듯 살아가는 게 좀 못마땅하지만 잘 살고 있다니 그런데로 만족이다.

 

막내딸 바버라는 학창시절 못된 친구들과 어울리며 남자보는 눈도 지지리도 없어서 속을 썩이더니만 괜찮은 남자가 나타나자마자 그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해서 바그다드에 살고 있다. 그것도 대충 만족이다. 한 때는 남편도 농부가 되고 싶다느니 하는 현실감각 떨어지는 소리를 해댄 적이 있으나 그녀의 단호한 잔소리로 꿋꿋하게 변호사로써의 길을 계속 걷고 있다. 다 만족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삶이다. 무엇보다 남들도 그녀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지 않은가.

 

막내딸이 크게 아픈 바람에 조앤은 바그다드로 달려가 딸을 회복시키고 필요한 모든 일을 해결해주고 육 주만에 런던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 곳에 있는 숙소에서 고교시절에 잘 나가던 동창 한 명을 만나게 되는데 그녀는 못알아볼 정도로 늙어보이고 형편없다. 애써 얘기를 나눠보니 이건 삶 자체가 형편없다. 남편은 벌써 몇 번이나 갈아치웠고 사랑을 위한답시고 애들도 팽개쳤다. 이런 저질인생같으니라구. 창피한 줄도 모르고 입을 놀리기는. 쯧쯧쯧

하지만 그 친구는 말한다.

"난 별로 내 삶에 후회가 없어." 그리고는 이상한 말을 던진다.

"어머, 그 귀여운 바버라가 네 막내딸이었구나. 불행한 가정에서 도망치려고 처음 청혼한 남자와 결혼해서 여기 왔다는 소문의 그 여자가. 그리고 이젠 다 지나갔으니 괜찮을꺼야."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는거야?"

"네 남편도 시간만 나면 한 눈을 팔려고 노력했었잖니, 왜."

도저히 말을 섞을 인간이 못되는 것 같아 조앤은 불쾌하기 짝이 없다.

"날씨가 좋지 않은데 아마 며칠 묶일 지도 모르겠구나. 좋은 여행 해라.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것 말고는 할 일이 아무 것도 없다면 자신에 대해 뭘 알게 될까?"

 

입방정이었을까. 큰 비가 계속 오는 바람에 육로를 통해 가고 있던 조앤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 염려했던 대로 열차가 끊겨 사막에서 며칠 머무르게 된 것이다.

 

사막은 이상하다. 동굴에서 뱀이 기어나오듯 생각들이, 평소엔 눌러두고 닫아두었던 생각들이 튀어나온다. 가져온 책은 다 읽었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없고 매끼니마다 복숭아통조림과 오믈렛을 먹고 있다. 황량한 풍경을 산책하는 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이 곳에서 조앤은 자신의 가면을 벗기 시작한다. 아니 가만히 있고 싶은데 누군가 사정없이 그녀의 얼굴에서 가면을 뜯어내고 있다.

 

사람들은 나를 인정하되 좋아하지는 않았으며 아이들은 피하고 숨으려했고 심지어 막내딸은 나로부터 도망가지 않았는가. 아들도 너무 멀리 떨어져 살고 있고, 큰 딸은 한 번도 진심어린 미소따위 주지 않는다. 그러고보니 사랑하는 남편 로드니도 이상한 말을 많이 했다. 그것은 분명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도 별반 내세울 것 없는 여자를.

남편이 교도소에 가있는 동안 대신 살림을 꾸리다 병을 얻어 죽게 된 묘한 생김새의 여자.

입양해 번듯하게 키워주겠다는 넉넉한 식구들의 제안을 뿌리치고 아이들을 옆에 끼고 있던 여자.

자식들을 망치려고 작정한 그 여자말이다.

남편 로드니는 그 여자를 사랑했던 것 같다. 그 여자가 용기가 있다고 했지. 맞아, 용기만 가지고 살 수는 없지요, 했더니만 나더러 불쌍한 조앤이라고 했어. 오, 내가 잘못했던 거야.

 

로드니가 얼마나 도시의 삶을 싫어하는지, 그는 얼마나 농부가 되고 싶어했는지.

나는 그의 꿈을 짓밟았던거야. 나는 오로지 성공하는 남편을 갖기 위해, 내로라하는 자식의 부모가 되기 위해 아이들을 이해하기보다는 일방으로 가르치기만 하던 엄마였던 거야. 이제 돌아가면 로드니에게 잘못했다고 해야겠어.

용서해달라고 해야겠어. 시간이 없어. 시간이. 기차는 도대체 언제 오는거지.

 

육 주만에 돌아온 아내를 맞는 로드니의 에필로그를 우리는 새겨야한다.

"휴가는 끝났어."

로드니는 진정 행복한 육 주였다고 생각한다. 왓킨스와 밀스를 만날 수 있었고, 하그레이브 테일러와도 즐거운 저녁시간을 보냈다. 많지는 않지만 친구 몇몇이 모였다. 일요일이면 언덕으로 상쾌한 산책을 나갔다. 하인들은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줬고, 그는 책에 음료수병을 받치고 원하는 만큼만 천천히 마셨다. 때로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일을 마무리한 다음 파이프 담배를 피웠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쓸쓸할 경우를 대비해 가상의 레슬리를 친구 삼아 의자에 앉혀두었다.                - 256p

 

소설은 진실을 알면서도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을 기만할 수도 있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라는 통찰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아가사 크리스티가 탐정소설로 그녀의 영역을 굳힌 후, 메리 웨스트매콧이라는 필명으로 발표한 서정소설이다. 쉽게 읽히는 이 책을 다 읽고 나니 제목은 딱히 떠오르지 않는 한 일본소설의 장면이 겹친다.

너무나 맞지 않아 별거를 하게 된 한 부부가 왜 별거를 하게 되었는지 이유조차 희미해졌을 즈음, 데이트를 하게 된다. 데이트 끝에 아내는 남편의 취향대로 꾸며진 그의 집에 가게 되고 그 곳에서 새로운 그의 매력을 느끼게 된다. 여자는 결혼하기 전 남편의 취향이 배어있던 그의 하숙방을 기억해낸다. 그의 향기로 가득했던 그 신비롭고 희열에 가득찼던 공간을.

 

내 취향대로 가구를 세팅하고 삶의 방식을 세팅하고 부부의 관계를 세팅하고 아이들의 입맛을 조종하고 교우관계를 조종하고 공부의 방식을 조종해서 얻어지는 보람은 분명히 있다. 그렇다. 그것은 보람이다. 취향의 성취이다. 하지만 분명 타자와 함께 누리는 즐거움은 아니다. 

내 취향으로 채워진다면 만족할 수는 있겠다. 하지만 삶의 경이로움은 실종된다는 사실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때 나는 타인에게 어떤 계절이 되는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소설 속의 아내처럼 나도 돌이켜본다.

남편이 되기 전의 낯설디 낯설은 그의 취향은 내게 얼마나 떨림이었던가.

그 떨림에 진동하기 위해 나는 얼마나 촉수를 세웠던가.

봄에 나는 없었다,는 나의 이야기였다. 깨닫되 인정하지 않고 있던 가면이야기였다.

그리고 고백하게 되었다.

타인의 취향이야말로 삶에 흥분을 멈추지 않게 하는 모험이라는 것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