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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서재 - 나만의 도서관을 향한 인문학 프로젝트
정여울 지음 / 천년의상상 / 2013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내게 <마음의 서재>는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게 하는 책이었다.
그래서 그녀가 이 책으로 '제3회 전숙희문학상'을 탔다는 소식에 누구보다 큰 박수를 보내주고 싶었다. 아니, 당신은 어떻게 이런 온도로 말을 뽑아낼 수 있는 거지요?
호호호, 저는 따뜻한 시선 가지는 게 제일로 쉬웠어요.
상황을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그녀의 직접적인 대답은 들을 수 없지만 이렇게 대답하지 않았을까.
인.문.학.을. 통.해.서.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든 ‘연결’되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이 인문학이라는 그녀의 설명대로
인문학 안에서는 상대방의 슬픔과 상처에 쉽게 닿을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그렇게 첫사랑을 통해 세상을 한 번 다 살아낸 듯한 ‘인생의 시뮬레이션’을 경험한다. 누군가를 처음 사랑하는 것은 곧 지구를 한 바퀴 다 돌아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우리 안의 수많은 타인을 만나는 것이다. 내가 사랑하는 단 한 사람의 영혼 속에서 우주 전체의 비밀을 발견한 듯한 환상, 그것이야말로 첫사랑의 돌이킬 수 없는 매혹이 아닐까.
이 세상에서 오로지 그녀 한 사람만 이런 어마어마한 첫사랑을 경험했을까.
미처 정리하지 못한 채 마음 한켠에 방치된 첫사랑의 의미는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시간이나 날씨에 의해 발길질을 하며 모든 사랑의 기준이 되어 현재의 사랑을 재단하거나 비교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녀의 표현대로라면 첫사랑의 장례식을 잘 치른 사람만이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 있다는데. 그녀가 첫사랑의 메커니즘에 대하여 명쾌하게 정의할 수 있는 것은 투르게네프의 <첫사랑>이 있었기때문.
매력은 미모처럼 자신을 ‘볼거리’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함께 하고 싶은 존재’로 만드는 기술이다.
이러한 명제를 뽑아낼 수 있는 저력도 에드몽 고르탕의 희곡 <시라노>가 있었기때문.
그래서 복스럽기만 한 앞집 복순이도, 평범한 마스크의 소유자 옆집 영희도 미인에는 못 미칠지언정 노력하면 매력녀의 반열에 넉근히 들 수 있다는 결론을 흐뭇하게 내려본다.
냉대에 익숙해진 내면의 우월성이 모처럼 날개를 펴는 광경속에서.
사랑에 있어서 사랑의 완전성과 상대방의 완전성을 배제하지 못하면 그것은 한낱 서바이벌게임에
불과한 것이라는 그녀.
사랑에 빠진 채 허우적대는 것이 누구도 사랑하지 않은 채 꼿꼿한 자아를 고수하는 것보다 백만 배 낫다는 그녀.
그래서 사랑은 자신을 낯선 타자로 만드는 영혼의 마술이라는 그녀.
세대교체보다는 세대교감이라는 말을 미는 그녀.
콤플렉스가 우리의 감춰진 무의식과 만나는 중요한 통로라 오히려 지식이 된다는 역설을 펴는 그녀.
자신의 단점을 드러내는 일이라 ‘~였다면’이라는 가정법을 무척 싫어하는 그녀.
어떤 일이 있어도 자신을 넘어서는 타인의 욕망에는 반응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그녀.
그녀에 의하면 자아의 유일한 진리는 오직 자아가 변신한다는 사실뿐이라는데,
기실 지금의 ‘나’란 물론 어제와 동일하지도 않으며
내일의 ‘나’와 동일하지 않아 자신에 대한 설명이란 언제나 무효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사유의 물꼬를 터주는 미셀 푸코가 있어 그녀의 사유가 먼 바다까지 헤엄쳐 나간다.
자신의 정체성을 타인의 요구에 끼워 맞추는 심리를 공의존 (codependency)이라 하는데
그녀는 이것은 일종의 관계중독으로 규정하고 있다.
사랑의 이름으로 상대방의 영광과 업적을 가로채는 일의 심각성을 말하고 있다.
그 예로 카프카의 <변신>을 들고 있는데 실제로 카프카는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아버지 앞에서는 늘 작은 존재였다 한다.
그런 그의 콤플렉스가 아버지가 던진 사과에 맞아죽는 주인공에 대한 설정을 불러왔으며
그것은 과도한 욕망에 부응하다 허물어진 그의 삶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든 관계에 여백이 필요하다는 그녀의 주장을 좀 깊게 들여다보면
사랑한다고 다 알려고 하지 말고, 또 사랑한다고 다 알려주려고 하지 말 것!
관계도 숨을 쉴 공간을 요구한다는 것!
너무 많은 사랑이 사랑하는 대상을 질식시키지 않도록
너무 많은 관심이 사랑하는 사람의 사생활조차 빼앗지 않도록.
그래서 마음의 DMZ를 설치하자한다.
상처를 가지는 일이 무에 자랑스럽고 훈장이 될까마는 상처가 빛을 발하는 때가 가끔 있다.
비슷한 상처로 아파하는 사람을 바라볼 때이다.
상대방의 상처에 '초록은 동색'일 법한 상처를 입장권처럼 가지고 조용히 옆자리에 앉는 일.
상대방이 위로받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하게 하는 세련된 테크닉을 생각하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내가 해봐서 아는데, 식이 아닌 그저 '물 위에 떡을 던지는' 심정으로 당장의 큰 성취를 바라지 않고 흘려보내는 말의 힘을 나는 믿고싶다.
얘는 그게 밥이 나오냐, 떡이 나오냐.
흠.
탄수화물 위주의 식사는 이제 좀 벗어나야할 것 같다.
정여울, 나는 그녀가 위로자이면서 상대방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게 만들어서 좋다.
텍스트 밖에서 그녀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써놓은 글에 합당한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 것을 믿는다.
그저 꾸준히 읽고 느끼고 쓰고 했더니 쓰여진 텍스트에 위로라는 옵션을 가지게 된 그녀.
읽고 느끼고 쓰는 과정이 요구하는 따뜻한 가슴을 나도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