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 - 문정희 산문집
문정희 지음 / 다산책방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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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6학년짜리 작은 아이가 일어나 깎아놓은 사과를 보더니 "오, 금사과" 하고 외친다.

예이츠의 <방랑하는 잉거스의 노래>에 나오는 금빛사과를 이 아이가 혹시 아는가 싶어 '이 넘,

다시 봐야겠네? 홀딱 놀란 마음에 "너 그거 어떻게 알아?" 하고 은근 기대를 담뿍 담고 물으니

"아침에 먹는 사과는 금사과, 저녁에 먹는 사과는 똥사과라면서?"

흠, 그래. 내가 너에게 너무 많은 것을 바랐구나 하며 혼자 탈의미의 웃음을 웃고 말았다.

 

이제 막 책장을 덮은 문정희님의 에세이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에서 조나단 스위프트, 사무엘 베케트,셰이머스 히니, 오스카 와일드, 버나드 쇼, 그리고 예이츠를 품고 있는 아일랜드라는 나라를 만나려고 나는 아침부터 국경없는 착각으로 금사과를 그리도 밝혔나보다.

 

<방랑하는 잉거스의 노래>는 꿈속에 나타나 하프를 켜며 노래를 부르는 크르의 아름다운 모습에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을 찾아 온 나라를 헤매고 다니던 잉거스가 결국엔 사랑도 얻고 사랑과 젊음, 꿈의 신이 된다는 켈트신화 'The dream of Aengus'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이 시는 영화 <메디슨카운티의 다리>에서 극적인 장치로 쓰여 더욱 유명하다.

시보다 더 시적인 암시로 쓰여진 예이츠의 이 시를 나는 몇 번을 보고서야 이해했었다.

고급스럽게 말할 수 있는 로버트의 입과 그걸 알아먹을 수 있는 프란체스카의 귀가 있었기에 그런 전설적인 사랑도 존재할 수 있었겠다.

아하, 불꽃같은 사랑의 시작에는 그런 고도의 정신머리는 있어줘야겠구나 하는.

둔한 입술과 먹먹한 귀를 가지고서 그런 사랑은 아예 꿈도 꾸지말라는 교훈(?)을 얻는다.

 

아일랜드의 회색빛 공기와 비. 그 비바람을 견디기 위해 생겨났을 럼주 섞인 아이리쉬 커피와

한약냄새가 난다는 진한 기네스맥주,,,,

눈을 감고 쿰쿰대며 아일랜드로 가는 길을 내기 위해 연신 삽질을 해보았다.

그 부질없고 닿을 길 없는 삽질을.

 

문정희 시인은 진명여고 재학 중 백일장을 석권하고 여고생으로서는 한국 최초로 시집 <꽃숨>을

발간하여 당시 세간에서는 프랑스의 천재소설가 프랑스와즈 사강에 견주어졌었다고 한다.

생의 거의 전부를 시 속에서 눈 뜨고 시 속에서 밥 먹고 시 속에서 잠든 여자,

그녀의 전 재산은 외로움과 고통과 위험이 전부였다는데,

이상에서나 필요함직한 큰 날개를 달고 현실에 착지하여 뒤뚱거리는 걸음걸이로 조롱받고 사는

시인의 삶을 산다는데,

그녀에게 있어 문학이란 망루였고 오아시스였고 동시에 폐허였다는데,

자신이 낳은 아름다운 생명이 죽은 시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중요하다는데,

그녀가 자신에게 수도 없이 하는 말이, 그저 그냥 쓰고 또 쓰라는 것이라는데.

 

<머리감는 여자>

 

시인이 멕시코 중부 치첸시아라는 곳을 여행할 때 밀림 끝의 작은 마을에 들어서게 된다.

그 곳에서 본 것은 평화롭게 돌아다니는 돼지와 거위들, 해먹에 누워 구름을 세는 아이들.

그보다 더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마당 한켠에서 말구유에 상체를 구부리고 받아놓은 빗물로 머리를 감는 여인의 모습이었다. 풍성한 허리, 출렁이는 젖가슴, 그을린 피부의 그녀를 보고 여태껏 그보다 더 당당하고 아름다운 여성을 본 일이 없다 고백한다. 그리고 문명에 대한 반성이 이어진다.

 

'물질문명의 산물인 유명상표가 달린 블루진 바지를 세련된 듯 입고 있었고 그럴 듯한 선그라스와

최신 휴대폰을 들고 있었지만 이 너덜거리는 문명의 옷가지를 걸치기 위해 싱싱한 생명력과

자유를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 (...) 자본주의 상인이 만든 저울과 줄자에 맞는 몸매를 만들기 위해

온갖 방식으로 육체를 억압하는 화장 짙은 도시 여자들의 생기없고 마른 모습도 떠올랐다.

어느 곳이 진정한 문명도시요, 어느 곳이 야만의 정글일까.'

 

        

<화석 옆에 놓인 국화꽃 한 다발>

 

“한국의 어느 동굴에서 2만년 전의 소년 화석이 발굴되었는데 단층 촬영을 해보니 그 주검 옆에 국화 꽃다발을 놓은 흔적이 있었다.”는 어느 시인의 말에 ‘세계평화 만해 시축전’에 참가한 나이지리아의 시인 윌레 소잉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부패가 진행되는 곳에서 찾는 아름다움이란 점에서 시적이다.”

세상의 부패 옆에 놓일 국화꽃 한 다발을 찾아가는 것이 바로 시가 아니겠는가라는 저자의 해석 또한 가슴에 남는다. 누구나 자기 자신에게 줄 국화꽃 한 다발을 위해 이렇게 눈물나게 하루하루를 견디며 사는 것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날마다 오래되어 낡아지며 어찌보면 산 채로 부패되어 가고 있는 자신을 꽃으로 향기를 돋우워

새롭게 만들어 나가라는 뜻이 아닐까. 그녀 말대로 모든 시간은 다 새 것이니까.

진짜 향기로운 국화꽃들로 피어날 가을을 그녀와 함께 나도 진심으로 바라게 되는 것이다.

 

등학교 때 쓴 위문편지를 담임선생님께서 아이들 앞에서 읽어주시며 “문정희는 앞으로 훌륭한 문학가가 될 거다”는 칭찬을 마음에 품어 시인으로써의 꿈의 기틀을 잡았고 고등학교때는 전국 백일장의 기수로 만들어주셨다는 선생님의 도움으로 뼈대를 세웠으며 유학을 떠날 때 자신의 집 난초에 그녀의 이름을 새겨놓고 매일 물을 주셨다는 국문학자와 논문지도를 해주시던 선생님의 아낌없는 사랑의 지도로 오늘의 그녀가 만들어졌다 한다.

선생님은 제자의 작은 재능을 발견하고, 학생은 선생님을 향한 존경과 신뢰로 따르던 그녀의 배움의 과정은 오늘날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시는 벼락을 맞는 것과 같아서 하지만 비를 기다리기만은 할 수 없어서 스스로 큰 비를 만들어서 살아왔던 그녀의 삶이 어찌 비단 같은 문장만으로 가득하겠는가.

하지만 글을 쓸 때만이 살아있는 목숨이고, 그녀의 최대의 영광은 글을 쓸 때뿐, 그 다음은 없는 것이라는, 온통 문학뿐인 그녀의 삶이 하나의 문학박물관처럼 느껴진다.

 

지막 장을 넘기고 책표지를 덮을 때면 나는 주먹을 쥐고 책의 가운데부분을 쾅쾅 두 번 내리치는 버릇이 있다. 물론 두꺼운 책을 덮을 때 나의 주먹질은 뿌듯함에 더욱 거세어진다. 255쪽의 <문학의 도끼로 내 삶을 깨워라>를 덮으면서는 비교적 우아한 쾅쾅이 퍼졌다. 그러나 순간 책의 중앙을 내리치는 나의 주먹이 도끼로 보였고 그러다보니 이 의식은 좀 더 의미가 있어졌으며 이 책이 오래도록 가슴에 살아남으리라는 예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책이 주는 즐거움과 신념들의 탄생이 부디 오래도록 도끼자국으로 남아 상처인 듯, 문신인 듯 육안으로도 들여다보고 거울로도 비춰보아 매무새를 가다듬는데 쓰였으면 좋겠다.

 

문학의 장총으로 삶을 뚫어라,

문학의 탱크로 삶을 밀어라,

문학의 핵무기로 삶을 박살내라.

뭐 이런 자극적인 제목이 필요하지 않도록 이쯤에서 삶을 깨워줘야겠다.

일어나라, 수고로운 무지의 아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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