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의 씨 현대시 기획선 45
황주은 지음 / 한국문연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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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시집 첫 페이지 전체를 장식한 무릎샷 속 시인을 들여다본다.

정글만한 호기심에 가득차 있으나 간신히 한 발 물러서서 독자와 거리를 둔다.

분명 동그란 안경인데 그게 다 눈동자처럼 보인다. 머리를 흔들고 다시 촛점을 맞추고

순간적으로 얼굴에 손가락을 터치해서 확대하려 든다. 스마트폰의 폐해.

여는 시가 장엄하다. 불의 씨.

깃털 달린 뱀의 등장으로 아즈텍 문명의 케찰코아틀이나 쌍둥이 테즈카틀리포카를 떠올리며

와, 이거 스케일이 너무 큰 거 아냐.

맨하탄에서 파는 깨찰빵이든 먹고 나면 치카포카를 깨끗이 해야되는 것이든

시인은 자신 앞에 서 있는 건물이 피라미드로 보이고

행인들이 제전에 참여한 사람들처럼 읽혔다는 것 아니겠는가.

어디에서? 신호등 앞에서.

파란 불로 바뀌기를 기다리는 그 지점이 나의 기원을 묻는 자리가 되어 시인은 상상력을

펼쳐 삶의 제사를 읽어낸 것 아닐까. 결국 제사란 창조와 생명과 관련된 일로 시인은

사랑을 바탕색으로 선택한다. 그 이후의 시들이 묻고 대답한다.

베리를 사러 갔다가 온몸이 멍들었어요

정염에 불타다 한 대 맞았다고 하면

모두 코웃음을 치겠지만

베리,

당신은 대서양 저편 장미 향기 날리는

아키디아 벼랑으로부터 왔지요

매혹의 베리,

빨리 당신을 사고 싶었어요

(...)

야속한 베리,

당신도 알게 되겠지요

사랑은 공평이 아니라 공습인 것을 - <베리베리 블루베리> 중

일상이 엄습한다.

파만두 만드는 법을 너는 전화로 알려 준다

아무것도 넣지 말고 파만 넣으라고

해풍 맞은 진도 대파를 꼭 써야 한다고

파만 넣으면 속이 뭉쳐지나

그럼 돼지고기 한 근만 갈아오라고

두부는 생략하나

그럼 한 모만 으깨 넣던지

소금, 후추, 마늘만 넣고 아무것도 넣지 말라고

달걀을 넣어야 접착력이 생긴닫고 하니

정 그러면 달걀 하나만 넣고

다른 것 아무것도 넣지 말라고 - <토요일의 소일거리> 중

레시피를 알려주는 친구가 이상하다.

당장 만들 것처럼 숨차게 들이댔다가 빠졌다하는 시인 또한 이상하다.

결국은 주문한 만두가 현관 앞에 도착한다. 이 세상에 없는 파만두와 현실적인 냉동만두가 자리바꿈하는 것이 먹지 못할 시와 섭취할 수 있는 현실적인 세계로 읽힌다.

베란다에서 대파를 까면

구름은 매운 구름이 된다

양산을 펼치면

비가 그친다

(...)

당신이 침을 뱉고 떠난 피부에

부스럼이 생겼다 - <조용한 일들> 중

테라야마 수우시의 시 <나의 이솝>이 생각난다. 초상화에 수염을 그려 넣어서 수염을 기르고,

문지기를 고용했으므로 문을 짜고, 수영복을 사면 여름이 온다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는다.

뒤집어도 돼요. 기껏해야 모래시계처럼 시간은 흐르고 일어나야 할 일들은 결국 일어날 테니까요.

살아가는 순서를 뒤집고 생각을 뒤집으면 얽히고 답답한 삶이 조금 비칠지도 모르잖아요?

풀 수 없는 문제집을 샀더니 답지가 딸려오는 것처럼. 끝내 답을 알 수 없으면 그 문제를

덮는 법이라도 깨우치는 것처럼. 문제집을 다시 펼쳤다 도로 덮게 되더라도 답이

도망가버리는 게 아닌 것처럼.

귀여운 드라큘라

내 품에서 안락을 누리는 아가

젖이 돌아 뻐근하구나

네 송곳니로 가볍게 찍으렴 - <To. 드라큘라> 중

거즈로 입가를 닦아주마…,싱싱한 젖을 다시 채워 오마…, 오, 앙증맞은 나의 분신 뚜껑을 덮어 줄게.

내면의 타자로써 시인과 거울을 같이 쓰고 있는 것은 드라큘라인가 보다.

먹어 치운 싱싱하고 앙증맞은 피들이 시속에서 내내 돌고 있다.

휘발시키고 싶은 기억들은 휘핑크림이 되고 상처는 성공의 가능성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인의

어조가 시집 전체를 뚫고 있다.

나의 첫, 평원

이라고 시인은 고백한다. 시집을 엮고서 비로소 똑바로 누울 수 있게 됐다는 걸까.

길이가 다른 것 같았던 두 다리로 반듯하게 설 수 있게 된 걸까.

비스듬히의 세계에서 시인은 비로소 수평을 잡고 어떤 기울기의 세계에서도 똑바로 설 수 있는

능력을 얻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난 빨강이 좋아, 빨강으로 살 테야, 지렁이를 찧어 입술

에 바를 거야. 휠체어를 굴리며 새신랑을 맞을 거야. 당신

의 모순에 불화살을 먹일 거야. 당신의 알몸에 느낌표를 찍

을래. 학문과 항문을 구별하지 않을 거야. 가랑이 사이 노

란 질투를 마실 거야. 당신의 뒤꿈치를 노리는 뱀이 될 거야.

- < 색상환 > 중

이상하게도 시집을 다 읽고 난 후 다시 첫장으로 돌아가 시인의 니샷을 본다.

시인이 고요한 장난기를 머금고서 윙크한다. 끼로 가득찬 내면은 살짝 들췄다 도로 덮는다.

아마 저 사진은 현상이 잘못 된 것이리라.

시인은 분명히 머리엔 난나바나나를 얹고 있고 블루베리 브로치에 색상환 치마를 입었을 것이다.

청재킷을 입었던 기타리스트에게서 낚아챈 기타를 앵글 바깥에서 발가락으로 퉁기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표시된 곳으로 다시 돌아가 시작해야 하지만, '가지 못한 길이라고 사라진 건 아닐'(Da Capo)테지.

아닐 거야.

완성이란 없고 완벽도 없는 세계에서 직진만 할 수는 없잖아.

종지부로 가서 연주를 끝내고 쉬고 싶지만 이건 또 무슨 기호지? Fine에서 끝낼 것!

지휘자와 관객이 눈 앞에서 눈알 부라리고 있다. 호흡은 이미 다 썼고 근육은 파열될 지경.

Fine는 보이지 않지만 그래. 음악을 펼치면 악보가 그칠 거야.

간다. 흘러간다. 곧 닿을 수 있을 거야. 내겐 끝나지 않더라도 아름다우리라는 확신이 있어.

그게 내 음악이고 미술이야. 시야. 인생이야.

어때, 파도 소리 옆에 앉은 기분, 노랗디노란 참회의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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