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문예중앙시선 55
임재정 지음 / 문예중앙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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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간 다층에서 <바누비누 이민 안내>로 우수작품상으로 선정되었을 때 내놓은 시인의 소감을 기억한다.

나는 벽을 마주하는 직업을 가졌다. 
더욱 낮은 자세로 시와 나와 세계에서 면벽! 이런 다짐으로나 갚을 밖에.
깨어 부은 두 손을 맞주무르는 아침마다 늘.

 

벽을 마주 대하여 더욱 낮은 자세로 갚겠다는 시인이어서일까.

이번에 발표된 첫 시집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에서는

눈보다 높이 고개를 들어 꾼 허황된 꿈을 발견할 수 없다.

시집에 엮인 시 중 고도가 인식되는 낱말은 헬리콥터와 십자가 혹은 사다리.

꿈에서나 촛점을 잃고 대상을 쫓아갈 뿐이다.

대신 그는 저수지이거나 지하이거나 변기와 구근이다.

모란과 동백과 참꽃으로 만든 삶의 향기를 침묵으로 흘리면서.

면벽보다는 벽이 얼마나 다양한 표정을 가지고 있는지 얼마나 많은 감정을 숨기고 있는지 

이야기해주려고 벽에 바짝 달라붙어 얼굴을 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아니 스며들어 벽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다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은주*

나를 볼까 눈을 찔렀다는 너에게
손목을 잘라 보냈다
잡을까 두려웠다고 단면에 썼다
붉은 소포가 검게 얼룩져 되돌아왔다

뉘신지, 저는 눈 찌른 뒤 그 밖의 것들이 열려, 온 데가 꽃일 것 같습니다만

밤하늘엔 온통 검은 속 흰자위 하나

발바닥에 든 초승달을 품다 
떨리는 꼬리를 얻고 나머진 다 잃었던가요

반목하는, 눈 찌른 밤을 손목 자른 밤에 잇느라
뜬눈으로 가로지르던
새 한마리



* 마침내 꽃이 된 이를 가리키는 일반 명사.

 


스패너와의 저녁 식사


 모차르트와 칸트는 잘 몰라요 마구 대하면 물고 열 받
은 만큼 체온이 변할 뿐이죠 스패너 말이에요 내 손바닥엔 
그와 함께한 숱한 언덕과 골짜기로 가득해요 지친 날엔 함
께 사촌이 사는 스페인에 갈 수도, 집시로 가벼워질 수도,
공통적으로 우린 공장 얼룩 비좁은 통풍구 따위에 예민합
니다

 초대합니다 나의 반려물들과 친해져보아요 틱 증세가
있는 사출기는 덩치가 커다랗지만 사춘기고요 스패너는
날렵한 몸매에 입과 항문을 구분하지 않아요 악수할까
요? 융기와 침하를 거듭하는 진화론을 두 손 가득 담아드
리죠

 아홉 시 뉴스를 쓸어 담은 찌개가 끓어요 (패륜이란 내
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할 경우) 세게
로 지문에 퇴적된 기름때를 문지릅니다 무지개를 문 거품
을 분명한 목소리로 무지개라 부릅니다

 함께 늦은 저녁을, 숟가락에서 마른 모래가 흘러내려요
건기인가 봐요 우리를 맺어준 물결은 어제처럼 흔적뿐
 몇 개의 공장 지나 강을 따라 우린 바다에 닿을까요 출
항을 꿈꾸는 침대가 삐걱댑니다 마침내 스패너는 분무하
는 고래가 되고 나는 검푸른 등을 타고 남태평양을 항해하
는 꿈, 당겨 덮습니다


 

 캐서린의 <빨강의 자서전>에서 주인공 헤라클레스가 이야기한다.

'무하마드 알리에게 콥스 씨라는 코너맨이 있었는데 라운드가 끝나면

둘이 링 로프에 웅크리고 앉아서

시를 썼지'

영화 <패터슨>에서 꼬마 시인이 마중나온 엄마에게 이야기한다.

'에밀리 디킨슨을 좋아하는 버스운전기사를 만났어요'

이야기는 얼마나 세계를 확장시키는가. 


 

'다시 태어날 땐 사물의 몸을 빌릴 것, 뭐가 좋을까?

윤활유를 쳐야하는 것이라면 뭐든!'(마리에서 로렌까지)

 

올리브 식빵을 입에 우겨넣다말고 생각한다.

음. 나도 다시 태어난다면 망치가 어떨까.

머리와 자루가 같은 소재로 된 일체형의 망치,

나는야

녹슬면 커다란 화분이나 땅에 머리를 박고

흙에 철분이나 조금씩 흘리며 연명하는 망치가 되고 싶네.

불안한 영혼따위 없이,

머리를 아무리 세게 부딪쳐도 흔들리는 생각 없이.


 

 밀물을 견디다; 달이 지구로부터 돌아앉듯 나를 피해

당신이 숨는다; 웅크린 자세로 짓는 그믐이라는 당신의

표정; 당신이 들여다본 나란 낭떠러지일 수도 있다는 생

각; 나의 어제에 볼모 잡힌 당신은 이제 어떤 날개를 얻어

불치인 꿈에서 벗어나시려는지

 

(...)

 

 우편함에 날아든 나비를 보았다 내가 지구에서 만난 가

장 눈부신 혼인색, 봄꿈이라는 당신

 나비 겹눈 속 밀물이다, 붉은 폭설이 흩날린다


                                              - 나비 중 부분


 

 

나는 즐거워

세상엔 온통 고장 난 것들뿐이니


                                                      - 시인의 말


나는 상상한다. 

일하다 짬이 날 때 공구를 오른쪽에 내려놓고 메모하는 시인을.

어쩌다 엎지른 종이컵의 커피가 새소리가 되고 전선줄에 전기를 통하게 하고 
간혹 구름을 흔들어 비가 내리게 하는 문장들이 종이에 못처럼 박혔지.

 

진흙과 얼룩과 구릿함과 발꿈치를 든 시인의 시집이다.

'어쩌다 물 냄새에 웅크린 사구의 한 움큼 모래, 밤이면 사막 한가운데 끌려가서 물기란

다 빼앗기고 쫓겨오는' 삶이지만

 지느러미 혹은 지상엔 무효한 양식인 날개로 간절히 가벼워지는 연기의 구도처럼

 가볍게 리드미컬하게 꽃잎을 헤아려 겹겹 구근을 다 알게된 듯한 자세로.

 

는 즐거워

세상은 온통 치받을 것뿐이니.

 

고장난 것은 또 고장나겠지만

결국엔 '삐걱대면서 여기를 떠난다, 안녕'이겠지만

즐겁고 우울한 고장의 세계에서 오늘도 스패너를 들고 건배.

내가 스패너를 버리거나 스패너가 나를 분해하는 것은 패륜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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