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말들 - 불을 밝히는, 고독한, 무한한, 늘 그 자리에 있는, 비밀스러운, 소중하고 쓸모없으며 썩지 않는 책들로 무장한 문장 시리즈
강민선 지음 / 유유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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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서 나처럼 삶에 실패한 인물들이 나오는 소설을 읽었다. 삶에 실패하는인물이 나오는 소설을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서가에서 아무 책이나 뽑으면 거기에는 처참하게 실패한 인물들이 있었다.
정영수<우리들>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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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숨을 깊이 들이쉬었다. 매캐한 냄새 사이로 머리를 어지럽히는 장미향이 섞여들었다. 향기 속에서 그녀는 잊고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카페 뮐러가 등장하는 그 영화를 본 후 극장 근처의 4층짜리카페에서 오렌지 아이스티를 마셨던 어떤 오후를, 반짝이던 유리컵, 향긋했던 오렌지 조각, 투명하게 찰랑거리던 각얼음, 깊고 맑은 하늘이 펼쳐진 창가의 자리에서 한나는 영화 속의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고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사랑이 아니지, 그런 게 어떻게 사랑이야."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이지?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인 채 느릿느릿 국수를 먹기 시작하고, 영원처럼 정지한 듯한 풍경 위로 헐벗은 그림자가 침묵 속에 간혹 움직였다. 나는 사랑을 몰라. 그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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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그를 알게 된 이후 가끔씩 북극에 대해 상상했다. 균일한 빛깔의 얼음과 짙푸른 하늘을, 끝도 없이 펼쳐진 영원의 적막을. 그리고 카메라 뷰파인더에 눈을 댄 채 하늘을 바라보며 그가 느꼈을 고독 같은 것을 말이다. 그는 많은 날들 동안 얼음 위를 그저 걷고 또 걸었다고 했다. 그때 그는 얼음 위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HAVE A GOOD LIFE. 그녀는 그가 보내온 사진을 화장대 거울 앞에 세워놓았다. 비스 듬히 세워진 밤하늘 위로 수억 년 전에 반짝였을 별빛들이 뒤늦게 쏟아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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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49
김승옥 지음 / 민음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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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거짓말은 하지 말기로 해." "거짓말이 아니에요." 여자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갠 날」 불러 드릴게요." "그렇지만 오늘은 흐린걸." 나는 「어떤 갠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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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진기행 김승옥 소설전집 1
김승옥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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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서로 거짓말은 하지 말기로 해.˝ ˝거짓말이 아니에요.˝ 여자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어떤 갠 날」 불러 드릴게요.˝ ˝그렇지만 오늘은 흐린걸.˝ 나는 「어떤 갠 날」의 그 이별을 생각하며 말했다. 흐린 날엔 사람들은 헤어지지 말기로 하자. 손을 내밀고 그 손을 잡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을 가까이 가까이 좀 더 가까이 끌어당겨 주기로 하자. 나는 그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사랑한다‘라는 그 국어의 어색함이 그렇게 말하고 싶은 나의 충동을 쫓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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