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95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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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을 읽었다. 소로의 눈으로, 소로의 사유로 본 소로적인 월든이었다. 월든을 가 본 적도 없고, 다른 이가 쓴 월든에 대한 글을 읽은 적도 없기에 내 마음속에 자리 잡은 월든 또한 소로적인 월든이다. 고요가 있고 쉼이 있는 곳, 수많은 생명체들의 숨결이 느껴지고 때로 그들에게 치열한 삶의 현장이 되는 곳, 월든은 그렇게 내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유독 몸도 마음도 힘든 계절이었다. 그래서 더 그곳의 고요와 소란을 동경하며 읽었는지도 모르겠다.

소로는 월든의 일부였고 월든은 소로의 일부였다. 월든에 기대 사는 수많은 나무, 새, 꽃, 동물, 물고기 등 모든 생명체들보다 우위를 차지한 소로가 아니라, 그들과 동등한 소로를 만났다. 그래서 좋았다. 자본주의적 시선, 소유적 시선이 아닌 그저 함께이고 일부인 그 시선이 좋았다.

소로는 월든 호숫가에서 2년 2개월 2일 동안 살았다고 했다. 그의 생애 전체로 본다면 긴 시간은 아니지만, 소로의 시간은 월든에서의 삶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고 숲을 연구하고 자연과 생태를 연구하면서 기꺼이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고 했던 사람, 법정 스님께서 월든을 사랑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소로는 우리에게 조언한다. "나는 자신을 겨냥하는 것이 더 고귀한 사냥이라고 믿는다. 자기 내면의 강과 바다를 찾아 나서라. 기왕이면 내면에서 자아의 위도가 높은 지역을 탐험하라"라고. 소로 역시 월든 호수라는 지리적 공간을 선택했지만, 그곳에서 자기 내면의 강과 바다를 발견하고자 했을 것이다.

내가 땅바닥에 깔린 솔잎 사이를 기어가며 내 시야에서 몸을 숨기려 애쓰는 벌레 한 마리를 바라보면서 어쩌면 은인이 될지도 모르고, 그 종족에게 기쁜 소식을 전해 줄 수도 있는 내게 왜 저렇게 겁을 먹고 도망가려고 애쓰는 걸까 자문할 때 저 위에서 더 위대한 은인이자 지존의 존재가 인간 벌레인 나를 내려다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인간은 늘 흔들리며 방황한다. 삶의 불확실성은 늘 불안을 동반한다. 그 불안의 기저에는 위대한 은인이자 지존의 존재에 대한, 아니 우리 자신에 대한 믿음과 확신의 결여가 도사리고 있을 것이다. 그 존재의 힘을, 자신의 내면을 힘을 믿고 자신을 향해 나아가라는 소로의 조언이 월든 호수의 잔물결처럼 고요한 파동으로 전해진다. 쉼 없이 그러나 고요하게.

소로의 문장은 아름다웠다. 많은 문장에 줄을 그었다. 긴 산문이지만 한 편의 시 같았다. 읽는 내내 번역하기 힘들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문학 작품에는 번역불가능성이 제기되지만, 시적 언어에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의 사유 또한 풍부했다. 그리스 신화와 인도 신화, 동양의 공자 사상까지, 그의 철학적 사유와 만난 월든은 더욱 풍부하고 깊이를 가진 공간으로 재탄생되었다.

이 책이 내게 특히 의미가 있었던 이유는 번역을 맡으신 정회성 선생님께서 직접 책을 보내주셨기 때문이다. 내가 쓴 '1984'에 대한 독서 후기를 우연히 읽게 되었다고 하시면서 이번에 월든 교정본이 나왔는데 보내주시겠다는 연락을 해 왔다. 행복에 겨운 경험이었다.

책을 읽으며, 소로의 오두막 근처를, 월든 호수의 한복판에 쪽배를 띄워놓고 물결 따라 흐르는 소로 곁에 머무는 상상을 하곤 했다. 소로적인 월든을 간직하기로 했다. 지친 날, 잠시 그곳에 가서 쉬기로 했다. 그리곤 숲과 호수가 건네는 생명 에너지를 내 몸에 가득 채우고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 현실의 삶을 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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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길이라 부르는 망설임 - 카프카 드로잉 시전집 민음사 세계시인선 리뉴얼판 58
프란츠 카프카 지음, 편영수 옮김 / 민음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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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가 시를 썼다고? 하는 호기심에서 주문한 책이다. 그의 소설적 문체로 미루어 '이상의 시와 닮았을지 몰라' 하는 막연한 생각을 갖기도 했다.

그러나 카프카의 시는 이상의 시처럼 난해하거나, 그의 소설처럼 리좀적이지 않다. 그의 시는 간결하고 깔끔하다. 언어를 아끼고 감정을 절제했다. 물론 표지의 화사함과 내용적인 괴리감은 있지만.

5부로 구성된 시편은 각 부를 구성하는 시편에 번호를 매겨놓아 연작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연작시는 아니다. 그리고 카프카가 정식으로 발간한 시집도 아니다. 그러나 그는 청소년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 해까지 꾸준히 시를 썼다고 한다. 그리고 그가 남긴 드로잉 작품들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카프카 시선집은 카프카의 일기, 편지, 살아 있을 때 출판한 작품과 유고 등에서 카프카의 시(적인 것) 116편을 따로 떼어서 한국어로 번역한 최초의 시도이다. 총 5부로 구성된 이 시선집은 1부는 고독, 2부는 불안, 불행, 슬픔, 고통, 공포, 3부는 덧없음, 4부는 저항 그리고 5부는 자유와 행복의 모티브를 중심으로 묶었다. (작품 후기 참조) 키워드들이 카프카의 삶을 대변하는 듯하다.

그러니 이 책은 카프카가 남긴 모든 글에서 시적인 것을 샅샅이 찾아내 엮은 것이다. '사후 100주년 기념 시선집'이라는 띠지가 붙어있다. 그만큼 카프카의 글은 여전히 두터운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시적 단상이나 드로잉조차도 그냥 묻히는 것을 안타까워하는 독자들이 있는 것이다.


1부-광야를 통과해야 한다

1

오고



이별이 있다

그것도 자주----재회는 없다


2부-지옥의 가면을 쓰고 있다

18

공허, 공허, 공허.

무력함,

자기 파괴,

땅을 뚫고 나온

한 줄기 지옥의 불꽃의 끝.

19

청춘의 무의미.

청춘에 대한 두려움,

무의미에 대한,

비인간작인 삶의 무의미한 상승에 대한

두려움.

20

나는 구석구석 찾지만

자신을 찾지 못한다

33

절 도와주세요!

스스로 당신을 도우세요

당신은 저를 버릴 건가요

네.

제가 당신에게 무슨 짓을 했는데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요.

43

목표는 있으나,

길은 없다.

우리가 길이라고 부르는 것은,

망설임이다.

51

사랑은,

당신이 내게

칼이라는 사실이다

나는 그 칼로

내 마음을 들쑤신다


4부-이미 가장 밑바닥에 와 있다

67

항상 죽고 싶은

욕망뿐이지만

그래도 견뎌내는 것,

그것이 유일하게 사랑이다

70

모든 것이 이해될 수 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79

옛날이

나의 동경이었다,

현재가

나의 동경이었다,

미래가

나의 동경이었다,

그리고 이 모든 것과 함께

나는 죽는다

길가 작은 초소에서,

옛날부터 곧추선

괸 속에서,

국가 소유의

토지에서.

내 인생을

나는 보냈다,

삶을 파괴하는 것을

자제하는 것으로.

80

내 인생을

나는 보냈다,

삶을 끝내고 싶은

욕구에

저항하는 것으로.


5부-춤을 추며 뛰어오르라

96

믿음은

단두대의 칼처럼,

그렇게 무겁고,

그렇게 가볍다.

103

네가 서 있는

땅은

두 발이 서 있는

땅의

면적만큼일 수밖에 없다는

행복을 이해하라.

116

"주인 나리, 어디로 가시나요?"

"모른다" 나는 말했다.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단지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끊임없이 여기에서 떠나는 거야,

그래야 내 목표에 도착할 수 있어."

"그러시다면 나리께서는 목표를 아신단 말씀인가요?" 그가 물었다

"그렇다네" 내가 대답했다.

"내가 이미 말했잖아;

'여기-에서-떠나는 것', 그것이 내 목표야."

소설에서 그는 수많은 탈출구를 만들었지만 결국 그곳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스스로 죽음을 택하거나, 지쳐서 죽는다. '여기-에서-떠나는 것'이 목표였던 카프카, '삶을 끝내고 싶은 욕구에 저항하는 것으로 인생을 보낸 카프카, 누구보다 고독했던 그, 사후 100년이 지나도 여전히 누군가는 그의 작품을 읽고, 그를 기억한다는 사실이 그에게 위로가 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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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판본 작은 아씨들 1 (1896년 오리지널 초판본 표지디자인) - 영화 원작 소설 더스토리 초판본 시리즈
루이자 메이 올콧 지음, 박지선 옮김 / 더스토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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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책은 나름의 가치를 지닌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떤 책은 유독 그런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또한 책의 가치는 사람마다 달라서, 어떤 이에게는 한 권의 책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기도 하지만, 어떤 이이게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하기도 한다.

세 권의 책을 선물 받았는데 그 중 한 권이다. '사람이 온다는 건 사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는 정현종 시인의 시처럼, 세 권의 책은 선물의 의미를 넘어 인연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한다.

"우리나라 사람 중에 '홍길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홍길동전'을 제대로 읽은 사람은 드물다"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있다. '작은 아씨들' 역시 '홍길동전'이나 우리에게 익숙한 책이고, 어린시절 한 번쯤은 읽었을 책이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감정이 사라지기도 하고 퇴색되기도 한다. 오십 대 중반이 되어 다시 읽은 '작은 아씨들'은 여전히 퇴색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던 내 유년의 어느 한 귀퉁이를 만나게 해 주었다.

어린시절, 책이 귀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실 바로 옆에 도서관이 있었다. 도서관이라 해 보았자 교실 하나를 중간에 커튼을 쳐 분리해서 과학실과 도서관으로 이용하던 작은 공간이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신세계의 세상이었다. 담임 선생님께서 이야기를 정말 정말 재미있게 해 주시던 분이었는데, 시험이 끝나거나, 특별한 날에 우리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곤 하셨다. 그런데 선생님께서 들려주시던 이야기가 도서관에 있는 책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도서관은 나에게 동경의 대상이 되었다. 선생님께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읽어도 재미있고, 새로운 이야기를 만나도 좋았다.

어느 햇살 환한 날, 사선으로 비껴들던 햇살을 받으며, 책장에서 책을 고르던 내 모습은 아직도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유년의 따스함이다. 고학년 때는 과학실 청소 당번을 자주 했는데 과학실은 청소할 게 별로 없었다. 그럴 때면 도서관에서 책 한 권을 들고 와, 실험용 기구들을 정리해 놓은 탁자 다리에 기대앉아 책을 읽기도 했다.

그때의 책 읽기는 설렘이었고 책 속 세상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작은 아씨들'을 읽으며 그 시절의 나를 만났다. 그래서 내내 설렜고 내내 아련했다.

네 자매들의 세상이 펼쳐지는 책 속에 내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했다. 그들의 결핍이 안타까웠고, 그들이 짊어진 짐이 내 짐인 냥 무거웠다가, 그들의 배려와 사랑이 온통 내 감정인 냥 스스로 충만해지기도 했다.

풍요로움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요즘, (특히 물질적인 풍요) 결핍을 통해 가족을 더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는 네 자매의 이야기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행복은 풍요로움을 기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사랑, 배려, 관심, 존중 등이 진정한 행복의 원천임을 알게 된다.

그리고 비로소 마치 부인의 보이기 시작했다. 엄마로서, 가난한 이들의 이웃으로서, 아내로서의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과 말은 숭고하고 아름다웠다.

저마다의 개성을 가진 네 자매의 이야기. 서로를 통해 함께 성장하는 네 자매의 유쾌 발랄한 이야기 속에서 헤어 나오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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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예술가의 초상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5
제임스 조이스 지음, 이상옥 옮김 / 민음사 / 200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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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완성은 죽음일 것이다. 우리는 모두 삶의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여정 속에 있다. 수많은 경험과 선택을 통해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 나아가는 길은 누구에게나 눈물겹고 숭고한 일이다.

제임스 조이스의 자전적인 소설 '젊은 예술가의 초상'은 주인공 '스티븐 더덜러스'의 이런 여정을 따라가고 있다. 스티븐 더덜러스는 가족과 민족, 종교, 정치의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 예술가로서의 삶을 선택한다. 옛 영화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버지, 종교만의 영원한 구원의 길임을 믿는 어머니에게서 벗어나고, 조국인 아일랜드의 정치적 갈망(가톨릭 교회와 영국의 통치로부터 독립)과 민족주의, 당시 유럽 사회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종교(가톨릭과 예수회)에서도 벗어나 예술가이 자신의 길임을 자각하고 그 모든 것들에서 스스로 길을 떠난다.

예술에 천착한 그는 그만의 예술론을 정립한다.

우리가 이해하게 된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천천히, 겸허하게, 꾸준히 표현하고 다시 짜내려고 하는 것, 그게 예술이야

예술이란 말이야 미적인 목표를 위해 감각적인 것과 이지적인 것을 인간적으로 처리하는 것이지

그는 또 진실과 아름다움에 대한 견해도 밝힌다.

이해 가능한 것들의 가장 원만한 관계에 의해서 충족되는 지성이 포착하는 바가 진실이요 지각 가능한 것들의 가장 원만한 관계에 의해 충족되는 상상력이 포착하는 바가 아름다움이야
동일한 물체가 모든 사람에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을 수는 있지만, 어떤 아름다운 물체를 찬미하는 모든 사람들은 모든 미적 이해의 단계 그 자체를 충족시키고 또 그것과 합치되는 특정 관계를 그 물체 속에서 보고 있을 거라는 가정이야
아름다움을 위해서는 전일성, 조화, 빛 이 세 가지가 필요해

스티븐 더글러스는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그것이 나의 가정이든 나의 조국이든 나의 교회든, 결코 섬기지 않겠어. 너는 네 방식대로 살면 돼. 나는 내 방식대로 살게 좀 내버려 둬"라고 말한다.

우리 역시 각기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하고 각자의 가치관과 각자의 방식으로 자기만의 세상을 펼쳐나간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확신이 없다면 언제든 외부 환경에 의해 쉽게 흔들릴 수 있고 무너질 수 있다. 주체적 자기 성찰이 필요한 이유다.

세상의 수많은 가치관들을 선과 악, 진실과 거짓 등으로 판단할 수 없다. 스티븐 더글러스의 내가 믿지 않게 된 것은 섬기지 않겠다는 선언처럼 모든 것이 나의 판단이고 선택이다. 예술가의 길을 선택한 스티븐 더글러스의 길만이 숭고하고 아름답다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선택한 길에 대한 믿음과 확신, 그 속에서 진실과 아름다움을 발견하려는 노력이 동반될 때 그 삶은 빛을 발할 수 있을 것이다.

스티븐 더덜러스의 성장 과정에서 '수레바퀴 아래서'의 한스의 모습도 '데미안'의 싱클레어와 데미안의 모습도 보였다. 주체성을 가진 어른으로 성장해 하는 과정에 동반된 아픔과 고뇌, 그것은 한 개인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다시금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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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 하버마스 : 광기의 시대, 소통의 이성 지식인마을 32
하상복 지음 / 김영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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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암흑의 시대 중세를 지나 르네상스와 종교개혁, 과학혁명을 거치는 동안 그때까지 중세 유럽 사회를 지탱했던 세계관과 가치관들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인간은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의 참된 모습을 발견하고자 했고 근대 사회사상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인간은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된 자유롭고 평등한 개인이자 물질적 정신적 주체로 자리 잡았고, 사회는 그러한 인간들의 자유와 평등과 권리를 보장해 주는 제도적 장치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사회사상은 계몽주의 사상가들에 의해 대중적 지식으로 확산되었으며, 유럽 사회의 지평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정치혁명과 경제혁명으로 발산되었다. 이에 유럽은 두 혁명을 통과하면서 근대 사회로 재편되었다. 이러한 거대한 시대적 흐름을 이끈 힘이 이성이었고, 이성은 서구 근대 사회를 이끄는 근본적인 힘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푸코는 서구의 근대 이성은 과학적 진리의 이름으로 비이성적인 것들을 타자화하는 폭력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고고학적 방법을 통해 근대의 지식이 얼마나 진리와 거리가 먼가를, 계보학적 방법을 통해 그 지식이 비이성적인 사람들을 얼마나 정교하게 통제하는가를 제시했다. 근대는 과거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특이한 억압과 지배의 메커니즘을 통해 억압과 폭력을 자행한다고 폭로하였다. 근대의 통치 방식이 외적인 도덕규범을 집단적 차원에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규범의 내면화를 통해 개인들 각자가 참과 거짓, 옳음과 그름의 기준을 가지고 스스로를 통제하는 방식으로 시스템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 도덕원칙이 자신이 아닌 외부로부터 강제된 것이기에 근대 이성이 인간의 자유를 구속하는 폭력으로 보았다.

하지만 하버마스는 근대이성이 삶의 진보와 해방을 이끈 힘이며 민주주의의 동력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절대주의 군주 체제에 대한 정치적 비판과 통제를 통해 민주주의 원리를 구현해 낸 18세기 부르주아 공론장, 살롱, 독서클럽, 공공도서관 등에서 형성된 비판적 여론이 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했다. 하바마스는 이성과 합리성은 수평적이고 개방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기존의 규범과 가치를 비판하면서 새로운 규범과 가치들을 확립해 나가는 원리하고 주장한다.

근대는 거대한 시대의 흐름이었다. 인간의 삶에도 급격한 변화가 주어졌다. 혼란과 발전이 동시에 이루어진 시대였을 것이다. 그런 근대를 전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두 철학자의 사유는 난해했지만 흥미롭기도 했다. 도덕적 규범의 내면화 속에 함몰된 채 그것이 폭력이나 억압이라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하고 외부로부터 강제된 도덕규범을 진리인 양 받아들이며 살았다. 정치체제나 사회가 우리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시스템에 너무 종속적 주체로만 산 건 아닐까 반성이 뒤따른다.

언젠가 역사는 발전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그렇다고 믿는다. 수많은 난제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멈춰있을 수 없는 존재이고 나아감은 우리를 오늘보다는 조금 나은 우리로 변화시키고 있다고 믿기에 근대 이성을 긍정적으로 진단했던 하바마스의 주장도 옳다는 생각이 든다.

푸코는 자신의 도덕적 규범을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능동적 주체가 되라고 말한다. 자기 자신을 배려하고 자기 자신을 돌보며 자기 자신에 몰두하는 자기 성찰로 나아가는 것, 참으로 묵직한 숙제다. 푸코의 주장처럼 능동적 주체가 되지 못하고, 자기 성찰로 나아가지 못한 이성은 언제든 억압과 지배의 메커니즘에 함몰되고 말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덮고도 더 큰 숙제를 받아 안은 기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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