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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 사회학- 하룻밤의 지식여행 6
리차드 오스본 지음, 윤길순 옮김, 보린 밴 룬 그림 / 김영사 / 200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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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매완료


사회학의 주제와 논쟁을 쉽게 요약한 책이다. 그림이 내용과 항상 연관되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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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살 - 한승오 농사일기
한승오 지음, 김보미 그림 / 강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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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언제였던가. 논바닥에 발을 디뎌본 것이. 대학시절, 농활을 갔던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논에서 피를 뽑느라 한 동안 몸을 움직이자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났다. 따가운 뙤약볕 아래의 밭일 또한 무척 힘들었다. 무슨 일을 했던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쭈그리고 앉아서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일주일가량의 경험만으로도 농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다. 때로 조상의 무덤을 찾을 때, 풀을 뽑고 예초기로 풀을 자르는 일이 그나마 농사일에 가장 가까운 일이라고 할 정도일 뿐. 자연을 찾는 것은 내게 휴식과 여유일 뿐이다. 인간의 문화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에 바탕하고 있다면, 나는 그 바탕으로부터 아주 먼 삶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 몸의 유전자 속에 여전히 깊이 새겨져있는 그 경험이 나의 경우처럼 거의 이국적인 먼 이야기로만 들리게 된 것은 근대도시가 형성되고 난 이후의 일일 것이다. 도시가 커지고 인공의 환경을 일상적으로 거의 벗어날 일이 없는 삶은 여러 가지 안전함과 편리함을 낳기는 했지만, 도시는 또한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 분업과 개인주의, 경쟁과 불안, 끊임없는 혁신의 강요가 도시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찍이 루소가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하기 전부터 도시에 대한 염증과 향토취미가 생겨났고, 도시의 삶이 부정적으로 경험될수록 자연과 농촌은 이상적으로 미화되었다. 그러나 어디서건 삶의 현장이 항상 아름답거나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기대는 대개 무지의 소산일 뿐이니까.

그러나 도시인에게 자연이 인간에게 실로 소중한 치유와 회복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어쨌든 사실인 것 같다. 나 역시 자연 속에서의 삶을 희망하고 있다. 창문으로 눈을 돌릴 때마다 신록의 푸르름을 맛보고 싶고, 집 앞을 나서기만 하면 그대로 숲과 들판 속의 산책길에 올라설 수 있으면 좋겠고, 개도 키우고 싶고,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언제나 고요 속의 적요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삶의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그런 변화를 하루라도 앞당기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 모든 소망들이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농사일을 해낼 자신이 없고, 농사일이 내게 충만감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농사일을 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의 삶이란, 가까운 거리에 일자리가 있거나 재택근무가 가능하거나, 그도 아니면 이미 모아놓은 재산이 충분하여 그것을 소비하면서 사는 노후의 삶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자연 속의 삶을 그리워하면서도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나는 도시를 탈출하는 모험을 실행한 사람들에게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도시의 삶밖에 모르는 가족들이 모두 동의를 했을까. 경험도 없는 농사일을 할 용기를 어떻게 낼 수 있었을까. 이웃들과는 어떻게 지내는 걸까. 농산물 가격이 항상 불안하고 수입농산물로 인해 가격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일까.

『몸살 - 한승오 농사일기』라는 제목의 이 책을 펼치면서 나는 이런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이 책은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이런 호기심을 더 강하게 발동시킨 것은 도시에서 태어나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후 제법 오래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흔을 넘긴 상태에서 농사일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이력이었다. 줄곧 도시생활만 했으니 그 역시 농사에 대해서는 나보다 별로 더 아는 것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런 결단을 하다니, 그의 도시경험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이 책은 이런 의문들에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저자가 농사를 시작한지도 벌써 7년이 지났으니, 이런 의문들이 이제 그에게는 낯설게 된 것일까. 도서검색을 해보니 그는 이미 2004년에 자신의 농사경험을 담은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라는 책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책에서는 이런 의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들을 적어놓았을까. 그 책 또한 한 번 읽어볼 일이다.

그래도 이 책은 도시사람이 농사일을 시작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들과 고난들, 깨달음들을 충실히 담고 있다. 농사지은 지 칠년이 되었지만, 아직 평생을 농사에 바쳐온 사람들을 따라잡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가 농사를 배워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찬찬히 적어놓은 덕택에 나는 거의 난생처음으로 한 해 동안의 농사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사계절이 농사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 계절을 따라 농민은 어떤 일을 하는지, 농작물들은 어떻게 자라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서술들은 내게 참으로 새롭고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벼농사만 해도 그렇다. 초봄에 거름을 대고 나서 쟁기질을 하고, 모상자를 준비하고, 볍씨를 물에 담그고, 움튼 볍씨를 모상자에 넣고, 논바닥을 고르고, 볍씨가 싹이 튼 모상자를 못자리로 옮기고, 논두렁을 매고, 논흙을 ‘로타리’치고, 이렇게 준비된 논에 마침내 모내기를 한다. 그리고 ‘뜬모’를 하고, 비가 오면 물높이를 조절해주고, 자주 풀을 매고, 논에서 물을 빼었다가 다시 넣어주고, 그렇게 돌본 벼가 여름 해를 받아 잘 익으면 이윽고 가을걷이를 한다. 콤바인으로 탈곡을 하고, 포대에 담긴 나락을 널어 말리고, 포장을 하면 마침내 햅쌀이 시장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농부의 속을 태우고 몸을 혹사시키는 일들이다. 비와 햇빛은 농부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조금만 소홀히 하면 농사에 금세 차질이 생긴다. 곳곳에, 매순간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한 순간을 놓치면 열배의 일을 해야 하게 되므로, 농부는 일을 ‘연기’할 수 없다. 한마디로 작물을 섬기고 받들어야 제대로 된 소출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기른 작물은 그래서 농부에게는 자식과도 같다.

이 즈음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언젠가 뉴스를 보니 다 자란 배추들이 밭에서 그냥 썩어가고 있었다. 워낙 배추 값이 추락하여 사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벼농사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배추 농사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 배추를 그냥 썩도록 밭에 버려두어야 하는 농부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한승오의 농사는 벼와 배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조그마한 땅만 있어도 내버려두지 않고 무언가를 심는다. 참깨를 심고 들깨도 심고, 고추에 감자에 땅콩에, 실로 다종다기하다. 게다가 닭도 키우고 개도 키운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쁠까. 또 배워야 하고 경험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을까. 농사는 육체노동만이 아니었다.

책을 읽으면서 참 여러 가지 농작물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배웠다. 땅콩이 땅 속에서 자란다는 것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즐겨 먹는 땅콩임에도 나는 땅콩이 땅 위에서 자라는지 땅 속에서 자라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쩌다 밭길을 걸을 때에도 도대체 뭘 심어놓은 것인지 알지 못하고, 나무를 봐도 사과가 달려있어야 사과나무인줄 알지, 열매가 없으면 분간할 줄 아는 나무가 없다. 워낙 나무와 풀들을 가까이 할 기회가 없고, 몰라도 먹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니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자연을 접할 때마다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작물이 나올 때마다, 꽃 이름과 동물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사진들을 더불어 봤다. 그 중 몇 개라도 기억하게 된다면, 그래서 실물을 보고 분간할 줄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소출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농부의 일상을 가감 없이 자연스럽게 전해주는 가운데 나를 교육시켰다. 단 하루 만에 읽으면서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저자의 담담하고 수더분한 어조도 책을 읽는 재미를 키워주었다. 농사를 짓는 힘든 결단을 했다고 거들먹거리거나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없다. 그저 하루하루의 과제들이 던지는 만만치 않은 도전 앞에서 고단하지만 꿋꿋이 버텨나가는 한 사람의 진솔한 일기일 뿐이고, 그래서 공감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도시인에서 농민으로 전환한 사람의 성찰들이 나타난다.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순간적인 감흥이 아니라 숱한 경험을 거쳐 얻어낸 성찰들이다. 그 가운데 몇 개만 옮겨 적어본다.

- “매끄럽고 부드럽게 보이는 내 손을 보았다. 하지만 그 손에서 나오는 손길은 거칠기 짝이 없다.”(32쪽) 문명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성찰이다. 인간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으로까지 파고드는 파괴성.

- “꽃은 꽃이 아니라 고단한 일이 되고 말았다.”(46쪽) 아름다움이란 미적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무관심성”을 미의 조건으로 내세운 칸트의 미학과도 통한다.

- “콩을 심어본 뒤, ‘공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희망인가를 알았다.”(75쪽) 이런 것이 비단 농부만의 경험이겠는가. 생존의 심각한 조건이 걸린, 첨예한 이해대립의 상황 속에서 공생을 말하기는 실로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공생, 상생을 표어처럼 늘어놓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돌이켜보면 결국 공생, 상생이라는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 “위로만 커가려는 성장의 욕망을 꺾은 다음에야 비로소 열매를 실하게 맺을 수 있음을 알았다. 열매가 맺힌 자리에는 스스로 꽃을 떨어뜨린 아픔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았다.”(88쪽) 진정한 성취는 절제와 집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들깨가 몸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겉만 번드르르한 그럴 듯한 기만의 언어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와중에 이런 진솔하고 웅숭깊은 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즐겁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자신과 농토와의 대면만 있을 뿐, 농사를 짓게 된 사연이나 가족들이 겪은 과정들, 이웃을 사귀어가는 과정 등이 빠져있다는 것이 하나의 아쉬움이다. 농사를 지을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대목들이 궁금할 터인데 말이다.

그리고 농민으로서 작금의 한국 농업이 처한 현실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물론‘어느 농사꾼의 죽음’이라는 대목에서,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서 농민들이 처한 곤궁한 경제상황을 서술하고 농작물 수입정책을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판의 근거가 다소 당위론이나 신비론에 치우친 느낌이다. 쌀이 하늘이고 역사고 풍경이고 마음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고비용의 농업을 현재 규모로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보자면 공산품이라고 해서 하늘이 아니고 역사가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이 있을까. 또 다른 하늘과 역사와 풍경을 담은 농산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있는 것일까. 노동자라고 해서 공업정책에 대한 대단한 식견을 저절로 가질 수는 없듯이 저자가 농민이라고 해서 농업정책에 대한 전문가적인 식견을 반드시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산업에서 활동하다가 농업을 하게 된 사람이니, 이런 문제에 대한 좀 더 치밀한 의견을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농산물들이 우리 농산물의 3분의 1, 4분의 1도 안 되는 값으로 시장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하늘과 역사와 마음을 되새겨 우리 것을 소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우리 농업을 지켜야 할 더 나은 논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책이 농업정책론으로 집필된 것도 아니니, 내가 정말 관심이 있다면 이런 방면으로 내게 도움을 줄 책이 없을까. 그런 책을 찾아 읽으면 될 일이다.

오랜만에 농사 이야기를 읽고, 농작물과 꽃과 들짐승과 나무들의 사진들을 찾아보면서 이제 곧 다가올 가을이 느껴진다. 당장은 햇볕이 너무 따갑지만, 조금만 선선해지면 들판에 나가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배운 것들로 인해 논의 벼들과 밭의 작물들이 한결 더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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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생, 거지 광문이 샘깊은 오늘고전 4
박지원 지음, 박상률 엮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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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원의 <허생전>이 새로 우리말로 다듬어져 나왔다. 시인 박상률이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박지원의 초기작인 <거지 광문이>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110쪽 가량의 얇은 분량에 읽기 좋은 디자인, 곳곳에 들어간 컬러 그림 등이 책을 읽는 내내 읽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박상률의 뛰어난 한국어 솜씨다. 그는 옛뜻을 잃지 않으면서도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장들로 박지원의 글을 되살려 놓았다. 게다가 오늘날의 독자가 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거의 표시나지 않게 작품 곳곳에 끼워넣기도 했다. <허생전>을 수록한 다른 책들이 수없이 많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이 보다 더 나은 판본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태헌의 그림이 너무 단순하고 구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기왕에 그림을 넣기로 한 것이라면 박지원 시대의 풍속을 알게 해주고, 또 작중 인물들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도록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이 들어가는 것이 훨씬 교육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김태헌의 그림은 색감이나 형태가 그런대로 볼 만하기는 하지만, 너무 미니멀하고 구상도 임의적이라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허생전>을 다시 읽어보니 여러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1. 재산도 없으면서 10년동안 공부만 하겠다고 책상 앞에만 앉아 아내를 혹사시킨 허생의 태도 역시 비판받아야 할 고루한 남성의 모습이 아니던가? 

2.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지내던 허생이 아내가 화를 내자 갑자기 7년만에 공부를 끝내고 가출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3. 변부자는 어찌하여 만냥이라는 돈을 생면부지의 허생에게 덜컥 빌려주었는가? 사람의 인상을 보고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과연 이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또 자신의 노력 없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 일을 도모해보겠다는 허생의 터무니 없는 발상은 과연 옳은 것인가?

4. 책만 읽어오던 허생이 어떻게 안성장에 가서 매점매석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가? 허생 자신도 나중에 인정하고 있지만("백성의 것을 도적질하는 장사 방법", 65쪽), 매점매석이란 부도덕한 상행위가 아닌가? 허생은 부도덕한 행위를 하려고 돈을 빌렸는데, 왜 돈을 벌겠다고 한 것인가? 결국 나중에는 다시 빈털털이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허생은 자신의 능력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었을까? 혹은 그런 시험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만일 그런 것이라면 허생의 시도는 당초부터 필요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너무나 유능하고 완벽하고 손쉽게 모든 시도를 성공시키니까 말이다.

5. 허생은 도적떼를 한 섬으로 이끌어 그 곳에서 일종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천 명 뿐이다.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구원할 수 있는 유토피아의 구상은 과연 얼마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가? 또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허생은 무엇을 했는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 않은가?

6. 허생은 왜 자신이 건설한 유토피아를 떠나는가? "땅은 좁고 덕은 모자라"(57쪽) 떠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곳을 떠난 그가 하는 짓은 다시 은둔하는 것 뿐이다. 은둔하는 사람에게 넓은 땅이 왜 필요하며, 유토피아에 덕이 모자란다면 덕을 키우는 데 기여해야 했을 일이 아닌가?

7. 허생은 섬을 떠나면서 글 아는 사람은 모두 배에 태워 함께 데리고 나온다. 그 이유는 글을 아는 것이 "불행의 뿌리"(60쪽)가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허생은 반지식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가? 그런 입장이라면 그 자신은 무엇때문에 10년 공부를 한다며 책만 붙잡고 있었던 것인가?

8. 허생은 섬을 떠나면서 은 오십만 냥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린다. 그러느니 그 거금을 애국심이 강한 허생이니만큼 국가를 위해 쓰거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는 것이 옳았을 것 아닌가?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그런 돈을 왜 버려버리는가? 

9. 은둔은 개인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금욕적 항거를 의미할 수 있으나,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럽고 음흉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은 깨끗해질 수 있으나 세상은 더러운 채 그대로 남게 된다. 물론 더러운 세계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는 은둔이 차라리 낫다고 하겠지만, 이런 선택은 어디까지나 차선이 아닐까? 세상을 그렇게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보고 있으며, 또 세상이 나아지는 길까지 알고 있는 허생이라면 왜 그 길을 추구하지 않는가? 이는 비난이라기보다는 허생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염려하는 지적이다. 당시 양반계급에 대한 허생의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결국 허생은 작품의 끝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빈방만"(77쪽) 남겨놓고 만다. 아내로부터도 떠나는, 완전한 은둔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허생의 결말은 신비롭기는 하지만, 현실도피적이며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당대 조선을 혁신하는 길이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온갖 의문들을 남겨놓고 고민하게 하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현실적 소설이 아니라 우화나 풍자로만 읽는 것이 옳은 독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허생이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정치판만 보더라도 허생의 고민이 지닌 보편적인 성격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지리멸렬한 세상에 대한 한탄과 염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나 인간이 느껴온 감정의 일부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올곧은 비판과 가차 없는 조롱, 여기까지가 허생의 미덕이다. 그러나 그 비판과 조롱이 해답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데 허생의 한계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허생의 매점매석이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탈레스는 어느 해에 올리브 풍년이 들 것을 예측하고 밀레토스 시내 전체의 기름틀을 몽땅 세내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는 이로부터 철학자는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철학자의 마음은 더 높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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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중의 탄생 - 청중의 자리에서 본 클래식 신화의 탄생과 해체
와타나베 히로시 지음, 윤대석 옮김 / 강 / 200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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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거의 캄캄할 정도로 낮은 조도로 뒤덮인 객석과 밝지만 은은한 색상의 조명으로 뒤덮인 무대. 무대 위의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제각기 음을 맞춰보면서 특유의 음의 혼돈을 연출한다. 이윽고 단원들도 조용해지고, 지휘자가 나타나면 웅성거리던 청중들은 말을 멈추고 박수를 친다. 지휘자는 인사를 한 후, 두 손을 들고 오케스트라를 향해 첫마디의 시작을 알린다. 이후, 청중석에 앉은 사람들은 몸을 움직이거나 말을 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어쩔 수 없이 재채기나 기침을 할 때조차 아주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 다른 사람들의 청취를 방해하는 일이니 말이다. 연주홀 안의 모든 시설들은 오로지 무대 위에서의 연주에 집중하도록 짜여져 있다. 관객들은 주위의 다른 관객들이 아니라 오로지 연주만에 집중해야 하고, 따라서 예술작품과 오로지 개인으로서만 만나야 한다. 이 때 예술작품은 거의 경모되는 어떤 것이다.

청중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상당히 어려운 적응과정을 강요한다. 이런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은 문화적 수준과 소양이 낮은 사람으로 폄하되고, 다른 청중들의 깔보는 듯한 찌푸린 눈길을 감수해야 한다. 이런 수용방식은 결코 자연스럽지 않고, 오히려 극도로 인위적이다. 특수한 관계방식에 대한 정보와 훈련을 거치지 않고는 결코 편할 수 없는 것이 청중의 '바람직한' 태도다. 이 '바람직함'은 대단히 위계적인 가치관을 내포하고 있다. '고급' 문화에 맞는 태도방식에 대한 익숙함은 하나의 신분적 표징으로 간주되기 때문이다.

청중에 대한 이런 '훈육'은 왜, 어떻게 가능해진 것일까?

근대적 의미에서의 예술, 다시 말해 예술외적인 목적에 종속되지 않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독자적인 목적을 지니는 고유한 영역으로서의 예술이 성립된 시기는 대체로 18세기 말로 추정되고 있다. 물론 예술이 수공업적 기술과 구별되어 다른 보다 높은 정신적 가치를 지니는 영역으로 간주되기 시작한 것은 이보다 더 이전인 르네상스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좀 더 정밀하게 따져보면 고대에도 이미 예술이 단순한 수공업과는 달리 좀 더 고급의 인간능력의 산물로 취급되었던 흔적을 찾아볼 수 있는 일이지만, 예술이 사회적인 규모에서 도덕, 학문, 교육, 종교 등이 부여하는 과제로부터 놓여나이런 음악의 수용양식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아니, 극히 인위적인 것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위 '자율적'인 영역으로 성립되고 제작, 수용되기 시작한 것이 18세기 말이라는 데에는 일반적으로 이론이 없다.

이렇게 예술이 자율적 영역으로 성립되면서 예술의 산출과 수용의 양상에서도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이전에는 공동의 모임에서 소리내어 읽던 독서는 이제 개인의 묵독으로 바뀌었고, 주로 시장에서 저급한 오락의 기능을 담당했던 연극은 극장 안으로 들어와 소위 '제4의 벽'을 구축하여 집중적인 관람을 가능하게 했다. 미술 역시 미술시장 및 미술관의 성립과 더불어 종교적, 세속적 과제로부터 벗어나 미적 가치 자체를 추구하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과정에 음악에서는 어떻게 일어났으며, 최근에는 또 어떤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상술하고 있는 책이다.

매우 대중적이며 쉽게 쓰여져있는 이 책은 근대적 청중의 성립에 대한 묘사로부터 시작된다. 이 청중이 성립되기 이전, 음악은 다른 예술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주로 실용적인 목적을 수행하는 데 사용되었다. 교회에서 신앙심을 키우고, 귀족들의 파티에서 흥을 돋우고, 춤을 반주하고, 식욕을 돋우고, 귀족들을 칭송하는 것이 음악이었다. 그러나 음악회라는 것이 성립된 후에도 한참동안 음악회는 일종의 파티이자 사교의 장이었다. 청중들은 적어도 음악에 대해서만큼이나 주변의 관객들에게 관심을 쏟았다.

문학과 달리 감각적 소재만을 취해야하는 음악은 모든 예술 장르들 가운데 가장 저급한 것으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대표적인 예가 칸트다. 칸트에게 음악은 정신성이 결여된, 단순한 쾌적함만을 제공해줄 뿐인, 따라서 가장 저급한 예술이었다.

18세기 말 이후 음악은 이러한 관념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19세기에는 음악을 정신의 표현으로 간주하는 소위 '진지파'가 기존의 '오락파'에 승리를 거두게 되었다. 그리고 탁월한 음악가들은 '거장'으로 숭배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음악 자체도 고급음악과 저급음악으로 갈라졌고, 저급음악으로 분류된 음악은 차츰 콘서트홀에서 배제되었다.

'진지파'들은 음악이란 감각적 음의 향유가 아니라 음악의 구조적 측면을 읽어내어 이로부터 어떤 정신적 의미를 간파해내는 작업으로 간주했다. 음악에서 음은 이제 단지 표면만을 구성할 뿐이었고, 그 배후의 정신성만이 진정하고 품위 있고 고상한 향유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렇게 '거장'에 의해 창조되어 '진지하게' 수용되어야 하는 음악에 대해 청중은 숭배와 경건의 태도, 즉 거의 종교적인 태도를 보여야 했다.

저자는 이러한 음악의 수용방식이 1920년대에 바뀌기 시작했다고 한다. 벤야민이 지적했듯, 예술복제시대가 시작된 것인데, 음악에서는 축음기, 라디오, 재생피아노 등이 새로운 '하이테크' 매체로 등장한 것이다. 이로써 음악은 한결 더 접근성이 커졌으며, 음악의 신전이라고 해야 할 콘서크홀을 빠져나와 언제 어디서나 수많은 대중에 의해 청취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음악이 일상에서 격리된 위상을 벗어나 다시 일상에 접근하는 것을 의미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2차대전이 끝난 후에 더욱 강화되었다.

이제 음악청취는 완성된 작품의 참된 의미에 대한 추구가 아니라 무수하게 다양하게 연주될 수 있고, 일체의 규범적 수용방식을 벗어난 자유롭고 개인적인 향유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사회 전반을 지배하게 된 상업화의 경향이 음악계에도 침투하여 음악은 그 자체로서 고급스런 광고의 수단이 될 뿐만 아니라, 일상을 장식하는 소품이 되기도 하고, 영화의 한 요소로 활용되기도 한다. 다시 말해 19세기의 진지파가 주장했던 '순수관조'의 수용방식은 다시 해체되어 그 이전의 실용적 음악관에 의해 밀려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음악은 소수의 엘리트의 전유물이 아니라 대중의 라이프스타일의 일부로 간주된다. 자율적 예술은 다시 오락과 유희의 대상으로 대중에게 돌아오고 있으며, 이것이 바로 음악에서 나타나고 있는, 불가역적인 포스트모던한 경향이다.

대강 이런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자율적 예술의 성립과 해체의 과정 자체는 그간 많이 논의된 바 있으므로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 책에서는 그 과정에 음악의 수용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나타났는지를 매우 흥미롭고 전형적인 사례들을 통해 확인해보는 재미가 있다. 저자의 필체는 매우 평이하며, 독자를 가르치려 한다기보다는 자신의 성실한 탐구결과를 짜임새 있게 보고하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많은 정보를 취하면서 재미도 느낄 수 있으니, 좋은 대중서가 갖추어야 할 미덕들을 다 갖추고 있는 책이다.

그러나 물론 자율적 예술이 불가역적으로 해체되고 있다는 저자의 견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오히려 더 불가역적이었던 것은 자율적 예술의 성립이 아니었던가 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자율적 예술의 성립 후에도 타율적, 실용적 예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예술시장을 양적으로는 언제나 지배해왔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므로 근래에 클래식 음악이 전통적인 장을 벗어나 다양하게 활용되고 다양한 수용방식들이 새롭게 나타나고 있다고 해서 자율적 예술의 장 자체가 와해되고 있다고 보는 것은 성급한 판단이다. 저자는 이 책이 발표된 지 7년 후에 덧붙여놓은 후기에서 이와 비슷한 생각을 표명하고 있다. 이 책의 초판이 1989년 발표되었으니, 포스트모던이 마치 세상을 뒤바꿀 것이라는 과장된 생각이 한참 지식계를 강타하고 있던 시점이었다. 이 당시의 성급한 흥분들이 이 책에 고스란히 묻어 있다.

그러나 이런 관점상의 유보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잘 정리하여 전해주는 구체적 정보들의 가치는 손상되지 않는다.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아가 예술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볼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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