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살 - 한승오 농사일기
한승오 지음, 김보미 그림 / 강 / 2007년 8월
평점 :
절판



언제였던가. 논바닥에 발을 디뎌본 것이. 대학시절, 농활을 갔던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논에서 피를 뽑느라 한 동안 몸을 움직이자 팔과 다리 여기저기에 생채기가 났다. 따가운 뙤약볕 아래의 밭일 또한 무척 힘들었다. 무슨 일을 했던지는 제대로 기억나지 않지만, 쭈그리고 앉아서 몸을 움직이는 것 자체만으로도 고통스러웠다. 일주일가량의 경험만으로도 농사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는 짐작할 수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 나는 농사일을 해본 적이 없다. 때로 조상의 무덤을 찾을 때, 풀을 뽑고 예초기로 풀을 자르는 일이 그나마 농사일에 가장 가까운 일이라고 할 정도일 뿐. 자연을 찾는 것은 내게 휴식과 여유일 뿐이다. 인간의 문화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노동에 바탕하고 있다면, 나는 그 바탕으로부터 아주 먼 삶을 살아온 것이다.

우리 몸의 유전자 속에 여전히 깊이 새겨져있는 그 경험이 나의 경우처럼 거의 이국적인 먼 이야기로만 들리게 된 것은 근대도시가 형성되고 난 이후의 일일 것이다. 도시가 커지고 인공의 환경을 일상적으로 거의 벗어날 일이 없는 삶은 여러 가지 안전함과 편리함을 낳기는 했지만, 도시는 또한 자본주의의 산물이었다. 분업과 개인주의, 경쟁과 불안, 끊임없는 혁신의 강요가 도시의 삶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찍이 루소가 자연으로의 회귀를 말하기 전부터 도시에 대한 염증과 향토취미가 생겨났고, 도시의 삶이 부정적으로 경험될수록 자연과 농촌은 이상적으로 미화되었다. 그러나 어디서건 삶의 현장이 항상 아름답거나 행복할 수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 기대는 대개 무지의 소산일 뿐이니까.

그러나 도시인에게 자연이 인간에게 실로 소중한 치유와 회복의 기회를 제공해주는 것은 어쨌든 사실인 것 같다. 나 역시 자연 속에서의 삶을 희망하고 있다. 창문으로 눈을 돌릴 때마다 신록의 푸르름을 맛보고 싶고, 집 앞을 나서기만 하면 그대로 숲과 들판 속의 산책길에 올라설 수 있으면 좋겠고, 개도 키우고 싶고, 굳이 찾아 나서지 않아도 언제나 고요 속의 적요를 느낄 수 있었으면 좋겠고, 맑은 공기를 호흡하며 살았으면 좋겠다. 삶의 조건이 갖추어진다면 그런 변화를 하루라도 앞당기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아직은 이 모든 소망들이 사치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적어도 지금까지는 농사일을 해낼 자신이 없고, 농사일이 내게 충만감을 주리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농사일을 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의 삶이란, 가까운 거리에 일자리가 있거나 재택근무가 가능하거나, 그도 아니면 이미 모아놓은 재산이 충분하여 그것을 소비하면서 사는 노후의 삶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나는 자연 속의 삶을 그리워하면서도 도시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나는 도시를 탈출하는 모험을 실행한 사람들에게 늘 경이로움을 느낀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도시의 삶밖에 모르는 가족들이 모두 동의를 했을까. 경험도 없는 농사일을 할 용기를 어떻게 낼 수 있었을까. 이웃들과는 어떻게 지내는 걸까. 농산물 가격이 항상 불안하고 수입농산물로 인해 가격압박을 받는 상황에서 경제적으로 버텨낼 수 있는 것일까.

『몸살 - 한승오 농사일기』라는 제목의 이 책을 펼치면서 나는 이런 강한 호기심을 느끼고 있었다. 이런 의문에 대해 이 책은 어떻게 답하고 있을까. 이런 호기심을 더 강하게 발동시킨 것은 도시에서 태어나 소위 명문대를 졸업한 후 제법 오래 사회생활을 하면서 마흔을 넘긴 상태에서 농사일을 시작했다는 저자의 이력이었다. 줄곧 도시생활만 했으니 그 역시 농사에 대해서는 나보다 별로 더 아는 것도 없었을 터였다. 그런데도 그런 결단을 하다니, 그의 도시경험이 그토록 혐오스러운 것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일까.

아쉽게도 이 책은 이런 의문들에 답을 해주지는 않는다. 저자가 농사를 시작한지도 벌써 7년이 지났으니, 이런 의문들이 이제 그에게는 낯설게 된 것일까. 도서검색을 해보니 그는 이미 2004년에 자신의 농사경험을 담은 『그래, 땅이 받아줍디까』라는 책을 발표한 바 있다. 그 책에서는 이런 의문들에 대한 그의 대답들을 적어놓았을까. 그 책 또한 한 번 읽어볼 일이다.

그래도 이 책은 도시사람이 농사일을 시작하면서 겪는 시행착오들과 고난들, 깨달음들을 충실히 담고 있다. 농사지은 지 칠년이 되었지만, 아직 평생을 농사에 바쳐온 사람들을 따라잡았다고는 할 수 없는 것 같다. 그가 농사를 배워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찬찬히 적어놓은 덕택에 나는 거의 난생처음으로 한 해 동안의 농사에 대해 대략적으로나마 알게 되었다.

사계절이 농사에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 계절을 따라 농민은 어떤 일을 하는지, 농작물들은 어떻게 자라나는지, 이런 것들에 대한 서술들은 내게 참으로 새롭고 신기하고 흥미로웠다. 벼농사만 해도 그렇다. 초봄에 거름을 대고 나서 쟁기질을 하고, 모상자를 준비하고, 볍씨를 물에 담그고, 움튼 볍씨를 모상자에 넣고, 논바닥을 고르고, 볍씨가 싹이 튼 모상자를 못자리로 옮기고, 논두렁을 매고, 논흙을 ‘로타리’치고, 이렇게 준비된 논에 마침내 모내기를 한다. 그리고 ‘뜬모’를 하고, 비가 오면 물높이를 조절해주고, 자주 풀을 매고, 논에서 물을 빼었다가 다시 넣어주고, 그렇게 돌본 벼가 여름 해를 받아 잘 익으면 이윽고 가을걷이를 한다. 콤바인으로 탈곡을 하고, 포대에 담긴 나락을 널어 말리고, 포장을 하면 마침내 햅쌀이 시장으로 나가는 것이다.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농부의 속을 태우고 몸을 혹사시키는 일들이다. 비와 햇빛은 농부의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 조금만 소홀히 하면 농사에 금세 차질이 생긴다. 곳곳에, 매순간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한 순간을 놓치면 열배의 일을 해야 하게 되므로, 농부는 일을 ‘연기’할 수 없다. 한마디로 작물을 섬기고 받들어야 제대로 된 소출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애지중지 기른 작물은 그래서 농부에게는 자식과도 같다.

이 즈음에서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언젠가 뉴스를 보니 다 자란 배추들이 밭에서 그냥 썩어가고 있었다. 워낙 배추 값이 추락하여 사가겠다는 사람이 없어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벼농사와는 비교할 수 없겠지만, 이 책에서 묘사된 배추 농사 역시 만만하지 않았다. 그런 배추를 그냥 썩도록 밭에 버려두어야 하는 농부의 심정은 어떤 것일까.

한승오의 농사는 벼와 배추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조그마한 땅만 있어도 내버려두지 않고 무언가를 심는다. 참깨를 심고 들깨도 심고, 고추에 감자에 땅콩에, 실로 다종다기하다. 게다가 닭도 키우고 개도 키운다. 그러니 하루하루가 얼마나 바쁠까. 또 배워야 하고 경험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을까. 농사는 육체노동만이 아니었다.

책을 읽으면서 참 여러 가지 농작물에 대해 조금씩이나마 배웠다. 땅콩이 땅 속에서 자란다는 것도 이 책을 보고 처음 알았다. 즐겨 먹는 땅콩임에도 나는 땅콩이 땅 위에서 자라는지 땅 속에서 자라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쩌다 밭길을 걸을 때에도 도대체 뭘 심어놓은 것인지 알지 못하고, 나무를 봐도 사과가 달려있어야 사과나무인줄 알지, 열매가 없으면 분간할 줄 아는 나무가 없다. 워낙 나무와 풀들을 가까이 할 기회가 없고, 몰라도 먹는 데에는 지장이 없으니 이렇게 되고 말았지만, 자연을 접할 때마다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작물이 나올 때마다, 꽃 이름과 동물 이름이 나올 때마다 인터넷을 검색하여 사진들을 더불어 봤다. 그 중 몇 개라도 기억하게 된다면, 그래서 실물을 보고 분간할 줄 알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이 책을 읽은 소출은 만족스러울 것이다.

이렇게 이 책은 농부의 일상을 가감 없이 자연스럽게 전해주는 가운데 나를 교육시켰다. 단 하루 만에 읽으면서 이렇게 흥미진진하게 많은 것을 배웠다는 것은 기쁜 일이다. 저자의 담담하고 수더분한 어조도 책을 읽는 재미를 키워주었다. 농사를 짓는 힘든 결단을 했다고 거들먹거리거나 독자를 가르치려고 하는 태도는 없다. 그저 하루하루의 과제들이 던지는 만만치 않은 도전 앞에서 고단하지만 꿋꿋이 버텨나가는 한 사람의 진솔한 일기일 뿐이고, 그래서 공감을 주는 책이다.

그리고 이따금씩 도시인에서 농민으로 전환한 사람의 성찰들이 나타난다. 머릿속에서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순간적인 감흥이 아니라 숱한 경험을 거쳐 얻어낸 성찰들이다. 그 가운데 몇 개만 옮겨 적어본다.

- “매끄럽고 부드럽게 보이는 내 손을 보았다. 하지만 그 손에서 나오는 손길은 거칠기 짝이 없다.”(32쪽) 문명의 파괴적인 힘에 대한 성찰이다. 인간의 외면만이 아니라 내면으로까지 파고드는 파괴성.

- “꽃은 꽃이 아니라 고단한 일이 되고 말았다.”(46쪽) 아름다움이란 미적 거리를 필요로 한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는 이 말은 “무관심성”을 미의 조건으로 내세운 칸트의 미학과도 통한다.

- “콩을 심어본 뒤, ‘공생’이라는 말이 얼마나 실천하기 어려운 희망인가를 알았다.”(75쪽) 이런 것이 비단 농부만의 경험이겠는가. 생존의 심각한 조건이 걸린, 첨예한 이해대립의 상황 속에서 공생을 말하기는 실로 쉽지 않다. 이런 상황에서 공생, 상생을 표어처럼 늘어놓는 것은 그 자체가 하나의 폭력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번 더 돌이켜보면 결국 공생, 상생이라는 목표를 잊지 말아야 한다. 자연과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 “위로만 커가려는 성장의 욕망을 꺾은 다음에야 비로소 열매를 실하게 맺을 수 있음을 알았다. 열매가 맺힌 자리에는 스스로 꽃을 떨어뜨린 아픔이 짙게 배어 있음을 알았다.”(88쪽) 진정한 성취는 절제와 집중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들깨가 몸으로 가르쳐주고 있다.

겉만 번드르르한 그럴 듯한 기만의 언어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와중에 이런 진솔하고 웅숭깊은 말들을 만나게 되는 것은 즐겁고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듯, 자신과 농토와의 대면만 있을 뿐, 농사를 짓게 된 사연이나 가족들이 겪은 과정들, 이웃을 사귀어가는 과정 등이 빠져있다는 것이 하나의 아쉬움이다. 농사를 지을 마음이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대목들이 궁금할 터인데 말이다.

그리고 농민으로서 작금의 한국 농업이 처한 현실에 대한 생각을 피력하지 않은 것도 아쉽다. 물론‘어느 농사꾼의 죽음’이라는 대목에서, 그리고 책의 끝부분에서 농민들이 처한 곤궁한 경제상황을 서술하고 농작물 수입정책을 비판하고 있기는 하지만, 비판의 근거가 다소 당위론이나 신비론에 치우친 느낌이다. 쌀이 하늘이고 역사고 풍경이고 마음이라는 것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가 고비용의 농업을 현재 규모로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충분한 이유가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이렇게 보자면 공산품이라고 해서 하늘이 아니고 역사가 아니고 마음이 아닌 것이 있을까. 또 다른 하늘과 역사와 풍경을 담은 농산물이라고 해서 우리가 먹지 말아야 할 이유는 있는 것일까. 노동자라고 해서 공업정책에 대한 대단한 식견을 저절로 가질 수는 없듯이 저자가 농민이라고 해서 농업정책에 대한 전문가적인 식견을 반드시 요구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는 고등교육을 받고 지식산업에서 활동하다가 농업을 하게 된 사람이니, 이런 문제에 대한 좀 더 치밀한 의견을 기대하게 되었던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외국의 농산물들이 우리 농산물의 3분의 1, 4분의 1도 안 되는 값으로 시장에 등장하는 상황에서 소비자들에게 하늘과 역사와 마음을 되새겨 우리 것을 소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인 듯하다. 우리 농업을 지켜야 할 더 나은 논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애초에 이 책이 농업정책론으로 집필된 것도 아니니, 내가 정말 관심이 있다면 이런 방면으로 내게 도움을 줄 책이 없을까. 그런 책을 찾아 읽으면 될 일이다.

오랜만에 농사 이야기를 읽고, 농작물과 꽃과 들짐승과 나무들의 사진들을 찾아보면서 이제 곧 다가올 가을이 느껴진다. 당장은 햇볕이 너무 따갑지만, 조금만 선선해지면 들판에 나가보고 싶다. 이 책을 읽고 배운 것들로 인해 논의 벼들과 밭의 작물들이 한결 더 흥미로운 볼거리가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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