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 거지 광문이 샘깊은 오늘고전 4
박지원 지음, 박상률 엮음, 김태헌 그림 / 알마 / 200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박지원의 <허생전>이 새로 우리말로 다듬어져 나왔다. 시인 박상률이 옮긴 것이다. 이 책에는 박지원의 초기작인 <거지 광문이>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110쪽 가량의 얇은 분량에 읽기 좋은 디자인, 곳곳에 들어간 컬러 그림 등이 책을 읽는 내내 읽는 이의 기분을 상쾌하게 해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책의 장점은 박상률의 뛰어난 한국어 솜씨다. 그는 옛뜻을 잃지 않으면서도 오늘날의 독자가 읽기에 너무나 자연스러운 문장들로 박지원의 글을 되살려 놓았다. 게다가 오늘날의 독자가 글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정보들을 거의 표시나지 않게 작품 곳곳에 끼워넣기도 했다. <허생전>을 수록한 다른 책들이 수없이 많을 것임은 쉽게 짐작할 수 있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이 보다 더 나은 판본이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김태헌의 그림이 너무 단순하고 구체성이 없다는 것이다. 기왕에 그림을 넣기로 한 것이라면 박지원 시대의 풍속을 알게 해주고, 또 작중 인물들의 특징을 드러낼 수 있도록 좀 더 구체적인 그림이 들어가는 것이 훨씬 교육적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 김태헌의 그림은 색감이나 형태가 그런대로 볼 만하기는 하지만, 너무 미니멀하고 구상도 임의적이라 작품을 이해하는 데는 거의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랜만에 <허생전>을 다시 읽어보니 여러가지 질문들이 떠오른다.

1. 재산도 없으면서 10년동안 공부만 하겠다고 책상 앞에만 앉아 아내를 혹사시킨 허생의 태도 역시 비판받아야 할 고루한 남성의 모습이 아니던가? 

2. 아무 대책도 없이 그렇게 지내던 허생이 아내가 화를 내자 갑자기 7년만에 공부를 끝내고 가출을 한 이유는 무엇인가?

3. 변부자는 어찌하여 만냥이라는 돈을 생면부지의 허생에게 덜컥 빌려주었는가? 사람의 인상을 보고 그렇게 했다고 하지만, 과연 이것이 있을 법한 일인가? 또 자신의 노력 없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려 일을 도모해보겠다는 허생의 터무니 없는 발상은 과연 옳은 것인가?

4. 책만 읽어오던 허생이 어떻게 안성장에 가서 매점매석을 할 생각을 할 수 있었던가? 허생 자신도 나중에 인정하고 있지만("백성의 것을 도적질하는 장사 방법", 65쪽), 매점매석이란 부도덕한 상행위가 아닌가? 허생은 부도덕한 행위를 하려고 돈을 빌렸는데, 왜 돈을 벌겠다고 한 것인가? 결국 나중에는 다시 빈털털이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허생은 자신의 능력을 한 번 시험해보고 싶었던 것 뿐이었을까? 혹은 그런 시험을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알아보고 싶었던 것일까? 만일 그런 것이라면 허생의 시도는 당초부터 필요없었던 것처럼 보인다. 그는 너무나 유능하고 완벽하고 손쉽게 모든 시도를 성공시키니까 말이다.

5. 허생은 도적떼를 한 섬으로 이끌어 그 곳에서 일종의 유토피아를 건설한다. 그러나 그 유토피아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이천 명 뿐이다. 소수의 선택된 사람들만 구원할 수 있는 유토피아의 구상은 과연 얼마나 보편적인 가치를 지니는가? 또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의 삶을 구원하기 위해 허생은 무엇을 했는가? 아무 것도 한 것이 없지 않은가?

6. 허생은 왜 자신이 건설한 유토피아를 떠나는가? "땅은 좁고 덕은 모자라"(57쪽) 떠난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 곳을 떠난 그가 하는 짓은 다시 은둔하는 것 뿐이다. 은둔하는 사람에게 넓은 땅이 왜 필요하며, 유토피아에 덕이 모자란다면 덕을 키우는 데 기여해야 했을 일이 아닌가?

7. 허생은 섬을 떠나면서 글 아는 사람은 모두 배에 태워 함께 데리고 나온다. 그 이유는 글을 아는 것이 "불행의 뿌리"(60쪽)가 될 것이라는 데 있다. 그렇다면 허생은 반지식주의의 입장에 서 있는가? 그런 입장이라면 그 자신은 무엇때문에 10년 공부를 한다며 책만 붙잡고 있었던 것인가?

8. 허생은 섬을 떠나면서 은 오십만 냥을 바다 속에 던져 버린다. 그러느니 그 거금을 애국심이 강한 허생이니만큼 국가를 위해 쓰거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쓰는 것이 옳았을 것 아닌가? 그 돈이면 얼마나 많은 가난한 자들과 병든 자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었을까? 그런 돈을 왜 버려버리는가? 

9. 은둔은 개인적으로는 세상에 대한 금욕적 항거를 의미할 수 있으나, 어쩔 수 없이 세상에 대한 포기를 의미하기도 한다. 더럽고 음흉한 세상에서 벗어나는 순간, 자신은 깨끗해질 수 있으나 세상은 더러운 채 그대로 남게 된다. 물론 더러운 세계의 일원이 되는 것보다는 은둔이 차라리 낫다고 하겠지만, 이런 선택은 어디까지나 차선이 아닐까? 세상을 그렇게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보고 있으며, 또 세상이 나아지는 길까지 알고 있는 허생이라면 왜 그 길을 추구하지 않는가? 이는 비난이라기보다는 허생에 대한 지나친 이상화를 염려하는 지적이다. 당시 양반계급에 대한 허생의 비판은 정당하다. 그러나 결국 허생은 작품의 끝에서 "어디론가 사라지고 빈방만"(77쪽) 남겨놓고 만다. 아내로부터도 떠나는, 완전한 은둔을 택한 것이다. 이러한 허생의 결말은 신비롭기는 하지만, 현실도피적이며 무책임하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지식인이 세상에서 도피하는 것이 당대 조선을 혁신하는 길이었다고는 누구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어쩌면 이런 온갖 의문들을 남겨놓고 고민하게 하는 것이 이 작품의 미덕인지도 모른다. 이 작품을 현실적 소설이 아니라 우화나 풍자로만 읽는 것이 옳은 독법일 수도 있다. 그러나 허생이 보여주는 문제의식은 어디까지나 현실적인 것이다. 그리고 작금의 정치판만 보더라도 허생의 고민이 지닌 보편적인 성격을 금방 짐작할 수 있다. 지리멸렬한 세상에 대한 한탄과 염증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느 시대에나 인간이 느껴온 감정의 일부일 것이다. 세상에 대한 올곧은 비판과 가차 없는 조롱, 여기까지가 허생의 미덕이다. 그러나 그 비판과 조롱이 해답의 전부가 될 수 없다는 데 허생의 한계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허생의 매점매석이 고대 그리스의 탈레스를 연상시킨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전하는 바에 따르면, 탈레스는 어느 해에 올리브 풍년이 들 것을 예측하고 밀레토스 시내 전체의 기름틀을 몽땅 세내어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전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덧붙인다. "우리는 이로부터 철학자는 그가 원하기만 한다면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지 철학자의 마음은 더 높은 것을 지향하고 있을 뿐인 것이다." 과연 그럴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