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2시.창틀에서 내려왔다. 거의 세 시간을 웅크리고 다에 앉아 있었다. 인터폰 화면을 눌러, 아주머니께서대문을 열어 사라지는 것까지 보고 테라스로 향했다테라스에 있는 대형 화분들을 일제히 바깥으로 옮겼다. 돌돌 말려 있는 호스를 풀어 물을 틀었다. 맨발로들풀들이 밟힌다. 화분의 몸통을 깨끗하게 닦고, 물리개에 물을 채워 잎부터 줄기 뿌리까지 흠뻑 젖도록물을 주었다. 광합성을 위해 태양이 잘 드는 구석에화분들을 가져다 놓았다.
"네? 그게 무슨......"아무래도 병원을 착각하신 것 같아요.""저기요, 그럼 제가 이 번호를 어떻게 알고 전화를했겠어요. 병원에서 나눠 준......!""검은색 양장본 노트 말씀하시는 거죠? 그건 외부에 돌리기도 하는 노트라....."
방 안에 있는 무선 전화기를 들고 다락으로 향했다. 거실에서 통화를 하면 아주머니가 들을 수 있었다. 꼬리가 잡힐 만한 일들을 사전에 방지해야 한다.동그란 버튼을 힘주어 눌렀다. 창틀에 올라 앉아, 신호음이 끊기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전화는 계속해서음성 사서함으로 넘어갔고, 인내심이 바닥을 긁기 시작했을 때 간신히 연락이 닿았다.
다른 방안을 모색했다. 약을 줄 수 있는 사람한테문의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떠올랐다. 즉시옷장 문을 열고, 병원에서 가져왔던 검은 가방을 찾았다. 가방은 안에 있는 내용물을 그대로 가진 채, 깊숙이 처박혀 있었다. 가방을 끌어 내리고 지퍼를 열었다. 밑부분을 지탱하는 바닥에 딱딱한 다이어리가 잡힌다. 병원에서 나눠 준 노트다.
다른 사람들은 최악의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약을먹는다지만, 나는 최악이 떠오르기에 약을 먹어야 한다. 하얀 알갱이가 내게 주는 안도의 힘은 태산처럼높았다. 하지만 천제림이 그것들을 모조리 가져가 버리자, 급속도로 좌절감에 빠지기 시작했다. 온갖 불행한 일들의 연속이 떠오르고, 과거의 모습들이 상기되며 무너진 터널 안에 갇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