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밀한 이방인 - 드라마 <안나> 원작 소설
정한아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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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여자는 삶이 이미 자기를 스쳐지나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자리가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


'나'라는 존재의 낱낱을 숨기고 타인을 연기할때 삶의 무게는 한층 가벼워진다. 우리가 스스로 뒤집어쓴 가면에 마음의 평안을 얻는 이유. 내가 바라마지 않는 이상적인 나와 현실의 나, 그 사이의 괴리감은 가면을 더욱 견고하게 만든다. <친밀한 이방인>의 화자 '나'가 '엠'의 인생의 흔적을 좇았던 진짜 이유는 다시 글을 쓰고 싶었기 때문이다. '나'의 엄마가 암 선고를 받은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한 이유, '진' 그리고 엠과 얽힌 많은 등장인물들 역시 결국 같다. 옳고 그름을 떠나 제대로 삶을 살고 싶었을 뿐. 어쩌면 인생은 가면극과 같을지도.



"우리 모두 결국 죽어." 엄마는 간결하게 말했다.
"그날, 네 아버지가 암 선고를 받은 날 말이야.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 사람도 나도 이제 늙었고 이렇게 하나둘 고장이 나다가 죽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니 더는 견딜 수가 없는 거야. 한 번도 내가 원하는 대로 살아보지 못했는데, 늘 꼼짝도 못하게 나를 짓누르며 살았는데, 이대로 끝이 난다면 내 인생은 대체 뭔가 하고 말이야."



아버지와 엄마. 나는 그들과 한집에서 이십 년간 함께 살았지만 두 사람의 진짜 관계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다. 지극히 평범한 인간들이 평범하게 걷고 있는 길 위의 풍경처럼 그들의 결혼생활도 그랬다. 우리가 질서를 연기하는 한, 진짜 삶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렇다면 진짜 삶은 어디 있는가? 그것은 인생의 마지막에서야 밝혀질 대목이다. 모든 걸 다 잃어버린 후, 페허가 된 길목에서.


오랜 취재 끝에 '나'는 엠의 비극적인 삶은 세밀히 알 수 있었지만, 그녀에 대해선 아무것도 알아낼 수 없었다. 그 가면 뒤엔 아무도 없다. 이 세상에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나'는 없다. 나도 날 모르는데 당신이 날 알 수는 없는 일. 부모도 배우자도 친구도 결국 친밀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그것이다. 그리고 우린 서로를 이용하며 살아간다. 잘 살고 싶어서, 사랑하고 싶어서, 행복해지고 싶어서. - "속는 자와 속이는 자는 함께 쾌락에 빠져들기 마련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후자의 것보다 전자의 것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지요." 소설 中 - 엠은 여러 얼굴을 하고 가짜 삶을 살았지만 사람들은 그녀에게서 위안과 희망을 얻었다. 타인에게 의미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그 일이 놀랍게도 우릴 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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