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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이라는 소설 1
제프리 유제니디스 지음, 김희용 옮김 / 민음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제목만 보고 청춘 남녀의 사랑이야기인가 했는데, 메인이 청춘이고 사랑은 곁다리였다. 방황하는 청춘과 씁쓸한 사랑 이야기. 시작은 대학교 졸업식날 아침, 초인종이 울리는 소리에 눈을 뜬 매들린을 괴롭게 한 것은 부모님의 방문과 숙취 그리고 실연이었다. 사회 주류계층에 속하며 안전지대 안에서 자라온 매들린은 위험요소와는 거리가 멀다. 문학을 좋아해서 영문학을 전공한 그녀가 대학교 졸업반이 되어서야 떠밀리듯 수강한 기호학 수업에서 레너드를 만났다. 늘 혼자 다니며 어딘지 음울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동시에 성숙해보인다. 그동안 매들린이 했던 몇 번의 연애는 따분하고, 다분히 육체적이었다. 그렇기에 그녀가 똑똑하고 주도적이며 어른스러운 레너드에게 빠진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다. 나라도 그랬을테니까. 따분하게 흐르는 일상에서 발견한 특별함을 애써 밀어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 특별함을 느낀 사람이 또 있다. 신입생 예비 교육 기간에 열린 어느 파티에서 미첼은 늘 그렇듯 자신과는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와 있는 사람처럼 불편함을 느낀다. 그때 군중 속에서 그녀를 발견한다. 자신처럼 파티에 집중하지 못하고 어딘지 불편한듯 보이는 매들린. 이렇듯 언제나 타인에게 특별함을 느끼는 순간은 불시에,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난다.
소설이라는 장르는 결혼 플롯과 함께 그 절정에 도달했으며, 결혼 플롯이 사라지면서 다시는 원래의 위치를 되찾지 못했다는 것이 손더스의 견해였다. 인생의 성공이 결혼에 달려 있고 결혼은 돈에 달려 있던 시대에 소설가들은 글을 쓸 만한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있던 셈이다. 장대한 서사시는 전쟁을, 소설은 결혼을 찬미했다. 남녀평등은 여성에게는 이롭지만 소설장르에는 해로웠다. 게다가 이혼은 소설을 완전히 망쳐놓았다. 에마[제인 오스틴의 소설 '에마'의 여주인공]가 법적으로 별거를 신청할 수 있다면 그녀가 누구와 결혼하든 무엇이 문제겠는가? 이저벨 아처와 길버트 오스몬드[헨리 제임스의 소설 '여인의 초상'의 두 주인공]의 결혼은 혼전 합의서의 존재에 어떤 영향을 받았을까? 결혼은 더 이상 큰 의미가 없으며 소설 또한 마찬가지라고 손더스는 우려했다. 오늘날 결혼 플롯을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단 말인가? p.61
제프리 유제니디스 <결혼이라는 소설>의 영문 제목은 THE MARRIAGE PLOT 이다. 소설 쓰기에 좋은 주제였던 '결혼 플롯'이 그 힘을 잃으면서 오늘날엔 찾기 힘든 시시한 소재가 되었다. 결혼이 갖는 의미가 많이 퇴색된 요즘, 제프리 유제니디스의 소설은 분명 예전에 읽었더라면 나의 감상평이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어쨌든 <결혼이라는 소설>은 결혼 플롯의 새로운 유형을 선보인 소설이 아닐까 싶다.
<사랑의 단상>은 완벽한 상사병 치료제였다. 그것은 심장 수리 설명서였고, 뇌를 위한 일종의 공구였다. 만약 머리를 쓴다면, 사랑이 문화적으로 구축된 방식을 인지하고 자신의 증상을 전적으로 정신적인 것으로 간주하기 시작한다면, '사랑에 빠진' 존재란 그저 하나의 관념에 불과함을 깨닫는다면 바로 그 순간 사랑의 폭압에서 스스로 벗어날 수 있을 터였다. 매들린은 그 모든 것을 알았다. 문제는 그것이 아무 소용 없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사랑에 대한 바르트의 해체론을 온종일 읽으면서도 레너드를 향한 자신의 사랑이 눈곱만큼도 줄어들지 않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랑의 단상>을 읽으면 읽을수록 그녀는 점점 더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모든 페이지에서 자신을 보았다. 그녀는 자신을 바르트가 만든 가공의 '나'와 동일시했다. p.211
드라마나 영화에선 이별노래를 들으며 떠나간 연인에 대한 상실감에 눈물을 주륵주륵 흘리는데 이 책에선 책을 읽으며, 그것도 사랑에 대한 해체론을 읽으며 레너드와의 사랑을 곱씹는 모습을 보이는데 어딘지 낭만이 느껴진다. 1980년대를 배경으로 해서 일까, 청춘이라는 시간 위에 있어서 일까. 가을이 느껴지니 마음이 헛헛하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책들 가운데 부쩍 롤랑 바르트의 <사랑의 단상>이 눈에 들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