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코의 미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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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담백한 문장을 좋아한다. 꾸밈없이, 불필요한 묘사나 서사가 없는, 거짓없는 문장. 짧은 독서인생에서 이토록 맘에 드는 글을 만난 적이 없다. 읽을 때 재밌으면 그만이고, 글 참 잘쓰네, 감탄하며 책을 덮으면 그만이었다. 호불호 불분명한 내가, '쇼코의 미소' 첫문장을 읽었을 때 느낀 감정은 영혼의 떨림이었다. 담백한 문장이 좋다면서 뭐 거창하게 영혼까지 들먹이나, 싶겠지만 다른 표현은 찾지 못하겠다. 문장이 좋고 표현이 와닿아서 발을 동동 굴렀다.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하지만 턱도 벌릴 수가 없었다. 턱을 벌려 입을 열면 눈물이 쏟아져내릴 것 같아서였다. 그제야 할아버지의 마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몸이 말라가고, 피부가 누렇게 변해가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건 그냥 자연스러운 노화의 과정인 줄로만 알았다. 단지 노화가 조금 빠르게 진행된다고만 생각했다. 나 자신에게는 그리도 예민했으면서 할아버지의 상황에는 왜 그토록 무뎠었는지." - 쇼코의 미소 中



세상에 나와 같은 사람은 많을 것이다. 예민한 기질 때문에 일상에서 받는 상처가 유달리 크게 느껴지고, 항상 남들보다 뒤쳐진 기분을 느끼며, 마음 한구석엔 늘 어둠을 품고 살아가는 것 같은. 고독과 외로움이 나 혼자만의 감정이 아니란 것은 잘 안다. 다들 비슷하게 살아가니까. 그러나 이런 공허함은 타인과 나누기 전까지는 온전히 나의 몫이다. 나에게 '쇼코의 미소'는 교감이고 공감이었다. 더 나아가 타인과 단절하고 내면으로만 파고드는 나의 이기적인 면을 가슴 저릿하게 일깨워주었다. 두려움 없이, 온전한 내가 되는 것. 내가 나아가고 싶은 삶의 방향이다.



"그런데 너도 여기에 초대받아서 왔어?"

"아니. 처음에는 그냥 일주일만 머물려고 했었어. 일주일이 이 주일이 되고, 이 주일이 삼 주일이 되고, 나도 내가 얼마나 여기에 있을지 몰라. 학교도 휴학했고, 아무 계획이 없어. 난 스물일곱 살이야. 여기서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는 걸 알아."

"왜?" 한지가 물었다. "도피하는 건 옳은 게 아니니까. 내 삶에 대해서 책임감을 가져야 하니까."

"괜찮아, 영주." 한지가 말했다. 충동적으로 여기에 머물기로 한 것도, 네가 해야 했던 일을 내팽개쳐버린 것도, 수도원 생활도 모두. 괜찮아. 그 이야기를 하는 한지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표정이었다. 나를 위로하려는 얼굴도 아니었고, 그저 누구나 할 수 있는 빈말을 할 때의 얼굴도 아니었다. 웃을 때조차도 상대방을 의식하는 어른들의 얼굴도 아니었다. 한지의 얼굴은 그저 자연스럽게 풀려 있었다. - 한지와 영주 中



무거운 이야기를 하고 있으나 외면하고 싶지 않은 것은 최은영 작가가 가진 이런 따뜻한 시선 때문인지도 모른다. 힘내, 잘 될거야, 처럼 받는 즉시 불편해지는 부담스러운 위로가 아닌 공감의 한마디. 어제까지도 나를 짓누르던 고민이 한순간 별거 아닌 것으로 전락해버릴 수 있는 힘. 나는 늘 '한지' 같은 인물이 내 주변에 있기를 바라왔다. 나를 북돋게 하고, 좌절할 때면 다 괜찮다고 위로해주는. 주변인은 아니지만 삶에 귀감이 되는 책을 만났고 작가를 만났다. 이제 바라기만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그런 사람이 되겠다. 타인을 포용할 수 있는 따뜻한 어른이 되겠다.

 


"불교 신자였던 할머니는 사람이 현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윤회한다고 했다. 마음이 기억에 붙어버리면 떼어낼 방법이 없어 몇 번이고 다시 태어나는 법이라고 했다. 그러니 사람하는 사람이 죽거나 떠나도 너무 마음 아파하지 말라고, 애도는 충분히 하되 그 슬픔에 잡아먹혀버리지 말라고 했다. 안 그러면 자꾸만 다시 세상에 태어나게 될 거라고 했다. 나는 마지막 그 말이 무서웠다. 시간은 지나고 사람들은 떠나고 우리는 다시 혼자가 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기억은 현재를 부식시키고 마음을 지치게 해 우리를 늙고 병들게 한다. 할머니는 그렇게 말했었다." - 한지와 영주 中



순간 순간의 문장들은 아무에게도 내보이지 않는 내 마음에 곁가지를 쳐내고 잘 다듬어 글로 옮겨놓은 것처럼 나를 울렸다. 나조차도 내가 왜 이토록 이 소설에 마음이 뭉클해지는지 궁금했는데, 해설에 나온 설명을 보고 알았다. "그런 힘은 기본적으로 서사의 결 자체로부터 비롯되는 것인데, 좀더 직접적으로는 최은영 작가가 만들어낸 인물들의 성격에서 기인하는 면이 많아 보인다. 그들은 대체로 희미하고 조용한 사람들이고, 삶 속에 있을 수 밖에 없는 우울과 슬픔 속에서도 서로 간의 유대화 공감의 끈을 놓지 않으며 무엇보다도 정감의 깊이를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다." - 해설 中  바로 나의 이야기이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의 이야기이기에 공감하고 또 공감했던 것이다. 등장인물들이 겪는 고통엔 우울증이 기반돼 있다. 그리고 그들의 곁엔 힘이 되어주는 이들이 있다. 가까운 가족이기도 하고, 낯선 타인이기도 하며, 소통이 어려운 외국인이기도 하다. 언어를 넘어서는 정서적 공감과 유대감. 이 시대를 살아가는데 있어 꼭 필요한 덕목이다. 선천적으로 눈이나 위가 약한 사람이 있듯이 마음이 특별히 약해서 쉽게 부서지는 사람도 있는 법이라고, 전혀 짐작할 수 없는 타인의 고통 앞에 겸손히 귀를 열고 싶다던 저자의 말. 나는 앞으로 최은영 작가의 글이라면 무조건 읽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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