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손님 (반양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무더운 여름, 소매를 걷어 올린 파란 셔츠를 펄럭이며 그해의 여름 손님이 도착했다. 늘 그렇듯 잔잔하게 지나갈 줄 알았던 여름은 두 사람의 삶을 영원히 바꿔 놓는다. 그의 특이한 말버릇, 어딘지 냉정해 보이는 시선, 파란색 셔츠, 에스파듀, 그가 천국이라 부르는 해변, 천국에서 그와 함께하는 평온한 시간. 절절한 엘리오의 감정은 마치 나에게도 그런 기억이 존재했던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엘리오가 올리버에게 느끼는 첫사랑의 순수함과 열망. 그동안 잊고 살아온 사랑의 낱낱을 엘리오의 열렬한 마음이 상기시켜주었다. 



나는 그가 우리 집을 빨리 떠나서 모든 게 끝났으면 했다. 차라리 그가 죽었으면 하기도 했다. 계속 그가 생각나고 언제나 볼지 알 수 없는데 적어도 그가 죽으면 모든 게 끝날 테니까. 내 손으로 그를 죽이고 싶기도 했다. 그의 존재가 얼마나 신경 쓰이는지, 누구든 무엇이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그 태평함을 견딜 수 없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었다. 55p

갑자기 나타난 그를 보고 심장이 쿵 내려앉으면 두려우면서도 흥분되었다. 그가 언제 나타날지 두려웠다. 나타나지 않아도 두려웠고 나를 쳐다봐도 두려웠다. 쳐다보지 않으면 더욱 두려워졌다. 결국 고뇌가 나를 완전히 지치게 했고 피부가 데일 정도로 뜨거운 오후면 그냥 거실 소파에 누워 잠이 들었다. 꿈을 꾸면서도 누가 거실에 있고 까치발로 오가는지, 누가 서서 나를 얼마나 쳐다보는지, 최대한 소리 내지 않고 오늘 자 신문을 보다 포기하는지, 누가 오늘 상영 영화를 확인하고 나를 깨워야 할까 고민하는지 다 알았다. 77p


내일 아침 일찍 수영을 하러 간다면 지금 과도하게 넘치는 자기혐오를 이겨 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자기혐오에 익숙해지기도 하는지 궁금했다. 아니면 누적된 불안이 너무 커서 유예 기간을 가진 한 덩어리 감정으로 압축시키는 것일까? 어제만 해도 침입자처럼 느껴지던 타인이 내가 지옥에 빠지는 걸 막아주는 존재가 되는 걸까? 새벽에는 고통의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밤에는 그 고통을 없애 줄 사람이 되는 것일까? 195p



정체가 탄로나면 끝나버리는 게임처럼 엘리오의 사랑은 조심스럽기 짝이 없다.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챌까 걱정하면서도, 동시에 애타는 마음을 영영 알아주지 않을까 겁이 나는 것은 비단 동성간의 사랑만은 아니다. 감정의 형태는 성별에 구애받지 않는다.

'사랑', 그 복합적인 감정 속에 자리한 것은 서로 다른 성질의 것을 야기한다. 그저 작은 호기심에서 시작된 감정은 설렘, 기쁨, 흥분, 집착, 질투, 고통, 절망, 상실, 자기혐오 등 하루에도 몇 번씩 감정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친다. 그러다 마침내, 절망 속에서 빠져나와 평소와 다름없는 당신을 봤을 때에야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내가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우리는 한때 별을 찾았다. 나와 당신. 일생에 한 번만 주어지는 일이다. 300p



일생에 한 번만 주어지는 일. 단순히 사랑을 넘어서 내가 나일 수 있게 하는 사람, 나보다 더 나와 같은 사람. 일생에 한 번뿐이라 했으니 나에게도 나만의 별을 찾을 기회가 주어진다는 전제하에 진지하게 생각해본다. 나는 당신을 알아볼 수 있을까. 당신 앞에 솔직할 수 있을까. 일생을 당신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아니면 찬란한 빛을 뒤로 하고 올리버처럼 익숙함을 택할까. 특별함이 영원을 약속하진 않는다. 만약 올리버와 엘리오가 함께 했더라도 밝게 빛났던 그 여름의 기억이 인생에 가장 찬란한 한때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어느 쪽을 택하건 따라붙는 후회와 미련. 그러나 선택지를 쥔 것이 정말 '나'일까? '사회'일까?


동성애 소설 보다는 끝나가는 여름에 읽는 한 소년의 아릿한 성장소설이라 말하고 싶다. 엘리오가 첫만남에서 작별의 순간을 떠올렸듯 그들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지만 앞으로 다가올 무수한 여름에, 아마도 그들은 함께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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