좀비 연대기 클래식 호러
로버트 E. 하워드 외 지음, 정진영 엮고 옮김 / 책세상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서인도 제도에 위치한 아이티 섬의 형법 249조항은 다음과 같다.

<실제적 사망을 일으키지 않으면서 무력한 혼수상태를 야기하여 상당 기간 지속시키는 물질을 사람에게 적용하여 그의 의지에 반해 고용하는 행위는 살인 미수에 준한다. 그런 물질을 주입한 사람을 매장할 경우, 그 결과와 상관없이 그 행위는 살인으로 간주한다.>


무슨 소린고 하니 이른바 '좀비화'를 법으로 금지한다는 조항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오락거리에 불과한 '좀비'가, 한때 아이티에선 실질적 문제였던 것이다. 아이티 섬 뿐만 아니라 서인도 제도에 위치한 곳곳의 섬에서 이와 같은 미스터리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빠르게 달리며, 늘 분노해 있고, 살아있는 사람을 공격해 굶주린 배를 채우는 요즘 좀비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어디선가 들려오는 북소리. 부두교 주술사(Bokor)에 의해 무덤에서 되살아난 시체는 자의식이 없고 명령에 복종하며 쉬지 않고 일을 한다. 주로 사탕수수밭에서 노예로 부려지는 이 부활한 시체들에게는 공통된 금기사항이 있다. 그것은 바로 소금. 음식은 섭취하나 나트륨은 금물인 이들에게 금기사항이 깨졌을때 벌어지는 난장판은 소설을 통해 확인하시길.




아주 드문 경우가 아니라면, 누구나 좀비를 알아볼 수 있다. 좀비는 말을 하지 않고, 항상 앞쪽만 응시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면, 좀비로 의심되는 자에게 짠 음식을 줘보면 된다. 좀비는 소금을 먹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혹은 좀비에게는 소금 맛을 보고 나면 자신이 죽었음을 깨닫고 무덤이 어디에 있든 기필코 자신이 묻힌 곳을 찾아가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아무도 그들을 막을 수 없다!



그렇다고 이 단편집에 이런 짠내나는 노예 좀비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단편은 '야성의 부름'을 쓴 작가 '잭 런던'의 짧고 강렬한 '천번의 죽음'이었다. 과학적 접근방식을 택한 이 소설은 불멸의 영혼을 가진 한 남자의 이야기로, 좀비 소설의 새로운 형태를 보여주었다. 결말부에 느껴지는 카타르시스는 아이러니하다.




아버지에겐 이성이 전부였고, 타자에 대한 사랑이나 연민 같은 것들은 그저 극복해야 하는 나약한 결점일 뿐, 그는 그런 감정을 느끼거나 이해할 수 없었다. 그렇다보니 그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네게 생명을 주었으니, 그것을 가져갈 권리 또한 나한테 있지 않겠냐?" 그렇다고 해서 그걸 원하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단지 필요할 때마다 내 생명을 빌렸다가 적절한 시기에 다시 돌려주고 싶을 뿐이라고 했다. "물론 불상사가 생길 수도 있지만, 너는 받아들여야 한다. 인생이란 게 원래 위험으로 가득 차 있으니까."




죽어서까지 죽지 못하고 노동력을 착취 당하는 흑인 노예. 부두교 주술에 벌벌떠는 유색인종과 그들의 우둔함에 코웃음 치는 백인들. 민간 설화와도 같은 '좀비 연대기'는 대부분의 소설이 19세기 후반에 쓰여졌는데, 판타지 장르이지만 당대 시대상을 유추해볼 수 있다. 흉폭하고 날쌘 좀비가 주는 공포와는 또다른 섬뜩함을 만나고 싶다면 12편의 단편집 '좀비 연대기'를 통해 좀비 원형의 매력에 빠져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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