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닌 계절
구효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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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뭐라고 정의 내려야 할까. 나란 존재에 대한 의구심? 삶에 대한 역설? 머리가 복잡하다. 애초에 정의 내리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는지도.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분명한 것은 바람 한 점 없이 습하디 습한 여름인 것을.


사람들간의 소통은 불분명하고 벽면엔 누가 그렸는지 모를 낙서로 가득하다. 우연히 생긴 카메라로 매일 반복되는 일상을 쉼없이 찍어대기도 하며, 혼인 후 함께한 시간은 찰나에 불과했던 부부가 육십이 년만의 재회 끝에 맞이한 것은 고요한 침묵이었다. 작은 섬마을과는 이질적인 젊은 선생은 속을 알 수가 없으며 어딘지 모르게 위태롭다. 평생을 남처럼 살아온 아들의 죽음에 이유를 알기 위해 남은 평생을 하늘에 오른 이도 있다. 온통 모호한 것 투성이인 삶에서 분명한 것은 계절의 감각 뿐이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 혹은 타들어 갈 듯한 더위. 그 뿐이다.


파, 하, 이응, 미음 등 독특한 등장인물의 이름과 불명확한 시공간에 장르의 경계는 불투명해진다. 나는 작가의 의도대로 처음부터 끝까지 더듬더듬 읽어나갔다. 낯선 땅에 떨어진 것처럼 무언가를 파악해보려 하지만 알 수 있는 건 어지러운 상황과 뜻모를 감정 뿐이다. 죽음 역시 매 단편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하나의 계절이 죽고 또 다른 계절이 오듯 죽음은 삶의 수레바퀴를 굴린다. 그러나 반복되는 불필요하고 무수한 죽음은 어떠한가. 새들의 모가지는 꺾이고 비닐에 담겨 먹기 좋게 숙성되며, 닭의 모가지 역시 꺾이고 털이 뽑히며 내장은 긁어내진다. 핏물이 흐르는 고기를 끊임없이 먹어치우는 사람들, 그리고 전쟁 통에 사람들에게 죽어나가는 사람들. 이렇듯 소설 속엔 다양한 죽음들이 함께 자리하고 있다.

난해하다, 라고 단정짓기에는 구효서 작가만의 분명한 문체가 있고 뚝심이 있다. 해체하고 조립하듯 소설을 뜯어 읽기보단 생각을 버리고 그대로 받아들이자. 그래야 조금 더 다가설 수 있다. 무튼 이렇게 힘겹게 읽고 나니, 뒤에 적힌 작가의 글에 웃음이 나왔다. 선입견에 대한 거부로, 힘들게 쓰되 읽히지도 팔리지도 않는 소설을 쓰고 있다는 자조 섞인 말. 그저 읽는 나도 힘들었는데, 쓰는 사람은 얼마나 더 힘들었을까. 그래도. 그래도. 사유하게 하는 글은 언제나 좋다.


소설 전반에 걸쳐 탄식하듯 내뱉는 말이 있다. 이게 다 뭐야. 이게 다 무어야. 뭐 아무렴 어떠한가. 시간과 계절은 더디게 흐르는 것 같아도 늘상 무언갈 깨닫기도 전에 눈앞에 당면해 있듯, 계절과 삶 또한 그런 것 아니겠는가, 감히 말해본다.




이유와 사정이 무엇이든, 그것을 알 수 있든 없든, 사람과 집과 골목과 마을이 온통 거대한 배에 바리바리 실려 우주를 유랑하는 광경을, 이응은 자주 떠올렸다. 눈보라인지 운석우인지를 헤치며 몹시도 추운 은하를 건너는 광경을. 크고 어둡고 깊은 구멍과도 같은, 가없는 허공의 위용을 이응은 떠올렸다. 그럴때마다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적막이 그를 에워쌌고, 딛고 있는 땅이 기우뚱 흔들렸다.



소나무는 바위틈에서 자랐다. 흙이라고는 한줌도 없었다. 수십 년간 소나무가 먹은 거라곤 바위의 균열이었고 그 틈새의 어둠이었따. 하나쯤 더 있다면 적막이었다. 바위가 아니더라도 주위에는 소나무의 타감작용으로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했다. 소나무는 스스로 적막을 초래했고 그것을 자신의 자양으로 삼았다. 그래서인지 소나무 그림자와 4월의 송화향은 별스럽게 짙었으며 남자는 그것을 두려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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