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비행운
김애란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2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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톨스토이의 장편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문장은 이렇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  나는 이 시대의 나름나름의 불행들이 모여 비행운으로 탄생했구나 생각이 든다. 낯설지만 전혀 낯설지 않은 이야기. 김애란 작가의 담담한 문체는 비극적 상황을 더욱 극대화시킨다.



"나는 우주의 고아처럼 어둠 속에 홀로 버려져 있었다. 마치 물에 잠긴 마을이 아닌 태평양 한가운데에 떠 있는 기분이었다."


"열차가 덜컹일 때마다 내 속에, 그리고 캐리어 속 텅 빈 어둠이 표 안 나게 흔들렸다."


그것은 고립감이었다. 너도 느끼고 나도 느끼는 감정이라지만 온전히 스스로 감당해 내야 하는 것. 의지할 곳 없는 서윤이 낯선 타국의 호텔방에 누워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백석의 시를 읊듯, 지독한 고립은 고독 그 자체다. 어떠한 희망도 상황의 해결도 없이 이야기는 그냥 그렇게 흘러간다. 이름모를 바다 위 외딴섬처럼 온통 물속에 잠겨버린 마을에서 대형 크레인 위에 홀로 남은 소년, 늘 무시받던 인생에 찾아온 아주 찰나의 비극적 사랑, 혐오하던 대상에 둘러싸여 진통이 시작된 임신부, 죽어서도 폐지를 줍는 할머니의 모습을 마주한 손녀, 아무것도 아닌 것보다 더 나쁜 것이 되어버린 여성. 이야기는 속절없이 끝을 맺는다. 우리가 행복하고 즐거운 결말에 그 다음 일을 궁금해 하지 않듯 불행한 일도 그처럼 단지 흘러가는 하나의 사건일뿐이다.



"그리고 언젠가 이 시절을 바르게 건너간 뒤 사람들에게 그리고 제 자신에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나, 좀 늦었어도 잘했지. 사실 나는 이걸 잘한다니까 하고 말이에요. 하지만 당장 제 앞을 가르는 물의 세기는 가파르고 돌다리 사이의 간격은 너무 멀어 눈에 보이지조차 않네요. 그래서 이렇게 제 손바닥 위에 놓인 오래된 물음표 하나만 응시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 '돈'과 역시 중요한 '시간'을 헤아리며, 초조해질 때마다, 한 손으로 짚어왔고, 지금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그것.
'어찌해야 하나.'

그러면 저항하듯 제 속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요.
'내가, 무얼, 더.'"


"몇몇 항공기는 탑승동 그늘에 얌전히 머리를 디민 채 졸거나 사색 중이었다. 관제탑 너머론 이제 막 지상에서 발을 떼 비상하고 있는 녀석도 있었다. 딴에는 혼신의 힘을 다해 중력을 극복하는 중일 테지만 겉으로는 침착하고 여유로워 보였다. 얼마 뒤 녀석이 지나간 자리에 안도의 긴 한숨 자국이 드러났다. 사람들이 비행운이라 부르는 구름이었다."


일이 잘 풀릴 때를 유의하라 했던가. 등장인물들이 희망을 품는 순간 더욱 깊은 구렁텅이로 빠진다. 최악의 상황에 처한 인간이 반사적으로 낙관적 사고를 하듯, 대책없이 막막하지만 그럼에도 나는 희망을 갖으련다. 물속에서 바삐 발을 구르는 백조처럼 우리도 계속해서 각자의 속도로,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삶을 나아가면 마침내 안도의 한숨과도 같은 아주 길고 멋드러진 비행운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스포트라이트 밖 어둠 속에서 불완전한 비행을 하는 우리 세대에게 김애란 작가가 전하는 작은 위로와도 같은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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